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06 수요강론: 베드로전서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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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2:1-10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1–10 NKRV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더운 날씨 속에서 잘 지내고 계신지요. 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수요강론 자리로 잘 나아오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지난 시간부터 베드로전서 말씀을 통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말씀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시는데, 그리스도를 산 소망으로 두는 신자는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베드로가 교회들에게 편지를 작성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이 어떤 것인지 오늘도 함께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단어에서 나타나듯이 앞에 한 말이 원인이고 그에 따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자 시작합니다. 앞에서 베드로는 1장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는 1절에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얻었다면, 서로의 사랑을 없애 버리는 삶의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 이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장 22-25절에서 베드로는 형제끼리 사랑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은 모두 형제 사랑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들입니다. 기만과 외식은 거짓을 낳고 사랑에 필요한 신뢰를 잃게 만듭니다. 기만은 남을 속이는 행위이며, 외식도 자신은 원래 그렇지 않은데,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마냥 겉을 화려하게 포장하게 만들어 우쭐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시기는 사랑에 반대됩니다. 타인이 잘되는 것이 못마땅하거나 다른 사람의 몰락을 바라거나 다른 이들이 잘되는 것보다 자신이 잘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마음이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비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방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 이야기인 루머를 퍼뜨리는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베드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 외에 다른 것은 해도 된다가 아니라 형제 사랑을 끊어내는 모든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하기보다 형제 사랑을 끊어내는 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형제를 사랑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형제 사랑을 끊어내는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절인데요.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베드로는 형제 사랑을 끊어내는 것을 버릴 뿐만 아니라 갓난 아기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것을 권면합니다. 1장 3절과 23절에서 베드로는 교회가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존재임을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어받아 2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새 생명을 주심으로 낳으셨다는 것을 “갓난 아기”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수신자들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알았듯이 새롭게 기독교인이 된 회심자들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인이 된 신자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갓난 아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갓난 아기”와 같은 어떤 특징을 지녀야 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며, 신자들이 자기 삶을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을 뜻합니다. 갓난 아기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부모가 공급해주는 영양이 없이는 결코 살아남지 못합니다. 부모가 먹을 것을 먹여줘야 갓난 아기는 살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로 베드로도 “갓난 아기”라는 것을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 태어난 “갓난 아기”인 신자들은 갓난 아기와 같이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생명 유지가 필요한 무력한 아기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순전하며 신령한 젖일까요? 순전하다는 것은 1절의 “기만”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기만의 젖은 병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순전한 젖은 깨끗하며 건강하게 만듭니다. 기만은 남을 속이는 행위이지만, 순전은 남을 속이는 불순물이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1절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신령한’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보면 어떤 신비적이나 환상적인 것을 직관적으로 떠올리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베드로의 언어 유희가 있습니다. 원어인 헬라어로 보면 ‘신령한’이라는 단어와 ‘말씀’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유사합니다. 또한 ‘신령한’이라는 헬라어 단어의 일반적인 뜻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신령한 젖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한다는 것은 형제 사랑을 끊어내는 1절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갓난 아기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부여받습니다.
또한 이것은 22절에서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형제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해지고, 다른 말로 순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젖을 사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젖을 사모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음을 베드로는 동시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2절 하반절을 보시면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젖을 먹는 아기는 무럭 무럭 자라 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는 갓난 아기인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 완성될 구원을 향하여 젖을 먹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구원은 미래에 완성될 구원이 지금 현재에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향하여,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장의 과정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점점 더 성숙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주신다는 증거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른이 된 것은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공급해주신 증거가 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으로 성장한 것에 대한 증거로 베드로는 1장과 2장 1절을 통해 특별히 형제 사랑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갓난 아기와 같은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았고, 그 새 생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형제 사랑을 끊어내는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며, 성장한 결과물은 형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베드로는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서로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단순히 “너희가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1-2절도 그것을 나타내지만, 3절도 그렇습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바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1-2절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참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거나 체험했다면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갈망은 주님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체험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젖이 얼마나 맛있고 달콤한지를 맛본 자는 젖을 먹는 것을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 태어난 신자들이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았다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젖을 먹으며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 사랑이라는 것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교회가 어떤 식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4-10절의 내용입니다. 자세하게 이야기해줌으로 이들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통해 위로를 전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 특별히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북돋아주기 위함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3절에서의 “주님”은 4절에서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특징으로 사람에게 버림받으신 분이라고 말하며 그것도 그냥 버림받으신 분이 아니라 4-6절에서 버림받은 “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118편을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편 118:22 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편 118:22 NKRV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베드로는 이 118편을 인용하면서 건축자들이 버린 모퉁잇돌이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높아지심을 이 118편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하였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멸시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 모퉁잇돌로 세우셨음을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말하진 않고, 사람들의 일반적인 거부를 뜻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거부당하신 것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분이심을 베드로는 이어서 말합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거절한 것은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신원하심과 높이심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수님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시며, 이것은 인간의 거절과 대조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높아지심을 뜻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낮아지고 비천하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그분은 높아지고 보배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단순한 모퉁잇돌이 아니라 “산 돌”, 즉 살아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은 버린 돌이나,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산 돌이십니다.
그런데 산 돌이 되신 예수님은 교회인 우리도 산 돌이 되게 하셨음을 베드로는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산 돌이신 예수님은 신자들도 산 돌로 만들어주시고 신령한 집으로 세우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집이라는 것은 아까 신령한 젖은 말씀이라고 했다면,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성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신자들은 새 성전의 지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회적으로 이미 완성된 성전이 아닌 계속해서 세워져가는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세워진다”라는 단어는 원어에서 단회적 사건이 아닌 계속해서 세워지는 진행 중에 있음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성전 또는 하나님의 집으로 말하고 있지만, 베드로전서에서만이 유일하게 신자들을 향하여 “산 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베드로는 신자들이 새 성전의 건축물이 되어 모든 신자들이 새 성전이라는 의미보다는 신자 자체가 산 돌인, 즉 영적인 집인 그들이 세워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집이 세워지는 것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기리 위한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전과 제사장은 아주 제한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구별되었고, 성전도 물리적인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성전과 제사장은 예수님으로 완성되었고, 예수님과 같이 산 돌이 된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성전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게서 성령을 통해 거하시는 처소이며 그분의 제사장입니다. 비물질적인 집이라는 의미가 아닌,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로서의 성전이 바로 신약의 성도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모인 곳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 자녀들은 이제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모든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분이 무가치해지고, 공동체가 무가치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이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신자들이 받은 은혜가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인해 신자들이 산 돌이 되었다는 것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다시 한번 구약을 인용하면서 구약에서부터 예비되어 온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고, 신약의 성도들이 그 유익을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6절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베드로가 인용한 이 구절은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번 주에 보고 있는 이사야 말씀이기도 한데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사야 28장의 문맥은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면 심판받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고 30-3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외국의 동맹이나 군사력을 신뢰한다면 그들과 함께 심판받을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에서 등장하는 “돌”은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이 세운 피난처와 도피처”와 대조를 이룹니다. 남유다 통치자들이 세운 피난처와 도피처는 외국을 의지하는 것, 더 정확하게는 애굽을 의지하여 앗수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수치와 부끄러움만을 당하게 되는 길입니다. 이에 반해 시온에 두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모퉁잇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닿아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서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이 돌의 일차적인 의미는 다윗의 자손인 왕,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헌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이사야 말씀을 가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모퉁잇돌이 바로 예수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실 모퉁잇돌은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을 지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건축물입니다. 모퉁잇돌이 사라지면 건물은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일 순 있어도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특별히 모퉁잇돌이 되신 이 예수님 위에 세워진 신령한 집인 신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를 경험할 것을 베드로는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함”을 베드로는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셨고, 보배롭게, 다른 말로 존귀하게, 명예롭게 되셨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이 명예롭게 되셨다는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난 중에 살아가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인 성도들, 신자들에게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이며 계속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말씀입니다.
저번 주에 제가 말했듯이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 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매우 부당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부활을 통해 신원해주셨듯이 신자들이 이 땅 가운데서 부당한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신원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것은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참된 신자들은 심판의 부끄러움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영광, 명예롭게 되는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는 것은 신자들이 명예로울 것이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심지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과 죽음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며 명예롭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신자와 불신자 간의 어떠한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를 이야기함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7-8절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7-8절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예수님이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신자에게 예수님은 보배이지만, 불신자에게 예수님은 반대로 마지막 날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주실 존재입니다. 7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8편을 다시 인용하면서 버림받은 돌은 다윗 자손의 왕이었고 여호와께서 세상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는 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자기들의 멸망을 확신하는 증거가 됨을 여기서도 말하면서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받을 증거가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이외의 제3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고 신자는 명예롭게 되지만, 불신자는 부끄러움과 수치당하게 되는 길 밖에 없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신원하고 영광스럽게 하셨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8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믿지 않고 순종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걸려 넘어집니다. 그들이 버린 돌이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돌이 됩니다. 걸려 넘어지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불순종하고 걸려 넘어지게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으심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파는 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러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파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불신자들은 신자들에 비하여 잘 살고 고난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을 향해 왜 그렇게 사냐며 혀를 차거나 “너만 왜 그렇게 특이하냐”면서 그들을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지막 날에 그들이 버린 돌에 의하여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신원하여 주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신자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수치를 당하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불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처하게 되는 모습에 비하여 베드로는 9-10절에서 신자들은 아주 존귀한 자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신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며 자기들의 구원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구약 백성들에게 하신 이 약속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넘어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베드로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10절에서 원래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전에는 긍흉을 받지 못하였으나 긍휼을 얻게 된 아주 존귀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성도들이 누리게 된 유익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신자들은 고난 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원해주실 것이며 고난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산 돌이신 예수님께서 산 돌로 만들어주셨으니 새 성전답게 갓난 아기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으며 자라갈 것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고난 중에서도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며, 구원에 이를 때까지 성장하며,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내에서 형제 사랑을 실천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교회에게 전하는 말씀이며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사람들이 버렸으나 하나님께서 산 돌로 세우신 예수님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산 돌이신 예수님과 같이 고난 중에서도 말씀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특별히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은 오늘 말씀에서는 형제 사랑이며, 고난 중에서도 형제 사랑을 우리는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모든 악독과 기만,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형제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 산 돌이시라는 것을 우리의 영적 성장을 통해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이것이 교회가 산 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를 산 돌로 만들어주시고, 우리의 고난을 신원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고난 중에서도 형제 사랑을 끊지 않는 복된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과 수치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위해. 고난 중에서도 형제 사랑을 끊지 않도록. 고난 중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산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하나가 되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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