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3일 수요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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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전히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주님이시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들어가며 _ 지난 설교 요약하기
들어가며 _ 지난 설교 요약하기
욥은 빌닷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도 하나님이시고 그 영역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전통적인 인과응보 법칙만을 주장하는 친구들은 분명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면서도 어느 하나의 법칙에 하나님을 가두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분명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자신에게 오는 것이지만 분명 자신은 죄가 없으며 우리의 이해와 지식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까닭없는 고난 앞에 까닭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고난이 쉽거나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슈퍼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끝없이 절망하며 자신의 존재를 죽음 내몰지만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맞이해야하고 그 고난과 함께 살아내야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11장은 소발이 욥에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네가 혼자서 큰소리로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우리를 비웃는데도, 너를 책망할 사람이 없을 줄 아느냐?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이제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네게 말씀하시고,
지혜의 비밀을 네게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지혜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발은 욥의 많은 말과 태도에 굉장히 화가 난것 같습니다. 2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네가 말을 많이 한다고 네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많은 말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누구도 말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시작부터 소발은 욥에게 말이 너무 많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3-6절로 이어지는데요. 소발은 욥에게 굉장히 화가 나있습니다. 욥이 거만함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죠. 하나님께서 입을 여시면 “지혜의 비밀이 네게 드러날 텐데” 지금 네가 받고 있는 고난이 네가 지은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새번역은 “지혜의 비밀”이라고 번역을 했고 개역개정 성경은 “지혜의 오묘함”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타알루모트라는 히브리어인데요. “영원”으로 번역되는 “올람”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지혜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정해진 것이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절대로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7절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겠는가?”
8절 “하늘 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은데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겠는가?”
9절 “그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다.”
10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두르 다니시며 죄인들을 재판하고 잡아도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여기까지는 욥의 고백과 같습니다. 그런데 욥은 어떻게 끝을 맺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이시고 그 분의 지혜를 측량 할 수 없기에 지금 이해되지 않고 우리의 전통적 사고로 안되는 상황을 함브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발은 어떻게 결론은 맺습니까? 소발은 하나님을 측량 할 수 없는 분이며 그 분의 지혜를 다 알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이야기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행동 대해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네가 받고 있는 고난이 너의 죄 보다는 가벼운 것을 알아라.” 11절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을 상관하지 않으신 것 같지만 다 보고 계신다.”
결국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규범적지혜의 가둬버립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욥의 고난은 죄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자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소발의 신앙에서 절대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어떻습니까? 계속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실제로는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소발도 욥도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해석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될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이 안다고 또는 지식의 양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곧 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무속신앙의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때보다 무속인 인구들이 많고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점집을 찾아가거나 타로점을 보거나 영적인 관심을 가진자들이 많아 지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이 어떤 시대입니까? 지식의 양 뿐 아니라 양질의 정보를 몇번의 타자로 얻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무속인들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이해가 되지 않죠? 저는 오늘 6절과 7절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 이라 표현이 현 상황이 연결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경험이 많아도요.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 지혜의 오묘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 뿐 아니라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셔야만이 우리가 그 지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측면에서 현대 사람들은 그 지혜의 오묘함을 알고자 하고 보고 싶어하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많은 젊은 세대들이 무당을 찾아가겠습니까? 자신의 지혜로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일 수 있겠고요.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 일 수도 있고요. 미래 대한 일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인간이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고 우리 그렇게 신뢰하는 과학도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을 설명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은 후에도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가 온전히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여주셔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하나의 지식만 있으면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의 대화에서는 이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욥과 욥의 친구들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2장까지 다루고 마무리할 때 이 부분은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더 말을 많이 해버리는 욥
더 말을 많이 해버리는 욥
소발이 자신에게 말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자 이제 저항이라도 하듯 욥은 아주 길게 답을 합니다.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이 12~14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은 12장까지만 보고 마무리를 할 예정입니다.
소발은 욥이 하나님의 앞에서 거만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집니다. 2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자들인가?”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함께 사라지겠구나?” 너무 아는 척을 하니까 소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다.
욥도 철저하게 그들이 말하는 신앙법칙으로 누구보다 열심으로 살았던 자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라며 복을 누리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친구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저주 받은 상태로 여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문제는 5절입니다.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다 이해되지 않거나 받아들어지지 않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가장 힘든 것은 아니 실제로 상처가 되는 것은 고통 가운데 있지 않는 자가 고난 가운데 있는 자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럴때는 어떠한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옳고 그름 판단하고 죄때문이라고 회개하라고 하고 그러한 말과 행동들이 고난 가운데 있는 자를 낭떨어지리로 미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친구들의 모습이 아주 못되 보이죠?
그런데 죄인된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실패나 고난을 개념화 시키기 좋아하고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고 이유를 알고 싶어하며 자신의 경험을 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 샘솟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입니다. 소히 “안다고 하는 사람.” “경험이 있다고 하는 사람.” 특히, 권위나 높은 자리에 있으면 더 심합니다. 자신의 미천한 경험이 마치 진리이며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다른 것이 폭력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다른 사람을 가두는 것이 엄청난 폭력이 됩니다.
그러나 욥은 6절 그 친구들이 말한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벗어나는 일을 예로 들면서 말합니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강도는 제집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도 평안히 산다.” 규범적 지혜에 의하면 강도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은 엄청난 고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나 형통하고 평안한지 하나님 마져도 자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외적인 일이 분명히 이 세상 속에서는 일어난다고 말하면서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욥에게는 맞지 않으며 오히려 폭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외라는 것은 기준되는 어떠한 가치나 일들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에서도 늘 예외가 생기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예외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께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절대적 주권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쉽게 인지 할 수 있는 자연현상과도 같다는 것이죠. 11절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귀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혀가 음식 맛을 알지 못하겠느냐? 당연히 귀는 말을 듣는 신체이고 혀는 맛을 보는 신체 기관이기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이상 친구들이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주님이시다_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여전히 하나님이 주님이시다_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그리고 12절부터 25절까지가 12장에 마지막 부분인데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서 쭈욱 이야기합니다.
12,13절 이 세상의 모든 지혜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 앞에 지혜를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4절 하나님이 헐어 버리시면 세울자가 없고 그분이 사람을 가두시면 풀어 줄자가 없다.
15절 물길을 막으시면 땅이 마르고, 물길을 터놓으시면 땅을 송두리째 삼킬 것이다. 가뭄과 홍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16절 이 세상의 모든 능력과 지혜는 원래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다 그 분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17절 고관들과 재판관들 /18절 왕들 19절 제사장들 20절 당당한 사람들, 분별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21절 귀족/ 힘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소위 복 받은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복 받아서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해서 얼마든지 수치를 당하고 무장해제되며 어리석은 자들이 되게 할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한 나라와 민족을 강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며 번성하여 성장도 하게 하십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바보로 만들어서 방황도 하게 만들며 한 가닥 빛도 없는 어둠 가운데 있게 만들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여전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상태이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님되시며 이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이며 근원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정답을 찾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바른 태도가 아닐까?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든 고난이 단순히 _ 재수가 없다거나 나의 업보라거나 어떠한 잘못에서 찾아오는 것이라 그냥 지독히도 원망하고 욕해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들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그것 자체가 우선 고난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_ 뿌리는 대로 거두는 법칙_예외의 상황들(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 또는 이유가 없는 고난_증명해야 하거나 더 연단되고 훈련되어야하는 고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되는 고난과 고통 앞에 욥처럼 고백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거두어 가신 것도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_ 나를 자유롭게 하는 그 은혜를 구합니다.”
유일한 지식_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유일한 지식_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욥은 이 고백에서 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오묘한 지혜를 계시하여 주시지 않는다면 어떤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모든 원인과 시작을 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키는 곳만 따라가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모세가 무엇인가 완벽하게 준비되서 가지 않았습니다. 가라고 하시니 그대로 간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 나에게 닥쳐온 순간들이 어쩌면 죽을때까지 또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다른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지식이면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우리를 신으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영생으로 이르게 하는 유일한 지식이며 은사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 전까지 친구들을 향해 호소하고 하나님을 향해 호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도 여전히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나의 지식, 유일한 길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