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자비롭고,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박해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2025 여름 MT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3 viewsNotes
Transcript
2025 여름 MT
2025 여름 MT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 읽은 본문의 둘째 복은 무엇인가?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 “애통하는 자”는 ‘슬퍼하는 자’이다. 어떤 상황에서 슬퍼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복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사야 61장 1절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한 이사야는 또한 2절에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슬퍼하는 사람은 시온 때문에 우는 자들이다. 시온이 황폐화되고 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온 성을 보면서 슬퍼한다. 하나님이 이들을 위로할 것이다. 시온 성은 다시 회복되어지며 기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셨더라도 지금 마태가 전하고 있는 본문에는 어떤 상황에서 슬퍼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슬픔은 여러 상황 가운데서 나온다. 국가적인 재난, 자연적인 재난, 경제적인 손실, 질병의 고통, 불의와 부정을 보고 슬퍼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슬퍼하며 운다. 어떤 상황에서 슬퍼하며 우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 팔복은 천국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첫째 복과 여덟 째 복이 약속이 “천국”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애통하는 자”는 천국과 관련해서 슬퍼하는 자이다.
이 땅에서 천국이 임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복음의 소식을 들어도 마음이 강퍅하여 순종하지 않는다. 심지어 복음전파를 방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을 슬퍼할 수 있다. 복음에 불순종하며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보며 탄식하며 슬퍼하는 사람이다. 천국과 복음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는 미래형이다. 장차 임할 하나님의 보상이며 위로이다. 이 땅에서 천국 복음 때문에 슬퍼하며 우는 사람들은 미래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미래형이라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 땅에서의 삶과 미래의 삶에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복은 온유한 자가 받는다.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기질이다. 온화하고 친절한 성격이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잘 드러난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잘 내지 않고 악의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무례히 행동하지도 않는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성취될 때 즉,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은 각기 기업의 땅을 받았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을 차지한다는 말씀은 시편을 배경으로 한다. 시편 기자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악인은 땅에서 금방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는데,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시편 37: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언한다. 온유는 특별히 예수님의 성품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하고 소개하셨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은 에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미래형이다. 온유한 자는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을 말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닮아 온유하게 사는 사람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넷째 복은 의를 갈구하는 자가 받는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배가 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사모한다. 음식을 간절하게 원한다. 이와 같이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땅은 불의, 부정 그리고 죄악이 가득 차 있다. 이런 환경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 여기서 의는 일반 사회에서 추구하는 정의와 공의와는 다르다. 팔복 자체는 제자들에게 주어졌고 천국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이다. 이 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의는 세리와 창녀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보다 먼저 가졌다. 이 의는 예수님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후에 바울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천국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배부름을 받을 것이다. 이 보상 역시 미래형이다. 이 땅에는 불의, 부정, 거짓, 속임과 죄악이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와 정의가 가득 차 있다. 의가 넘치는 사회인 것이다.
다섯째 복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비로운 자’ 또는 ‘인정 많은 자’이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신다. 예레미야 3:12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배교한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한다. 하나님은 노를 계속 품지 않는 자비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미래형이다.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 마지막 심판에서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것이다.
여섯 째 복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받는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음이 깨끗한 자’ 또는 ‘마음이 정결한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야곱이 벧엘의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러 나아갈 때에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 35:2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여기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깨끗하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임하신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도 유사하게 나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는 이렇다. 출애굽기 19:10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옷을 빨게 하고” “성결하게 하며”는 ‘거룩하게 하며’이다. 그리고 “옷을 빨게”한다. 옷을 빠는 행위는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깨끗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정결 행위들을 더 발전시킨다. 시편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마음이 청결하며”는 ‘마음이 깨끗함’을 의미한다. 확실히 하나님은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래형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22:3–4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하나님을 보는 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인간은 육식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디모데전서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보고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본 사람들이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본다.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을 보았다.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을 본다. 에스겔은 다른 사람에 비해 하나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본 것이다. 이렇게 구약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실 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기 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때가 있을 것이다.
일곱째 복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받는다. 화평 즉 평화는 구약의 샬롬에 해당된다. 샬롬은 군사적인 침략, 질병, 그리고 자연 재해의 위험과 위협이 없는 안녕의 상태이다.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화평은 이러한 배경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더 구체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 좋은 관계를 세우는 자이다. 즉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화평은 사람들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이 세상은 미움과 질투 그리고 투쟁과 경쟁으로 얼룩진 사회이다. 이러한 곳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는다. 그들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백성이다. 이 약속이 이집트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이 숫자가 많아졌다.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 후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후손으로 인종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평화를 만드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화평을 세우며 이루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새로운 부자관계를 형성한다. 하나님이 아버지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착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다. 착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버지를 닮아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한 사람들이나 악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온전해지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화평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화평을 이루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에도 화평을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평화를 세운 자이다.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님을 본받아 따라가며 평화를 세우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 여덟째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이 받는다. 이 복은 넷째 복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넷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 여기서 “의”는 여덟째 복의 “의”와 같은 단어이다. 따라서 여덟째 복의 “의”와 같은 단어이다. 따라서 여덟째 복은 넷째 복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박해는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경제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 비방을 당하고 욕을 먹고 굶주리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 이들이 받는 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이다. 이것은 어떤 복과 같은가? 첫째 복과 같다. 그런데 다음 구절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어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마태복음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여기서 “나로 말미암아”는 ‘나를 위하여’ 또는 ‘나 때문에’로 10절의 “의를 위하여”의 전치사 “위하여”와 같은 단어이다. 즉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는 “나를 위하여” 받는 박해와 같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에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을 기뻐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 슬퍼하지 말고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하늘에서 상을 받는다. 하늘나라에 참여한다. 특별히 예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선지자와 같은 반열에 서 있다.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위의 사실을 잘 생각해 보면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첫째 복과 여덟 째 복에서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여덟째 복은 천국을 어떻게 들어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의를 위하여” 즉 “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들어간다. 넷째 복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팔복은 천국 복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