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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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에서 경험으로

기도는 참 단순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님! 오늘 하루도 인도하심 안에 있게 해주세요’처럼 말이다. 대부분 이런 기도조차 하지 못한다. 어제의 고통 때문일수도, 오늘 해야 할 일에 깊이 몰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는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려고 하기 때문일수 있다.(미2:1)
91편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라고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사는 우리의 존재를 그늘 아래 머무는 자라고 선포한다. 어릴 때는 부모의 그늘 아래 살고 나이가 들면 자녀의 그늘 아래 살았던 평범함은 어느덧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려줄 그늘조차 없는 상황에 노였다. 우리 사회가 특히 오롯이 감당하는 차별이 심한 구조가 되면서 자살율은 여전히 세계 1등이라는 지표에도 묻어 있다.
피난처가 있다면, 요새가 있다면, 의뢰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하는(2) 기도자의 고백은 스스로의 다짐을 다시 드러낸다. ‘오늘 하루도 인도하심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로 고백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도자는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계속해서 고백한다.(3-4) 특히 ‘너는 밤에 찾아드는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화법은 마치 낙망한 자신에게 자신이 ‘너는 왜 낙망하고 있느냐 하나님을 바라라’는 (42:5) 자신에 대한 믿음의 질책이다. 왜냐하면 밤낮으로 찾아오는 두려움이나 무서움의 지배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기도자는 ‘올무’, ‘전염병’, ‘밤에 찾아오는 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 닥쳐오는 재앙’이라고 실제 속에서 몸부림친다. 7절에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진다’는 표현은 기도자가 ‘전염병’ 속에 있을 가능성을 담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방향없이 덮쳐 올 때 대부분 공포와 무서움에 사로 잡힌다. 우리 역시 코로나 펜데믹을 겪어 보았고 그때에는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죽음의 무서움을 경험했다.
서두에서 아침의 기도가 입술에서 자연스럽듯 전염병과 같은 공포 속에서 10절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응답을 얼마나 바라고 기대하는가? 본 시편에는 그런 응답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14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는 간절했던 기도자의 상황 가운데 화를 피하는 절대적인 피난과 요새는 기도자에게 응답이 된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라라’로 시작되는 응답 구절은 우리가 오랫동안 살펴온 시편 기도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그를 전져주고 그를 영화롭게’하시는 ‘우리를 위함’이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다.
자녀의 고통을 거절하는 부모가 있겠는가?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라는 주님의 기도는 하루의 삶을 아버지 하나님께 의탁하는 간절함이 있다. 혹시 기억한다면 앞서 몇 편의 시편은 ‘하나님의 부재’를 기도자가 고통스러워 했던 내용이었다.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숨기십니까?’라는 절규는 기도자를 은밀한 곳에서 만나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고백하게 한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동행을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재를 경험하는 혼재의 삶이 실제다. ‘이러이러 했는데 하나님은 왜?’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이러저러한가?’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신실함은 따라 가는 행동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혼날 때도 세상 불만 표정을 하고도 따라가는 아이를 생각해 보라. 반면 성장하면서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친구를 가장 높이는 이유도 그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은밀함속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각자가 고백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기 보다는 오히려 ‘나 혼자’라는 자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주변이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다거나, 내가 이 정도니 하나님도 그 정도다 라고 말한다. 마음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바라는 간절함은 있지만 신실함을 따라 가는 아이조차도 안 되는 현실에 갇힌다.
지난 주 모세는 그런 상황을 역전 시켰다.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의 그늘 아래 있을 때 15절 ‘그가 나를 부를 때’를 놓치지 않는다. 떠나서는 안 된다. 멀어져서도 안 된다. 부를 때 들을 수 있는 거리는 자녀일 때만 감각적으로 안다. 성장하면서 멀어진 육신의 부모처럼 하나님과의 부재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녀의 만족은 하나님의 만족이시다. (16) 부재를 넘어서는 것은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알 때인 것처럼 하나님의 응답은 자녀임을 깨닫게 하는 열쇠이다. 그렇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신실함을 따라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손을 내밀고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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