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32) 자기 정당화에 빠진 교회
Notes
Transcript
바리새인들의 말
바리새인들의 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 역사적 맥락: 로마의 압제와 유대 지도층의 두려움
1. 역사적 맥락: 로마의 압제와 유대 지도층의 두려움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습니다. 산헤드린(유대 공회)은 제한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는 군사적, 정치적 결정권을 쥐고 있었죠.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 특별히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사건은 민중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민중의 왕으로 추대되거나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대중적 열기는 폭동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고, 이는 로마가 강경하게 진압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습니다.
즉,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다”는 말은,
로마의 보복과 점령 강화, 자치권 박탈, 성전 파괴까지도 내포한 위기의식이었습니다.
2. 의도된 정치적 조작: 예수를 제거할 명분 만들기
2. 의도된 정치적 조작: 예수를 제거할 명분 만들기
이 발언은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예수를 제거해야 할 정치적 명분을 정당화하는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분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기들의 지위, 권력, 안정된 종교 구조가 무너질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향력을 과장해 국가적 위기로 몰아가는 언술 전략을 구사한 것입니다.
3. 영적 아이러니: 자신들이 두려워한 일이 그들 때문에 이루어짐
3. 영적 아이러니: 자신들이 두려워한 일이 그들 때문에 이루어짐
요한복음 저자는 이 발언에 깊은 반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면 로마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40여 년 후인 주후 70년,
로마는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성전을 파괴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일은 예수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불신앙과 죄악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말
대제사장의 말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 가야바의 배경과 권위
1. 가야바의 배경과 권위
가야바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기원후 18년부터 36년까지 장기간 재직했으며, 안나스의 사위였기에 실권을 이어받았고, 로마와 협력하는 정치적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대제사장은 단지 종교적 권위자가 아니라 유대 자치 정부의 최고 통치자로 간주되었고,
로마와의 균형 외교와 정치적 유지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습니다.
2. 발언의 정치적 의도: '희생양'의 논리
2. 발언의 정치적 의도: '희생양'의 논리
가야바의 말은 **“예수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민족 전체를 살리는 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희생양 이론을 정당화하는 발언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제거하면 로마의 주목을 피할 수 있고, 폭동도 막을 수 있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 전체 체제를 보존하는 것이 지혜롭고 실용적이다.
그는 진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고, 정치적 유익과 체제 유지를 최고선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을 완성하러 오신 메시아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시키려는 불경스런 결단이었습니다.
3. 신학적 반전: 무의식적 예언
3. 신학적 반전: 무의식적 예언
요한복음 저자는 이 발언에 곧이어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함이러라” (요 11:51-52)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논리가 충돌하는 장면을 봅니다.
가야바의 의도는 정치적 살해 정당화
하나님의 섭리는 온 인류를 위한 대속적 죽음의 예고
가야바는 정치적 계산을 입으로 말했지만,
그 입술을 통해 하나님은 속죄의 신비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바람난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축복을 말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민수기 22-24장).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정의란 무엇인가’의 트롤리 딜레마가 생각나는 대목
기차가 달리는 철로에 5명의 사람이 있다. 철로의 경로를 변경하면 한명이 죽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철로를 변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을 밀어서 기차를 멈추면 5명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머뭇거린다.
그리고 다시 기차가 철로를 달리는 상황에서 반대 철로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다고 답변한다.
가야바의 이런 행동이 바로 ‘자기 정당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정당화’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이 정도 죄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을 미는 죄는 큰 죄라서 절대 지어서는 안되지만 레버를 당기는 것은 이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 합리화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다른 종교는 언급하지 않고, 교회를 놓고 이야기 해볼 때에
전통과 제도의 보호를 위해 진리를 죽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말씀과 위배되지 않는데 핍박합니다)
민중의 신앙을 억압합니다. (우리 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반한 헌법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혐오 하거나 바보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윤리를 포기한 정치적 판단. (교회가 도덕보다 자기이익을 따르는 현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적인 일을 위해서 교회의 재정과 인력과 제도를 사용하는 것과 정치, 경제계 사람들과 불의한 관계를 맺는 것)
종교적 언어로 폭력을 정당화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타이틀로 전쟁과 억압과 폭력을 자행하고 불의를 보고도 침묵함)
목사 중심의 해석 독점화 (기독교에서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한 이유는 성경 해석의 독점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성경 해석을 자기 중심적으로 독점하고 성도들이 자신을 잘 따르도록 한다.)
현대인들은 이런 교회의 민낯을 보았고, 현대 철학자들을 신랄하게 교회를 비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또한 없다. 하나님과 관계를 연결해 줄 유일한 통로이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의 이성과 감정에 잠재된 자기기만 능력을 인식하는 것이 진실을 억압하려는 모든 인간의 성향에 더해지면 자신의 생각과 동기에 대한 건강한 성경적 의심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말 옳은지, 내가 내세우는 동기가 정말 순수한지를 한 번쯤 의심해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성경적 자기성찰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그래서 질문 없는 믿음 > 성경적 의심 > 질문을 통과한 믿음이라고 설명했다.
첫번째는 제1의 순진함이고 이후에는 의심의 연단을 통과한 제2의 순진함이다. 우리는 제2의 순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제자들도 예수를 믿는 많은 유대인들도 ‘제1의 순진함’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 종교지도자의 ‘자기 정당화’에 속아 예수를 버리고 집단에 속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말을 의심하며 그것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질문하고, 그 질문을 통과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계속 만나며 묵상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그 역경을 모두 통과한 이후 ‘순전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