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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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부른다.

관계의 재정립. 연대의 회복을 송축, 찬양의 초청, 하나님이 주신것. 예배하기 안전한 장소를 베풍주심
1-5 / 6-11/12-15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로 알려진 복음성가.
4. 나를 기쁘게 하셨다. 완료시제 주는 나를 기쁘게 하신다
4.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리고’ 내가 높이 외친
7 영원히 - 그 결과 그들은 멸망당할 것이다. -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황할지라도
1-3 서론으로 짧게 찬양. 4-15 찬양의 이유.
시편기자는 전반부 7절까지 신실한 자들이 드리는 여호와를 향한 찬양의 가치와 이유를 고백한다. 92편은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경배의 수단이다. 그런데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열 줄 현악, 거문고, 수금(3)도 중요하다. 의식을 통해 자신을 단정하게 하고 지금의 자리를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4절에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로 시작되는 말은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서 ‘나를 기쁘게 하셨다’(개역개정), ‘하신 일을 생각하면 기쁩니다’(새번역)
직역과 의역의 차이이다. 결국 하나님의 하신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백성/ 자녀) ‘주의 손의 행사’ 즉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기쁘게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고백한다. 그런 의미에서 4-5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향한 경배 안에서 위로를 바란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는 것과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큰가’(5)를 통해서 ‘생각이 심히 깊으심’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순종을 쉽게 경험하지 못한다. 그럴 때만이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는 선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니 6절에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는 시편기자의 표현은 정확한 것이다. 1-3절의 ‘의식’적인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참석했다는 기쁨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주의 행사’가 왜 나를 기쁘시게 한 일인가에 대한 깊은 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때 일어나는 작용이다.
지난 시편들에서 다윗은 계속해 하나님의 성전을 찾고 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편에 다시 ‘주야로 묵상한다’는 이유도 이것이다. 악인과 비교한 이유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지 않고 멀리 한 자들 그들은 7절에 ‘풀 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세상의 교훈은 시대를 따라 달라진다. 때론 사람을 물건 취급하고 생명을 마음대로 한다. 자식도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라고 바칠 때도 ‘옳고 그름’의 기준은 다르다. 우리 시대에도 진정한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왜 악인의 심판이 시편기자의 기쁨인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악인을 멸하시는 것이 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자 나의 기쁨이며 어찌 그리 크신가에 대한 답이 되는 것인가? 분명하게 9절에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먕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진다’ 같은 편이라 할 때 하나님의 원수는 나의 원수이고 나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시편은 의인과 악인을 분명하게 나눈다. 이원론적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자연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알려 주셨지만 그들은 진리에 맞서는 자들(롬1장) 즉 불의한 자이고 악인이라고 한 것이다.(시편1)
악인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 하나님의 옳으심을 부정(진리에 맞서)하기 때문에(악인의 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관계 안에서 우리를 대하신다. 언약이 없다면, 언약의 관계 안에서 우리를 대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관계를 파탄낸 자에 대한 법적인 책임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더 좋게 하기 위해 백성의 관계에서 자녀의 관계로 바꾸어 주신 것도 언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13절에 ‘여호와의 집에 심겼다’는 표현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나무’가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이라는 은유처럼 시편기자들의 소망인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종국적 표현이 ‘여호와의 집에 심겨’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당연함이. 13절에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황’, ‘늙어도 결실. 풍족, 청청’(14)이라는 말씀에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이를 15절에 ‘여호와의 정직하심’이라고 말한다. 권세를 가진 자, 능력을 가진 자는 자기 말을 바꿔 언제든 약자를, 대상을 위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단정해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도자가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과연 무엇으로 고백/판단 할 수 있는가? 이를 ‘낮추어서 맞추어 주신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약자는 쉽게 강자에게 기대지 않는다. 비록 보일 때는 그럴지라도 절대적 보호를 경험하는 것은 기분의 ‘정직함’이 경험되어질 때 ‘나의 바위, 그에게는 불의가 없다’는 절대 의존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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