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드린 기도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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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히스기야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켰습니다.
그의 업적 중에 대단한 것은 남북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초대해서 남북 왕국이 함께 감격스러운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역사가 저물어 갈 때 다윗에 버금갈 정도로 신실한 영혼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히스기야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이방 신상과 우상들을 제거하고 산당을 헐었으며, 아세라 목상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임금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마지막 신앙의 엔진을 돌린 사람입니다.
그의 종교 개혁 때문에 사실은 중간사 시대에까지 이스라엘의 희망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놋뱀에 신학적인 것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 물어봐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렇게 일평생 진실하게 하나님께 충성해 온 히스기야에게 청천병력 같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죽음의 통지였습니다.
열왕기하 20:1 NKRV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II. 죽음 앞에서 드린 기도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무슨 병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처가 있었다는 성경의 보도로 미루어 볼 때 종기나 악성 종양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왕하20:7).
아무튼 문맥으로 볼 때 히스기야의 병세는 절망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처음에는 왕실의 유능한 의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었으나 히스기야는 이제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치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은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에 대한 죽음의 통지, 그의 간절한 기도,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의 과정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기도에 관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A. 눈물이 있는 기도

첫째로 눈물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는 통보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히스기야의 죽음이 이미 확정되었고, 그러한 사실은 조금도 변경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있고, 그럴 여지가 없는 것도 있습니다.
전자는 대개 조건의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내가 무엇, 무엇 하면 여호와께서 무엇 무엇 하시리라.”
그리고 후자는 일체의 변경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6:21 NKRV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자신의 죽음에 관한 통보를 받자마자 히스기야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홀로 벽을 마주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일생일대에 있어서 가장 가난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면벽을 하고 앉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나에게 닥친 이 커다란 위기를 헤쳐나감에 있어서 세상과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겠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단한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히스기야는 다윗과 비견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왕국 시대 때 그는 오랜 영적 경험을 통해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차이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운명이라는 영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destiny와 fate.
fate는 변경 불가능한 운명입니다. destiny는 바꿀 수 있는 문명입니다.
그가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앗수르 군대 장관으로부터 모욕적인 외교 문서를 받았을 때 잘 나타났습니다.
그때 그는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치욕스러운 외교 서신을 하나님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마치 “하나님이여 직접 보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결국 기적적인 응답을 받았습니다.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이스라엘과의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전멸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히스기야는 즉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면벽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그의 면벽을 한 기도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의 표현입니다.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는 기도이며, 구차하게 사람을 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기도가 아름다운 현악기의 곡조라면 기도자의 마음은 그 노래의 울림통입니다.
기도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신령으로부터 우러나는 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면벽을 하게 되었을 때 히스기야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의존하는 인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통치받고 면벽을 한 채로 무릎 꿇고 앉았을 때, 히스기야는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도 아니었고, 일평생 백성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던 위대한 영적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이때 그는 단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선고받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하나님께 매달리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탁월한 업적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제사장과 관련된 일입니다.
제사장은 비번과 당번이 있습니다.
당번은 소수입니다. 대부분이 비번입니다. 예전에는 그 사람들이 그냥 놀았습니다.
그냥 성경 연구하면서. 근데 어떻게 했냐면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사경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백성들을 말씀으로 인도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은 다윗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구체적이고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었던 히스기야가 하나님이 뜻하셔서 내리신 죽음의 선고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느냐고 반문하지 맙시다.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히스기야의 이 기도가 실수였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하셔서 그러셨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죽었어야지 뭘 살아나려고 그러냐?”
또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은 것에 대한 불필요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얻은 결과물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
곧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군기고를 보여주는 교만 때문에 징계를 받고 마지막으로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다가 죽은 일밖에 더 있느냐고 다그치지도 맙시다.
결국, 아니 생명을 연장 받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동이 아니었느냐는 비난을 퍼붓지도 맙시다.
그러면 히스기야가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은 것과 그가 교만해져서 인생의 마지막을 신앙으로 끝내지 못한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생명을 연장해 주신 것은 히스기야가 드린 눈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선물로 주어진 15년을 신앙으로 살지 못한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히스기야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신앙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이 훌륭했을 때는 그 지혜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때에는 오히려 받은 바 그 지혜로서 이스라엘을 타락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히스기야가 인생의 절망적인 위기 앞에서 마음을 다해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선고받았을 때 자신은 이 세상에서 더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온 과거의 삶을 언급하면서 자신을 살려달라고까지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은 감사와 감격, 회개와 슬픔, 복은 통함과 후회를 동반합니다.
성경에서 눈물이 그렇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할 때 큰 슬픔 속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가난한 마음으로 눈물을 쏟았을 것입니다.
기도의 간절함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 한 분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이때 기도자는 절대적으로 가난한 마음이 됩니다.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레이싱카를 운전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포뮬러 경기에서 달리는 경주용 자동차의 순간 최고 속도는 시속 390km입니다.
빠른 트랙에서는 평균 250km, 대부분의 트럭에서는 200에서 230km, 느린 트랙에서는 150에서 170km를 달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속 360km 이상에서는 인지하고 반응할 수 있는 유효 시야가 극도로 좁아집니다.
이것을 “터널 비전 효과” 라고 부릅니다.
이런 최고 속도에서 운전자가 전방을 볼 수 있는 각도는 불과 45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죠. 어둡고 긴 터널을 이런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 멀리 손톱처럼 밝은 빛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F1 더 무비 영화에서 주인공 소니 헤이스의 대사; “가끔 차 안에 있을 때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무도 날 따라잡을 수 없는 순간이 있어. 그 순간, 나는 날아오르는 것 같아”)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만큼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오직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이 나의 시야를 가득 채우게 됩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간절함은 기도의 깊이를 더할 뿐 아니라 시간의 길이를 더하여 줍니다.
눈물은 자신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기도의 목표에 대한 간절함과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인식이 주는 감정의 부산물입니다.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더러운 마음을 씻어내는 세례와 같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의미이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고백의 표입니다.
무언가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이것은 자기 사랑이 깨어지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시편 강해(En arratinones Psalmos) 38편 강해 여덟 번째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도는 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정동(움직임)입니다.
마음의 정동은 마음이 움직이는 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정동들이 뜨거울 때 그것은 눈물로 변합니다.
그래서 미누스 에스트 오라티오 아르티 퀼라티오 베르보름이에요.
cubam affectio cordis; et cum fervida est, in lacrimas el vertitur affectio mius estoratio ati 아펙시오 미누스에스토라치오 아티필라티오 베르고 꽝, 미누스 꽝 이렇게 후방이 서로 이렇게 레더 앤 그런 뜻이에요.
영어에서 그래서 에스트 오라티오 est oritio(기도는) 베르보름 ver vorum(단어들의) 아르티큘라티오 artiqulatio(조합이라기보다는) 미누스 minus(오히려) 쿠밤 아펙쉐어 꼬르디스 cubam affectio cordis(마음의 정도입니다).
상세히 말하자면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꿈 페르디바 페르 페르디다 에스트
꿈(시간) 마음의 정동이 꿈 페르디바 에스티 뜨거울 때 뜨거울 때, 그다음에 아펙시 사랑의 정동이 뜨거울 때, 그 사랑의 정동은 베르티뚜르 변합니다.
일 라크리마스 눈물로 변합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의 영역은 간절함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이 결합되어 영적으로 힘 있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가 많은 눈물을 쏟으며 기도한 적이 언제였는가?
우는 이의 심정, 가난한 마음으로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기도의 자리를 눈물로 적신 적이 언제였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도해야 할 인생의 문제가 없어서 그런 기도를 드리지 못했던 것일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육체의 게으름과 정신의 나태함 때문이었습니다.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을 찾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사람의 기도는 공허함으로 마비되어 허공을 맴돌다 떨어질 뿐입니다.
기도의 풍부함은 삶의 방식 “호르마 비벤디 가로바코”에서 나온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그의 기도의 실체는 삶과 일치되어 더욱 간절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마치 천상을 향해 쏘아 올린 기도의 화살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1층 천을 지나 마귀와 귀신들이 지배하는 2층천을 뚫고 하나님이 계신 3층천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기도하면서 슬피 우는 사람은 기도가 끝나면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저 눈물은 애통의 눈물이고, 이 눈물은 환희의 눈물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목회하던 교회를 방문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안내하는 사람에게 한 목사가 물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의 성공적인 선교 사역과 목회 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안내자가 말했습니다.
신발을 벗으십시오.
그리고 강대상 의자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엎드리십시오.
이제 됐습니다. 이제 웨슬레 목사님이 했던 것처럼 통곡을 하십시오.
그것이 웨슬레 목사의 성공적인 사역의 비결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흐느끼며 웁시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합시다.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기도 생활이 아니었던가?
성경은 말합니다.
히브리서 5:7 NKRV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분을 닮고 그분에게 속한 자가 되어 그분이 사셨던 것처럼 따라해 보려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리신 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자리로 나아갑시다.
열왕기하 20:5 NKRV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해 주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본받아 눈물의 기도를 드리자.

B. 응답이 있는 기도

둘째로 응답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죽음의 통보를 전달한 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시간의 길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사 38:10-20).
열왕기하 20:4 NKRV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다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어졌습니다.
히스기야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는 짧은 시간에 하나님께 감동을 드렸으며, 하나님은 즉각적인 응답으로 화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잠깐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짧고 간단한 기도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런 기도의 능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 이는 아주 짧은 기도로써 순간적으로 큰 능력이 나타난 기도의 예들을 수없이 많이 보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병든 자를 고치시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의 기도나 병들고 귀신 들린 자를 고친 사도들의 기도는 짧은 기도의 큰 능력이 깊은 예들입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할 때 우리도 짧은 기도를 드려보지만 대체로 그와 같은 극적인 응답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 때문일까요?
성경에서의 짧은 기도로서 커다란 능력을 하늘로부터 불러내리는 믿음의 영웅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곧 그들은 모두 그런 기도의 응답을 받기 전에 한결같이 오랜 시간을 기도에 바치며 살아온 인물들이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의 경우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가나안 원주민들과 전쟁할 때 나타났습니다.
전투에서 승기는 여호수아에게 있었고, 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가난한 족속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해가 기울어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면 전투는 가나안 땅의 지리에 밝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지는 해와 뜨고 있는 달에게 명령하였으니 이는 변형된 기도였습니다.
여호수아 10:12 NKRV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이 기도는 즉시 응답되었고, 여호수아는 길어진 낮 시간에 그들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전 그의 깊은 기도 생활은 다음과 같이 암시됩니다.
출애굽기 33:7 NKRV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여기에 나오는 회막은 진 바깥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는데, 그것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분께 기도하도록 설치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11 NKRV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금방 변경될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것도 선지자까지 동원하여 히스기야의 죽음을 확정된 것처럼 통고하셨을까?”
우리는 이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사건을 통하여 히스기야의 영혼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쇄신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목숨을 건 기도의 실체는 한 평생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살아온 히스기야로 하여금 영혼과 마음이 다시 한 번 정결하게 되고 삶의 동기가 순수해지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대하여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담백하게 진술했습니다.
시편 138:3 NKRV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인의 경험을 보세요.
그는 안타까운 기도 제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난 당한 그의 영혼에는 기도 응답보다도 더 소중한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간절히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힘을 주셔서 영혼을 강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성자 가운데 “썬다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주님을 영접하고 헌신적인 전도자가 되었는데, 어느 추운 겨울에 이 썬다씽이 사람들과 함께 눈 덮인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가고 있었는데 거기에 산길을 가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는 아주 바짝 마른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사람들은 자기 한몸 가누기 어려운 날씨에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썬다싱은 그 마른 노인을 업고 그리고 열심히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쉬면서 다시 또 업고 가고 쉬면서 업고 가고 하면서 산길을 걸었는데 어마어마한 추위였습니다.
가다 보니까 앞에 간 사람들이 다 지쳐서 쓰러져서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근데 썬다싱은 뜨거운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습니다.
적합한 예화가 되죠. 그래서 나중에 이것도 다루면 좋은데, 시편 138편 3절을 보면은 단어가 아주 특별해요.
138편 3절에 보면은
“베욤 카라티 바타아미니” 내가 부르짖는 그날에 당신이 나에게 응답하셨고
“타르히베니 베나프시 오즈” 그래서 내 영혼 속으로 힘을 주셔서 강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강인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경험은 소중한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기도 제목이 없을 정도로 태평하게 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세속적 행복을 위한 기도 제목이 아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에서 비롯되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꽃은 응답입니다.

기도 응답의 경험이 반복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특별한 연합의 유대감이 생기고 커다란 문제가 생겨도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의 고민거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고민거리는 당신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되고 있는가?
당신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시간 중 단 10분의 1만이라도 마음을 쏟는 기도를 드렸더라면 당신의 인생은 현재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기도답게 드려진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잘 들으세요. 응답 받는 있는 기도의 두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은 열렬함(fervency)과 지속성(continuance) 입니다.

기도가 뜨겁지 않은 것은 기도해도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간절해도 응답이 없는 것은 그 기도의 실천이 지속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기도에 힘쓰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자.

C. 구원이 있는 기도

셋째로 구원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큰 적국 앗수르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0:6 NKRV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적국이었습니다.
특히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앗수르의 정책과 이에 맞서려는 이스라엘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는 강력한 정권에서도 그들의 침략이 그치지 않았으니 다른 시대는 어떠하였겠는가.
히스기야는 단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도록 눈물로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로부터의 구원까지 덤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얼마나 선함과 인자하심이 풍성한 분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다 기도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꼭 필요한 것들을 응답으로 주십니다.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임박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질병으로 고생하던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을 뿐 아니라, 평생의 근심거리였던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구원까지 약속해 주셨으니 그때 그는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는 뛸 듯이 기뻤을 것이며, 남은 인생을 오직 하나님께만 모두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님만 찬송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제 1차 대각성과 부흥의 지도자였던 청교도 신학자 조마당 에드워즈(1703-1758)를 생각해 보라.
그는 1731년 뉴저지 뉴어크에서 열렸던 노회 공식 석상에서 발표한 논문,
인간의 의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God glorified in man’s dependens)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장소는 세상이 아니라 신자의 마음 속에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을 동반한 경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트레맨스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돼. 티모를 애트 트라헨스, 트라헨스 아모레 아드 대음 대문자 대음 트레멘스 티모르 에트 트라헨스, 아모렌 아드데 음
하나님은 가장 연약한 신자의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 NKRV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비록 우리의 기도가 가녀린 신음소리 같을지라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라.
인생의 벼랑 끝에서 드리는 당신의 연약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굳게 믿으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위대한 구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인생은 마치 안개 속을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객관적으로 불확실한 것을 하나님 때문에 견뎌내는 것입니다.
비록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때에도 믿음은 불안해하는 자신을 하나님 때문에 희망으로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득에 있어 가장 큰 능력이 나타나는 수단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간절한 기도입니다.
더욱이 마음을 쏟아놓으며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애절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가난한 심령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을 뿌려놓으신 핏길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
간절히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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