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서 떠나라

요한계시록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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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벨론에서 떠나라
본문: 요한계시록 18:1-8
[서론]
최근에 부산에서 예고 학생 3명이 높은 건물에서 함께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3명의 여학생이 동시에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다큐를 보며 이 문제가 단순히 삶을 비관한 아이들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감정적이나 우발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와 학원 업체가 얽힌 카르텔, 즉 구조적인 압박과 불의가 그들을 극한으로 내몬 것입니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질서에 따르지 않으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그 질서에 어느 누구도 대항하지 못해 계속해서 이 질서가 유지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피해볼까봐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결국 이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자살이 사실은 타살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친구는 대기업 건설사에 입사했다가 내부의 장부 조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업계의 관례로 여겨지던 터라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1년 넘게 고민하다가 결국 그 회사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거대한 구조적인 악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이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서 그 부패한 시스템은 무너져야하는 질서에 불과합니다.
분명 이런 구조적인 악에 대항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기준으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줍니다.
[첫번째 본론]
오늘 말씀의 핵심구절은 2절입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다”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무너졌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충격과 절망 그리고 확실한 종말을 선언하는 외침입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특히 이 소식을 들은 요한의 반응은 어떨까요?
분명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에는 여전히 로마 제국이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주셔서 겉으로는 건재해 보이지만 실상은 곧 무너질 실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로마제국을 상징합니다.
로마제국이 어떤 곳입니까?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제국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건축이면 건축, 교통이면 교통, 법이면 법, 상업이면 상업 모든 분야에서 꽃피운 제국입니다.
또한 로마의 평화라고 불리는 “팍스 로마나”라는 단어를 들어본적 있으실 거에요.
강력한 군사력으로 대부분의 나라들을 점령하여 오랜 세월 로마는 평화를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이런 크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로마제국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요한은 목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과 실체는 완전 다릅니다.
크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로마의 실체는 귀신들의 거처였습니다.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었고, 더럽고 가증한 새들의 집이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 음행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체제였습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진짜 얼굴입니다.
겉모습에 속지 않고 그 실체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 저항하고 어린 양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제국입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세상같아 보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너무나 편리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이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악과 고통이 가득합니다.
요즘 뉴스만 봐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많은 전쟁들, 기후재앙들, 범죄들, 극심한 빈부격차 등등..
그것은 단지 남의 일만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우리도 그 대상이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무너뜨리십니다.
요한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반드시 무너질 환상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 환상은 ‘공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적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제국이라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요한과 같은 거룩한 상상력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세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상상력은 곧 믿음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상상이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게 하는 믿음의 첫걸음이 됩니다.
살다보면 세상의 악함과 무자비함에 눌릴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같은 숨막힘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나의 해방일지’에 나온 염미정처럼 말입니다.
그녀를 보면 항상 무표정인데 이게 그녀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거룩한 상상력입니다.
제가 최근에 인상적으로 본 영화가 있습니다.
뮤지컬영화인 ‘마틸다’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 부모가 자기 딸 마틸다를 엄청 학대합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마틸다를 이상한 아이 취급합니다.
매일마다 구박하고 학교도 안보내려고 하고 집에만 가둬두려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그 학교 교장이 폭군, 마귀할멈입니다.
교장이 마음대로 만든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처벌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틸다는 교장의 폭력에 저항합니다.
그 영화를 보면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틸다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입니다.
마귀할멈 교장을 완전히 묵사발을 만들어 공중으로 날려버립니다.
마틸다의 상상력이 곧 저항이 되고 현실이 되어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바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상대 앞에 나약한 힘일지라도 거룩한 상상력으로 이겨나갈수 있습니다.
거룩한 상상력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 본론]
그럼 바벨론이 무너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7절입니다.
“그 도시가 그렇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였으니, 그만큼 그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어라. 그 도시는 마음 속으로 “나는 여황의 자리에 앉아있고, 과부가 아니니 절대로 슬픔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한다.”
바벨론의 교만이 어떤 것인지 알수 있습니다.
첫째, 바벨론의 교만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존재입니다.
즉,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는 그 영광을 단지 비추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자기 스스로 자기 영광을 취하려 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세우는데 집중하고 자신의 성공과 안락, 쾌락, 성취를 스스로 이룬 것처럼 자만했습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과 같습니다.
인간들이 탑을 쌓아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땅에 흩어버리십니다.
그때부터 ‘바벨’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교만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 바벨론은 로마제국만을 지칭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제한채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쌓아올린 모든 세속적 문명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왕이 되려는 것이 바벨론식 삶의 방식입니다.
그럼 오늘날 바벨론은 어디에 있습니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AI, 유전자기술, 생명복제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일수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교만해져 악용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어디까지가 선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악한 것인지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바벨론의 실체입니다.
둘째, 바벨론의 교만은 사치입니다.
로마제국의 사치와 향락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진 민족들을 노예로 삼았고, 그들의 피와 땀 위에서 사치와 쾌락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단지 로마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그렇습니다.
화려한 도시와 넘치는 물질, 화려한 기술들 뒤에는 여전히 노동착취, 환경파괴, 빈부격차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넘쳐나는 소비와 과도한 경쟁, 끝없는 비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 뿌리에는 바벨론의 탐욕과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엊그제 대통령이 자주 안전사고를 일으키는 SPC회사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대통령이 한 말이 너무 가슴에 꽂혔습니다.
안전시설을 확충하는데 사용되는 비용과 안전사고로 인한 처벌 비용이 균형이 맞지 않아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회사가 자본주의 논리로 비용을 최소화하려니까 사고가 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자본주의 논리로 비용처럼 취급하는게 바벨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벨론을 심판하십니다.
때가 되면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바벨론 문명은 결국 뿌리째 뽑히게 됩니다.
바벨론은 스스로 여왕의 자리에 앉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교만한 바벨론을 심판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만에 빠지면 바벨론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셋째 본론]
그럼 이 바벨론 속 세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4절이 핵심구절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벨론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다른 구약성경에도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 도시는 죄악이 만연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멸망하게 됩니다.
그 전에 하나님은 롯에게 가족과 함께 그 도시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은 그 도시의 번영과 편안함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요구하시는 삶의 결단입니다.
돌아보지 말고 바벨론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산으로 도망쳐야 할까요?
당시 성도들 역시 거대한 제국인 로마를 떠나 살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실제로 로마를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삶의 방식에서 떠나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천로역정이 있습니다.
거기보면 크리스천이라는 주인공이 자신이 살던 멸망의 도시를 떠납니다.
그 화려한 도시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도 믿지 않아 크리스천은 혼자 그곳을 떠납니다.
우리 역시 멸망하고 말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죄악에 참여하지 말고, 그 가치관을 거부하고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구별된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과연 용이나 짐승, 어린 양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편안하고 편리한 삶에 취해있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상상과 상징으로 가득찬 판타지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많은 악과 고통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떤 성경보다도 가장 의미가 깊은 책일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눈을 떠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려진 실체를 볼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멸망을 앞둔 귀신의 소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무너질 바벨론에 취해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바벨론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바벨론을 떠나는 것은 두렵고 불편한 일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야만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회복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떠나야 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어느 누가 말려도 멸망의 성,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
내일 당장 내가 있는 곳에 무관심하고 덮어두었던 악에 저항해야 합니다.
최소한 악에 분노해야 합니다.
그 결심을 하는 저와 함께걷는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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