작은 것을 크게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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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30-44
2021년 3월에 이스라엘 고대유물 관리국에서 성경 사본과 미라와 바구니를 발견했습니다. 그 중에서 1만 5백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바구니도 발견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동쪽 유대 사막 Judaean Desert 무라바아트 동굴 Muraba’at cave에서 도기 등장 이전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약 1만 500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벽하게 보존된 직조 바구니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1만 500년이면 인간이 사용하던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도자기나 이런것들이 개발되기전에 만들어 사용하던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도자기같은 것들이 없을 때이니 이렇게 식물을 엮어서 음식이나 물건을 담는 보관용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바구니가 어떤 식물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바구니는 92리터를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발견된 바구니 안에는 흙만 들어 있었고요. 뚜껑으로 닫혀 있었습니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봐서 사람들이 이 동굴에 이 바구니를 보관해놓고 무언가를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본래 이러한 식물로 만든 바구니와 같은 물질들은 오래동안 버틸 수 없습니다. 금방 상하고 썩는데요. 유대 지역 특성과 사막 지역의 건조한 날씨 덕분에 고대 시대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오병이어 사건을 다루면서 43절에 열두 바구니가 나옵니다. 이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늘상 가지고 다니던 바구니였습니다. 물론 이렇게 큰 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것보다는 더 작아야 우리 생각에 납득이 되겠죠. 그러나 알 수는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바구니를 가방처럼 들고다니면서 먹을 것을 담고 필요한 물건을 담아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항상 무리지어 다니고 양들을 돌보면서 멀리 다녀와야 했고, 어부들은 물고기를 보관하기 위해 이러한 바구니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바구니는 연구자들에 의하면 두 사람이 같이 들고 다녔다고 하는데요. 아마 이러한 무게를 들고 다니려면 혼자서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발견된 바구니는 한 사람은 왼손잡이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바구니를 함께 들고다니면서 일을 하고 어업이나 농업이나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시대에 살았던 로마 풍자시인 유베날리스가 있는데요. 이 로마 풍자시인 유베날리스는 이 바구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유대인의 전형적인 물품’이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니 이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늘상 사용하던 바구니였고, 유대인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물건이었고요. 또한 가난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가난한 유대인의 상징과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스운 바구니였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들 가지고 다니고 가지고 다녀야했던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습니다.
이 바구니가 또 나오는 것이 있는데요. 이 바구니가 굉장히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입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아레다 왕의 총리가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교우들이 나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의 창문으로 내려 주어서, 나는 그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광주리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총리의 박해를 피해 급박하게 도망하던 상황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거주하던 다마스쿠스 성까지 총리의 군인들이 바울이 잡으러 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급박하게 도망을 칩니다. 교우들이 성벽 창문으로 몰래 바울을 이 바구니에 실어서 성벽 밖으로 내려줍니다. 마치 영화와 같습니다.
사람이 들어갈만큼 큰 광주리입니다. 튼튼한 광주리입니다. 바울의 이 사건을 기념하여 이 교회 이름은 창문교회입니다. 또는 광주리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당시 바구니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부들이 물고기를 담는 바구니로, 하루종일 먹을 양식을 담을 바구니로, 일상생활에서 여러 물건을 담을 바구니로, 심지어는 사람을 태워서 탈출시켜주는 바구니로도 사용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오는 바구니도 이와 같은 용도로 쓰였습니다. 이 사진과 모양은 다를 수 있고 크기도 다를 수 있지만 이 바구니는 당시 유대인들이 평범하고도 질리게 사용한 물건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많은 무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 이야기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병자를 고친 사건과 귀신을 쫓아낸 사건과 바다를 잔잔하게 한 사건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뛰어나시다는 것이 온 누리에 퍼졌습니다. 게다가 오늘 말씀의 앞부분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냐면 세례 요한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입니다. 마지막 선지자라 불리고 로마와 헤롯 왕을 향해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하고 지도자들에게는 위협이 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을 것이고요. 헤롯왕에게 더욱 화가 났을 것입니다. 현 지도자와 로마제국에 대해 저항의식이 더욱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사건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예수님으로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세례요한이 메시아라고 했고, 그보다 더 능력 많으신 분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 힘이 더 모아졌습니다. 모든 힘이 예수님에게로 모이고, 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33절에 보니까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가기 위해서 여러 마을에서 옵니다. 멀리서 오고요. 배를 건너서도 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바라보는데요. 어떻게 바라보시냐면 34절에 보면요.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렇게 목자 없는 양으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헤롯왕으로부터 제대로된 다스림과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헤롯도 로마의 앞잡이 노릇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는 종교지도자들의 인도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부패했고, 성전은 타락했습니다. 로마에게 넘어갔고,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돈만 밝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세례 요한마저 죽임을 당했으니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진리로 이끌 사람이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보고 불쌍히 바라보십니다. 아무도 그들을 제대로 이끌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진리로 이끌어줄 지도자도 선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겨졌던 민족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34절 끝에 보니까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가르치는 일을 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이 ‘가르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 잃은 양에게 이제 예수께서 목자가 되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 갑니다. 예수께서 설교를 오래하신 건지,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난 건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갑니다. 제자들이 와서 의견을 제시합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셍각하셨을까요? 제자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봤자 오천명이 넘는 인원을 먹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작은 믿음의 행동을 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를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로하여금 엘리사의 기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요.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맨 먼저 거둔 보리로 만든 보리빵 20덩이와, 자루에 가득 담은 햇곡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드립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시종은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그것을 어떻게 내놓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으니,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도 이 엘리사의 기적을 그대로 행하시는 것이고요. 제자들도 이 엘리사의 사건을 잘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기적을 믿으며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200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따지듯 묻습니다. 200데나리온은 2,000만원정도 되는 비용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산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각자 마을로 흩어져서 먹으러 가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알아보고 오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오지 않고,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자 예수님은 이 무리 중에서 먹을 것을 내어드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 한 사람을 찾으신 것이죠. 분명 누군가는 가지고 있지만 내어드리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 밥그릇을 잘 챙기는 사람이겠죠.
그러나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드린 사람이 있습니다. 별 생각 없이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배고파서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드리라는 심정으로 드렸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엘리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 엘리사와 같은 예수님이시니까, 예수님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이시니까 엘리사가 했던 기적을 행하실거야,
엘리사가 자신의 종에게 이 보리빵 20덩이를 100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을 때 말씀에 순종해서 나누어줬더니 백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그 기적을 예수님께서도 하실거야 라는 마음으로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작은 믿음의 사람의 순종과 드림으로 인하여 기적은 오천명에게 확산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드린 작은 오병이어가 오천명을 살립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푸른 잔디는 마치 푸른 초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편 23편의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목자 없는 양같은 무리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참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평안하고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35절에서 제자들이 말할 때는 “이곳은 빈 들이요”라고 하며 부정적인 상황을 열거하지만 예수님은 푸른 잔디라는 예쁜 표현을 사용하셔서 무리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내십니다. 길 잃은 양, 목자 없는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어주셔서 양들을 먹이십니다.
백명씩 오십 명씩 앉아서 먹게 하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드린 오병이어를 두 손에 높이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십니다.
이 모습을 상상하면 예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은 자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셔서 먹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먹이십니다. 풍성하게 먹이십니다. 이 장면은 사실 잔치입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라고 하찮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양식은 이들에게 큰 양식이고 풍성한 순간입니다. 가난하고 먹을 것 없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잔치와 같은 순간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 장소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어도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배고파하고 삶에 지친 오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이 양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순간은 흥분하게 만드는 순간이고 모두가 웃고 떠들며 춤추며 밥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상황은 또 다시 앞 부분의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로 들어가서 비교해봐야 하는데요.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의 잔치가 있는 푸른 잔디보다 더 화려한 곳, 왕궁에서는 헤롯의 생일 파티가 있습니다. 두 상황이 비교가 됩니다. 푸른 잔디에서는 2,000만원이 없어서 오천명을 못 먹이는 상황이었지만 헤롯의 잔치에서는 2,000만원 하루만에 다 썼겠죠?
귀인들을 다 부르고 했으니 국가 예산을 하루만에 더 탕진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나라도 잃고 먹을 것도 없는데 한 국가의 왕은 백성들의 세금으로 자신의 생일파티와 자신의 배만 불리는 일을 합니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 왕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롯이 자신의 동생을 죽여서 빼앗은 헤로디아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이 춤을 추니까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헤롯이 소원을 묻습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딸아 무엇을 원하느냐? 그러자 그 소녀의 어머니인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합니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세례요한의 머리를 베어서 병사가 소녀에게 가져다줍니다. 그 소녀는 소반에, 자그마한 밥상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올려놓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드립니다.
두 왕의 이야기가 비교가 됩니다. 헤롯 왕은 자신의 생일 잔치를 하고요. 그곳에서 소녀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드립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푸른 잔디에서 오천명을 먹이시고요, 한 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의 드림으로 그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풍성함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대조되는 두 상황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요? 헤로디아의 딸처럼 자신의 힘을 얻고 자신의 힘에 거슬리는 자를 죽여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하나요? 아니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내 작은 것 하나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작은 내어드림으로 풍성하게 이루어집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힘을 키우는 방식으로 이루는 세상 나라는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방식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믿음의 행동, 내 가진 것을 드리는 것으로 풍성해지고 확장됩니다. 역설적인 신비입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은 그냥 배불리 먹은 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먹이시는 것도 맞지만 그것보다 더 우리의 영과 육을 먹이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심으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그 풍성함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요, 기대해야 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작은 믿음을 통해, 내 작은 내어드림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와 함께 그 일을 시작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그 나라를 이루고 싶어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 하나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작은 것을 할 때 하나님은 나머지 99%도 아닌 100%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있습니다. 43절에 보니까 양식이 남았습니다.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처음에 사진에서 봤듯이 굉장히 커다란 바구니입니다. 이 양도 어마어마한 양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숫자는 대부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숫자의 의미를 너무 과하게 해석하면 문제가 되고 이단이 되겠지만 여기서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것은 괜히 남기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딱 맞게 주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남기셨다는 것은 또 먹일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2하면 우리는 12제자를 기본적으로 떠올립니다. 지금 이 푸른 풀밭에서 누린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12제자들이 하나씩 가져다가 너희가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남으면 버려야 하는데요. 이 당시에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12제자들에게 한 바구니씩 주셔서 6장 7절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셔서 보내셨듯이 그리고 오늘 본문 30절에 자신들이 행한 것을 보고했듯이 또 다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열두 바구니를 남기셨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씩 드셨으니 이제 드셨으면 못 빠져나갑니다.
여러분이 가진 천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시고 세상 가운데서 그 풍성함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요. 내가 가진 작은 것을 내어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작은 것을 내어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합심기도
이시간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 주님을 위해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하게 하옵소서. 주님은 그 믿음을 가질, 그 작은 드림이 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내가 그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작은 순종을 하기를 원합니다. 작은 실천을 하기 원합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누리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축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제하게 하심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는 주님의 사람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