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장 20-35절 “친밀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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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공동체
말씀:막3:20-35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는 ‘친밀함’입니다. 왜냐하면 친밀함이 서로의 관계를 돈돈하게 만들어 주기 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친밀함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우리의 관계의 친밀성을 방해하는 요소는 ‘오해’입니다. 오해라 함은 나의 생각과 뜻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오해는 친밀한 관계를 깨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여러분은 혹시 오해로 인해서 관계가 깨지고, 서로 성처를 주고 받은 적은 없습니까? 
어떤 성도님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 성도님은 몇 년 전 암으로 큰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살아야겠다는 결단과 함께 철저하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웠습니다. 가장 먼저 식습관부터 바꾸었습니다. 고른 영양섭취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몸 컨디션 조절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건강해졌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암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의 경험담을 알려 주고 나누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험관리부터 시작해서 영양관리, 운동습관 등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알려 주고, 위로하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가까운 친척분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췌장암 4기에 폐까지 전이된 상태였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이 했던 건강관리뿐만 아니라 영양섭취를 알려주다가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영양제를 소개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팔러왔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에 찾아갔다가 장사꾼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프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해를 받게 되면, 서로의 마음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그런 친밀성까지 파괴되고, 관계가 단절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우리의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에도 오해를 받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도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오해를 받게 되었는지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무엇인가?
 <도입>
오늘 본문 말씀부터 시작해서 5장 43절까지 예수님의 제 2차 갈릴리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차 갈릴리 사역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고치셨는데,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잠시 뒤로 물러나셨다가 이제 다시 갈릴리에서 2차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전개>
이제 다시 예수님은 2차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여전히 적대자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앞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는 능력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가까운 친족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를 했습니다. 2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또한 한술 더떠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바알세블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22절)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사단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설명을 합니다. 23절에서 26절의 말씀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 갈라지면, 버틸 수 없고, 끝장이 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엄하게 경고합니다. 28절과 2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의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결코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는 인간들이 죄에 대한 회개를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결코 회개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마무리>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베푸신 것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합쳐 귀신의 조력자가 되었다고 비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이를 오해하거나 왜곡해서 공격하는 일은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가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물으십니다.
2. 본문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도입>
그렇다면, 마가가 이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과 능력을 보이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외인들 즉 영적 무지 속에 있었던 사람들을 고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개>
오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마가가 이 본문을 기록한 의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은 집에 들어가셨을 때,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우시기 전에 지난밤부터 산에서 날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부터 제자를 세우시는 사건이 기록된 후 본문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제자를 세우신 이후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제자들을 세우시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집으로 들어오셨는데, 그 집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단한 식사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붙들다는 말은 ‘체포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주목시키는 것은 이 단어가 헤롯이 세례 요한을 붙잡았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용례를 살펴볼 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것은 친절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거칠게, 어쩌면 포악하게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마치 죄인을 붙잡은 것처럼, 붙잡았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가족들마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는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면서 그들의 무지를 더욱 폭로하고 있습니다. 보통 비유는 어떤 진리를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적 장치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마가는 일반적인 비유와 달리 “외인들”에게는 숨기고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4:11-12, 34). 그 이유는 ‘천국에 들어오지 않는 자’, ‘예수를 적대하는 원수들’에게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가는 23a절을 기록하면서 “예수가 미쳤다,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자들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이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기 못하고, 예수의 가족들과 함께 천국에 대해서 “외인들”이며, 구원 밖에 있는 자들임을 암시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29절). 그리하여 4장 11절의 말씀을 미리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8절과 29절에 나오는 성령훼방에 관한 말씀은 27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느니라”는 말씀 뒤에 위치하지만, 마태복음에는 12장 30절 그리고 누가복음 11장 23절에 보면,“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라는 말씀 뒤에 나옵니다. 
원래 누가복음 12장 10절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독립적으로 기록되었는데 마가는 이 말씀을 예수 비난에 대한 말씀과 연결시키면서 예수의 적대자들에 관한 강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의 뜻을 모르고 방해하는 행위를 성령훼방 죄라고 강조합니다. 성령훼방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영적인 능력과 사역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되는 셈입니다. 
당시 분위기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봤던 사람들까지, 심지어 가족들까지 귀신이 들려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30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당시 사회에서는 미쳤다는 것은 곧 귀신들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둘러앉은 무리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4b-35)
여기서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라는 수사법적 표현을 통해 새로운 영적인 의미에서의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가족이란 혈연 중심의 가족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영적인 가족 공동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는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조직화된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연대의식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의 의미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마무리>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방해하는 것은 곧 성령훼방죄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바로 한 가족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분명한 정체성과 연대의식을 가진 공동체는 한 가족일뿐만 아니라 친밀한 공동체입니다. 
3. 본문을 통해 실천할 기독교 윤리적 규범은 무엇인가?
 <도입>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기독교 윤리적 규범은 무엇일까요? 친밀한 공동체입니다. 
 <전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곧 가족이라고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가족의 의미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한 가족으로 결속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뜻을 가지고, 그 뜻을 행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뜻을 준행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 뜻을 우리에게 전한 주님의 사랑으로 묶여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삼위일체 교리에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그 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고 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행하는 친밀한 가족 공동체를 하나로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그 힘은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친밀한 가족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은 복음에는 외인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약자이면서 낙오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친밀한 공동체원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표를 발견한 삶이라면 그 공동체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기쁜일 일뿐만 아니라 매우 자부심이 강해지는 일입니다. 예수의 일을 행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열어갈 수 있는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가문, 배경 그리고 지식이나 재물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가족 공동체는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 친밀한 가족 공동체 일원이 되기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외인입니까? 친밀한 가족공동체의 일원입니까?
 <마무리>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윤리적 규범은 친밀한 공동체입니다. 새로운 가족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모인 공동체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무엇보다도 외롭고 고독한 시대에 주님의 뜻을 함께 이루는 친밀한 공동체, 바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윤리적 규범입니다. 
4. 본문을 통해 제시된 윤리적 규범을 실천한 모범적인 사례는 무엇인가?
 <도입>
오늘날 우리에게는 가족같은 공동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모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개>
1964년 장 바니어에 의해 시작된 공동체인 라르쉬 공동체는 장애인들을 돕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하여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특성은 장애가 심한 발달장애인들과 삶을 나누려는 사람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장애인들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자신들 안에도 미움, 단절,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상처 등을 안고 살아가는 장애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부터 장애인을 돕는다는 자세를 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통해 순수성을 배우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사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라르쉬라는 단어는 ‘방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에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노아의 방주에 그의 가족과 모든 동물이 각각 들어가게 하셨던 것처럼, 라르쉬 공동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가정’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곳은 “가정”이라는 연합체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가족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일하고,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친밀한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 행동하기 앞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통 한 가정당 장애인 7명, 7명의 어시스턴스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의 원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장애인이건 정상인이건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하고 똑같은 권리를 가집니다.
-사람이 그의 능력과 재능, 한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을 고무시켜줄 환경이 필요합니다.
-장애인은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들의 약함과 순진함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그 사람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가족과 같은 생활은 라르쉬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한 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들은 한 가족의 일원으로 같이 살고 일하며 기도하고 같이 축하하고, 기쁨과 고통을 나누며 서로 용서합니다. 
이 공동체는 영성학자인 헨리 나우웬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하버드 대학 교수직에서 떠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함께 한 곳이 바로 캐나다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데이브레이크)였습니다. 나우웬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두란도, 1998)에서 ‘나이를 더 먹는다는 것이 예수님께 나를 더 가까이 가게 했는가? 모든 사람이 내게 아주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었지만, 나의 성공이 오히려 나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장 바니어(Jean Vanier)를 통해서 ‘심령이 가난한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네 영혼을 치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에서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전세계적으로 30여 개국에 100여 개 이상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라르쉬 공동체는 이렇게 사소하지만 위대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무리>
라르쉬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연약한 자를 위해서 사역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이어받아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주로서 가족과 같은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가족 공동체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하고 비난했던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친적들의 영적 무지함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당신의 사역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비난하는 일은 성령훼방죄에 해당한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어떤 죄도 사함을 받지만,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일은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오해는 이렇게 관계를 깨뜨리고, 친밀성을 깨뜨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영적 가족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그 끈끈한 힘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 위에 우리 공동체가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 가족같은 친밀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외롭고, 힘들고, 아프고 상처난 사람들을 보듬어 가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공동체가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함께 읽어볼 만한 책
<페어처지>, 기도영, 새물결플러스
<희망의 공동체>, 장바니에, 피현희 옮김, 두란노
<데이브레이크로 가는길>, 헨리 나우웨, 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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