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_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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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견디기
예배 견디기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장 23절-24절
요즘은 이 예배가 인내를 요구하는 종교적 의무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견디는 것 같습니다.
예배를 견디는 방법도 가지가지인데, 그중에 극치는 설교 견디기입니다.
그 행태도 천태만상입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생각파, 주보에 밑줄 긋고 틀린 글자를 찾는 교정파, 헌금낸 사람 세고 액수를 나눠보는 계산파, 졸면서 예배드리는 수면파, 수시로 시계 들여다보는 시간 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 파, 예배 후 있을 회의 준비에 여념이 없는 회의 파, 성경 읽기로 시간 때우는 경건파 등 이런 식의 태도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배를 견디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졸음과 냉담함, 기대감 없음, 딴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조바심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들여지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닙니다. 성령이 예배를 장악하시고 진리가 살아 역사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고뇌하는 이 예배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예배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자는 거룩한 열정으로 뜨거워져야 하고, 세상 욕심에 흔들리던 마음은 죽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 곧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 속에서 일어납니다.
영과 진리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은 자기 조상 적부터 들여온 예배의 장소에 대해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예배할 장소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이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이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가 드리는 이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예배는 드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소에 집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은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배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방식을 말합니다.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찾으셨고,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도 찾으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들도 주님이 만나주시려는 사람들이었고, 죄인들도 돌이키도록 찾으셔야 할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에게 새로운 때가 올 것입니다.
바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런 예배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가득 찰 때 그는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때, 그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지만 사주의 은총을 간구하는 마음은 예배로 가장 잘 표현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공적 예배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모든 경건 생활을 포함합니다. 그런 예배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구원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예배자가 됩니다.
특별히 모두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 예배는 이런 지체들의 갈망하는 마음이 들려지는 이 예배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십니까? 예배가 냉담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고 위의 것들을 갈망합니까?
이 예배는 간절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간절히 당신을 찾는 자들을 찾으시고 만나주십니다.
예배의 원형 제사 예배란 무엇일까요? 이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배 의식입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높여드리는 일입니다.
신약 예배의 뿌리는 구약의 제사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 예배의 원형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바라보는 예배의 일시적인 형태였습니다.
이제 구원의 약속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속죄는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가 가진 많은 신학적인 예표들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그것과 동일할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둘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배의 그림자입니다.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짐승을 데리고 성막을 향해 나아갑니다.
거기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할 때 헌제자의 죄가 짐승에게로 옮겨갑니다.
그 죄 때문에 짐승은 죽임을 당합니다. 피 흘리며 죽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망문 앞 재단 사방에 뿌립니다.
그곳에서 헌 제자들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짐승을 선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물로 바친다는 것은 당시 이방인들의 제사 개념이었습니다.
고대 중군동 지방 이방인들의 제사가 바로 뇌물에 가까운 개념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신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신들은 막강한 권세를 가진 존재들로 서로 시샘하고 제사 음식에 대하여 걸근대며 도덕성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제사의 목적은 이스라엘과 사뭇 달랐습니다.
신들의 기분을 달래고 신들의 분노로 인한 화를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실함과 자비하심을 즐겨 노래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저급한 이방신들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재물은 뇌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자신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사와 헌재자의 도덕성의 일치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제사 드리는 종교 행위와 공의와 자비를 추구하는 일상의 삶을 일치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때 제사는 형식적으로 들여졌습니다. 제사의 정신이 그들의 삶을 장악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드려지는 재사는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들여지는 죽은 제사의 심각함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피를 토하듯이 경고했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니 나는 순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예배를 드리지만 삶은 공의와 거리가 멉니다. 자비를 행하며 살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 받았지만 죄에 쉽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너진 경건 생활, 한복판에는 감격을 잃은 예배 생활이 있습니다.
예배와 생활이 분리되는 것은 위선적 종교 생활입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 예배가 있습니다.
완전한 삶을 살다 온 사람들만 성령 안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롭게 살다 온 신자들에게만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죄 가운데 공고한 영혼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세리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제사의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일종의 실현식 교육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헌제자들은 자기 때문에 죽어가는 짐승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모두 동일한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것은 죄의 심각성이었습니다.
죄가 짐승의 죽음을 불러오고 또한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드릴 때 오직 한 가지를 바랐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자비, 곧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였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재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혼제자의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자신을 대신해 죽는 짐승을 보면서 말입니다.
이런 제사를 통해 깨달은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헌제자는 자신이 진노 아래에 있는 존재임을 인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만나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때 헌 제자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예배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가운데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는 죄를 자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만나 주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은혜를 베푸시고 자유를 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들려져야 하는 예배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그런 시대가 열렸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이렇게는 예배의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전체를 지배해야 하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예배의 본질적 요소와 정신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예배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와 죄 때문입니다.
이 무한한 질적 차이와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아는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믿음을 통해서만 영적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들려져야 함을 말해줍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예배자들은 성령에 의해 영향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때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첫 범죄 이후 인간은 신령한 일에 대한 영적 감각을 상실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영향이 아니면 그의 관심과 사랑은 세속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마음의 경향성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배 가운데 임하신 성령은 이러하십니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 심판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불신하는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십니다.
능담한 사람의 마음에 거룩한 불을 지피십니다.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예배자의 마음에 가마를 주셔서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로써 이 예배자는 다른 예배를 드리게 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모두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진리를 경험케 하는 성령 신학생 시절 전철 안에서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비 걸듯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당신 하나님을 보았어 만약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미 전한 내용들은 설득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저는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럼요 나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양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양심이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종합병원을 찾아가 보십시오. 내과와 외과를 비롯한 수많은 분과들이 있으나 그 어디에도 양심과는 없습니다.
양심은 해부학적으로 장기처럼 몸속 어디에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있다는 사실은 심장이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배를 많이 드려도 믿음이 생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이 예배는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이 생생하게 믿어지게 합니다. 모두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전에 믿을 수 없던 진리를 믿게 합니다.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는 내용들을 믿게 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생생한 정동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 진리를 자기의 삶에 적용하게 합니다.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이 이 일을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 설교자는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선포하는 말씀에 붙들려야 합니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무엇을 통해 설교자의 마음이 말씀에 불붙게 됩니까?
어떻게 선지자의 거룩한 정서를 갖게 됩니까? 그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되는 것일까요?
그의 설교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불신앙으로 냉담한 이들의 마음을 십자가의 피로 젖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좌절과 패배로 얼룩진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비범한 말이 비범한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비범한 말에 깃들어 있는 성령의 능력이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이 설교자를 붙잡아 주실 때입니다.
성령이 설교자와 함께 하신다면 평범한 설교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찌를 것입니다.
하늘 은혜로 기름 부어진 한마디 말, 그것은 그렇지 않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막한 예배당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대감 없이 모였던 수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모두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랄 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배에 대한 기대조차 할 수 없을 만치 침체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일 예배는 드려야 하기에 교회당에 들어섭니다.
피아노 반주가 나오고 성도들이 함께 찬송을 부릅니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주 나시기 전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 중 귀하신 이름 예수 늘 보고 읽고 따라 부르던 찬송가가 아닙니까?
더욱이 은혜에 대한 갈망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올 때는 예배드리고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가사가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께 가슴에 밀려옵니다.
태어나시기도 전에 지어진 이름 예수, 그분이 나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소망을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고난 당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격하게 됩니다.
그냥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공고했던 가슴에 멍울이 풀어집니다.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느껴집니다. 설교를 듣고 죄를 뉘우칩니다.
행복하기보다 거룩해지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예배가 끝나고 모두들 흩어져 돌아갔지만 홀로 남아서 눈물로 의자를 적십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위로와 은혜를 경험합니다.
무엇이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까? 고가의 파이프, 오르간, 목회자의 고고한 복식이나 예배당의 실내 장식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사람의 영혼을 만져주시고 지나가심으로써입니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실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매주 극의 그것 같던 설교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매주 감흥 없이 부르던 찬송에 은혜를 받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경험합니다.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세속적인 욕망과 탐심을 털어내게 하십니다. 거룩한 하늘 은혜로 충만해지게 하십니다.
지난날의 상처로 억눌렸던 영혼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이 예배에는 마치 국경일에 거행되는 기념 행사와 같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죽음의 침묵이 무겁게 깃들인 교회당을 뒤흔들어 생명의 함성으로 가득 차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일으키셔서 함성을 지르는 군대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에 온 마음으로 응답하는 예배자, 살아계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과 기도, 그리고 자유함을 얻은 심령으로 드리는 찬양 이 모두 살아있는 예배의 요소입니다.
그 모든 요소들을 그렇게 만들어주는 원천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이유 그러면 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지 못할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잘못을 진리를 잘못 가르치거나 그러한 진리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잘못된 방식으로 들려지고 있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영혼의 무감각을 가져옵니다. 영적인 무감각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를 통해 신령한 것을 기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위해서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진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결해지기를 사모하며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혈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예배 시간을 통해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가 하나님께 가증하게 여겨지던 시대가 있습니다.
그때 그들이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제사하기를 그만두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사의 규례를 존중했고 절기를 따라 재물을 바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사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육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정신을 따라 살지 아니한 사람들이 예배를 양심의 은신처 삼고자 하는 마음을 격멸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결하고 완전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동반되지 않은 예배는 거절됩니다.
잘못된 삶에 대한 뉘우침과 회개 없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모욕입니다.
이런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성령이 슬퍼하시는 예배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이 형식이 득세할 뿐입니다. 우리는 회개 없이 드리는 예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탈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교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손수건이 필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갑니다. 우리에게는 회개해야 할 것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나 예배 가운데 진실한 참여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거룩한 정서, 어떤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선교사는 자신을 후원하는 교회에 주일 오후 예배 설교자로 초청되었습니다.
열심히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 깔고 있었습니다.
썰렁한 분위기는 긴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설교자는 자신과 교인들 사이에서 마땅히 오고 가야 할 어떠한 영적 교감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설교자는 채 끝나지도 않은 설교 원고를 주섬주섬 주워 모으며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통로를 걸어 내려 나가면서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부교역자가 바로 등 뒤에서 들었습니다.
내가 차라리 망부석들을 세워 놓고 설교하는 게 낫지.
어느 날 지방 집회를 마치고 비행기편으로 귀경하던 때에 이릅니다.
비행기가 도착할 시간이면 국내선 도착 출구는 마중 나온 사람들과 도착한 사람들로 붐빕니다.
그날도 도착 출구는 많은 사람들로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한 여인이 제 앞을 걸어서 출구를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부인 한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끌어 안고 흐느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이며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무척이나 서로를 그리워하던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감격에 빠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리움과 해후입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만나면 손을 흔들고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마치 단둘이 있는 것처럼 반가워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예배를 통해 인격적으로 다가오실 때 어떻게 차가운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거룩한 감화가 있습니다.
변화받는 영혼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이 예배는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예민한 영적 감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게 합니다.
그분의 임재를 자극하는 가운데 예배가 드려지게 합니다.
신령한 체험은 은혜로운 정서를 동반합니다. 따라서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들려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은혜로운 정서가 깃듭니다.
거룩한 열정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예배의 목표가 예배자들의 정서에 자극을 주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예배에 이런 식의 목표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있어서 과도한 악기 사용이나 열광적인 찬양, 예배실의 지나친 실내 장식은 권장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 영국 이민자들의 예배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예배 시간에 어떤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찬송을 불렀습니다. 말씀에 집중하며 깨닫기를 원하며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정에서는 악기를 사용하며 즐겨 찬송하고 노래 부르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서는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물론 당시 그들의 견해에는 지나친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국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올바른 예배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요인으로서 예배자들의 정세를 불러일으키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말씀의 은혜 받기를 원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신령한 가마를 받음으로써 은혜로운 정서가 가득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다른 임의적인 정서의 자극은 유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 앞에서 후회, 탄원, 열정, 두려움, 근심, 신비, 경외, 사랑, 아픔, 절망, 신뢰, 소망, 고난, 위로와 같은 정서를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케 하는 성령 성령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이 예배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니 예배가 오직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합니다. 비천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은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회개하는 자들의 예배에 오셔서 용서해 주시는 은혜는 무엇을 통해 발견됩니까?
선한 것이 없는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성령 강림, 그리고 재림은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입니다.
예배 속에서 십자가 죽음과 성령의 은혜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깊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깨닫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따라서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한 십자가의 구원을 기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부흥 시대의 교회를 돌이켜 보십시오. 예배 중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한 시대의 각성을 알리는 첫 회심도 항상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에 감격하던 사람들이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은혜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용납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도 예배하러 나올 때마다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살았으나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예배를 받아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오직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찬양과 감사입니다.
그 구원 사건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배를 올바른 방식으로 드린다면 거기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구원 사건에 대한 회고와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삶의 중심이 되며, 우리의 삶 자체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이 복음적 사실을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을 향한 입을 다물 수 없는 감격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살아있는 예배에는 침묵 이상 그 무엇이 있습니다.
침묵을 능가하는 영적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설교자, 설교자와 교인, 교인과 예배의 관계를 장악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은 설교자와 교인들을 교통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 그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그런 설교를 듣는 것은 예배자에게도 힘겨운 것입니다.
그런 예배에는 설교자와 교인 사이에 오고 가는 교감이 없습니다.
일치하는 정서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자는 흔히 교도, 냉랭한 교인들은 좋을 수 있습니다.
교인들은 상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예배에 나아와도 어리석은 설교자는 코미디 같은 설교로 교인을 웃기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 모두 가운데 역사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심판을 설교하는 설교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듣는 교인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설교자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에 녹을 때 그의 입에서는 마치 기름을 바른 것처럼 사랑에 관한 말씀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누가 설교자를 그렇게 만듭니까? 오직 성령이십니다.
냉담하게 설교하는 것은 단지 말하는 것입니다. 입에서 나온 설교는 잘해야 머리에까지 도달할 뿐입니다.
설교자는 전하는 말씀의 내용에 먼저 성령의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느끼지도 못하는 내용을 설교해야 하고, 교인들은 깨닫지도 못하는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경험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은혜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이 찢기시고 피 흘리신 고난을 설교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때 성령이 설교자를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그는 오래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만을 나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설득이 꽤 논리적이라면 교인들은 지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령이 역사해 보십시오. 예배자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서 재현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들이 십자가 아래서 죄를 회개할 때 그것은 단지 십자가 사건을 회고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말씀의 지평 위에 새롭게 반복되는 십자가 사건을 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아파하며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이 일을 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을 통해 받는 또 다른 교훈은 예배에서 맛보는 자유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예배에는 정해진 순서와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배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극단의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예배에서 일체의 규모화된 형식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형식은 성령과의 직접적인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위험한 확신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 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에게 발표할 기회를 주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방언을 말하며 그것을 통역하는 순서를 도입하기도 했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 계시를 받는 정도가 경건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두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정반대로 치우친 극단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이고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라기보다는 예배 자체를 위한 예배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예배 형식에 대해 배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저는 빈야드 운동이 한창인 캐나다 토론토의 에어포트 교회의 집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부흥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매일 약 2천여 명의 교인들이 운집하였습니다.
티셔츠 차림을 한 목사가 사회를 보며 찬양도 인도했습니다.
축하 순서를 진행하기도 하고 참석자들 중에서 간증도 하게 했습니다.
이런저런 간증이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대규모의 뮤직 밴드도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어떤 신비한 체험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어다니며 짐승 소리를 내고 어떤 사람들은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도 회개의 눈물도 없었습니다.
이런 형식 없는 집회는 예배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집회 형태가 필요한 것 한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만 은혜로우면 그것이 예배라는 견해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전통을 무시하고 인사, 축하, 찬양, 드라마 등으로 구성된 전도 집회를 과연 예배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전도 집회는 전도 집회이고 예배는 예배입니다. 두 가지 모두 은혜가 필요하고 또 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모임의 목표는 같지 않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형식을 파괴한다고 해서 자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유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것을 속박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핍이지 형식 그 자체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과 역사를 참고하며 나름대로 예배의 형태를 갖춰 왔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있었던 예배 형태 중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공동된 요소가 있었고, 또 순서가 있었습니다.
복된 교회 시대에 넘쳤던 예배의 은혜는 말랐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메마른 예배가 전통적인 형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진단입니다. 예배를 그토록 메마르게 한 주범은 형식 자체가 아니라 성령의 결핍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개척 교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주일 낮 예배의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미리 설교할 법문이 지는 공지되지는 않았지만 설교문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데 처음 본 사람들 여럿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전도한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준비된 설교를 접어두고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일정한 규모를 따라 들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순서대로 사용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커다란 가마를 주실 수 있습니다. 자 가정해 봅시다.
설교를 30분 안에 마치기로 예정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설교자를 붙잡았습니다.
설교자는 진리의 말씀을 폭포수같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교인들도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있습니다. 예정된 설교 시간을 다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 설교자는 시계를 보며 맞춰야 할까요 아니면 더 설교해야 할까요?
예배 시간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규모를 지키면서 예배드리지만 그 안에서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여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규모가 있으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뼈은말 성령이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으면 깨달음은 없습니다.
영혼의 변화도 없습니다. 진정한 참회와 사적 사죄의 확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습은 경건해도 결국은 형식을 숭상하는 바리새인들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예배의 형식을 벌이는 자유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서는 거룩한 가마를 받을 수 없습니다.
험악한 세상과 싸우며 살아갈 믿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승리하는 삶을 확신하며 교회당을 나설 수 없습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인 엿새 동안의 삶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실패한 삶 때문에 드리는 좁은 의미의 예배가 더욱 답답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예배다운 예배를 통해 만들어진 교인은 특별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세워집니다. 예배의 감격이 있다면 그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고 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침묵으로 드리는 무감각한 예배는 우리에게 진정한 부흥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가 성령 안에서 불꽃처럼 들려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스터디 교재
제2장 예배 견디기
1. 설교를 들을 때 여러분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2. 예배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과, 예배의 의식과 형식에 관심이 많아지는 것은 예배에 대한 어떠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까?(53-54)
3.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를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요 4:3). 그 두 가지 요소는 무엇이며 헬라어 성경은 그것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54-55)
4.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참된 예배블 드릴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55-56)
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 4:23) (56-57)
6.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말씀하시는 "이렇게"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58)
7. "신령과...."(요4:24)라는 말씀에 준해 다음을 살펴보십시오.
1) 성령의 가장 우선적인 사역은 무엇입니까?(65)
2) 구약 시대의 계시는 당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던 제사 개념과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오늘날 번지고 있는 예배의 '뇌물 개념' 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59-61)
3)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결정적인 중거는 무엇입니까?(64)
4) 예배와 삶이 가져야 할 당연한 관계는 어떤 것이며, 이것에 비추어 보아신앙 생활과 세상살이가 분리되는 것은 무엇의 결과입니까?(64-65)
5)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65-68)
6) 성령이 함꼐 하실 때 예배 시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68-69)
7) 아무런 정서의 고양(고양) 없이 예배드리는 것을 단지 예배자의 '스타일' 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까? 아울러 에배 속에서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하려는 시도, 느끼게 하려는 시도가 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82-83)
8) 정서가 새로위지기 위한 에배' 와 '예배를 통해 새롭게 된 신앙적 정서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82-83)
9)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 모든 근원을 어디에서 찾았습니까?(84-85)
10) 많은 사람들은 예배에서 느낌 수 있는 자유합이 예배의 형식을 파괴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타당성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어 보십시오.(88-89)
11) 교회가 설교할 본문을 미리 정해서 알려주는 것에 대해 저자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89-91)
12) 예배드리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 본문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91-92)
13) 예배 시간에 성령께서는 설교자와 성도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92-94)
8. 성령 안에서 드리는 좁은 의미의 예배는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62-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