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나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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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4:1-14절

오늘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나실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이번주에도 비가 많이 왔는데, 괜찮으신지요, 우리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한번 인사할까요. ‘욕망 말고, 말씀 따라 삽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사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이루는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결정을 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요, 수많은 결정을 통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이루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간의 사소한 결정부터, 중대한 일을 앞두고 중요한 결정까지, 사람들은 삶에서 여러가지 결정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에, 돌아보면, 후회가 되는 결정을 할 때도 있고요, 어떨 때에는, 이 결정은 참 잘했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결정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질문해보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는 결정은 어떤 결정이 있었는가요? 제 인생을 돌아보아도요, 몇 가지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실분들은 아시겠지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던 결정, 신학을 하기로 했던 결정, 저희 아내와 만나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던 결정, 최근까지 돌아보면, 광혜교회로 사역지로 이동하려했던 결정, 이런 결정들은 참 잘했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제 인생에 돌아보아도, 후회스러운 결정들이 늘 존재합니다. 아 왜 그 때 그런 결정을 했을까. 왜 그때 섣불리 그런 결정을 했을까. 저는 사실 후회라는 것을 별로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후회해 봤자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결정들을 통하여, 우리는 또 삶에서 배우는거죠. 실수를 통하여, 내가 다시는 이런 잘못된 결정들을 하지 않으리 다짐해 봅니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결정의 기준이, 나의 욕망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따라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을 우리는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욕구를 전부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정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에 부합하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게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게 나의 욕망인지, 하나님의 기준인지 헷갈릴 때가 많이 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과는 다르게, 때로는 그 속마음이 나의 욕망인 경우도 있거든요,
때로는 어떤 사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결정들이, 나의 욕망을 이루려는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는 거죠.
분명히 할 것은요,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을 모두다 버릴 순 없겠지만, 말씀보다 욕망이 앞서는 사람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욕망이 들지라도,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건강할 때에, 우리는 욕망보다 말씀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인 상태가 병들어 있을 때에는요, 말씀보다는 욕망을 앞세우는 것 같아요. 정말로 우리의 육신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앞세우는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좋고 자연스러운 모습은요, 내가 막 내 고집을 꺾으려고 애를써서, 그 결정을 하는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들을 할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저는 바로 실질적 성화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하게 되어지는거죠. 예수님을 닮아가는거죠. 우리의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거에요. 이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들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요, 우리는 말씀을 통해, 분명한 기준들을 세워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분명한 기준들을 세워가면 그에 기준 맞게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축적되었을 때, 훈련되었을 때, 우리는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거죠.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가 살펴볼 사사는요, 바로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 삼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든 그는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나실인이 무엇이죠? 하나님께 구별된 존재로, 헌신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날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으요 구별된 존재로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사사기 14장에는, 삼손의 청년의 시절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번주에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가 어떤 존재로 태어났는지 나와있다면요, 14장에서는요, 어엿한 청년 삼손으로 등장합니다. 오늘 1절에 보면요,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며 사건이 벌어집니다. 삼손의 고향은 ‘소라’라는 동네였는데요,
딤나라는 도시는 소라에서 서쪽으로 약 10km떨어진 동네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로 가는 여정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1절에 보면, 내려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게 딤나라는 도시가 해발고도가 더 낮아서 그런게 맞습니다. 그래서 내려갔다고 한거에요. 그런데 이 삼손의 이야기에 보면, ‘내려가다’라는 표현이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블레셋 지역으로 내려갈 때, 그는 문제를 일으키고요,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왔을 때에는, 그나마 일들이 수습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내려가다라는 표현은, 물리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그의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점점 나락으로, 내려가는 것이죠. 결국 마지막에 블레셋 지역으로 내려갔다가, 시체가 되어 이스라엘로 올라오게 되는 삼손의 결말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됐건 그가 딤나로 내려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2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사사기 14:2 NKRV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그는 딤나로 내려가서 뭘 했습니까? 가서 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갔다오니 부모에게 뭘 말해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다는거죠. 블레셋 지역에 갔는데 뭐가 생겼어요? 좋아하는 자매가 생긴거에요. 그리고 부모에게 말하는거죠. 엄마아빠 나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 그 여자와 결혼할거야. 라고 결혼의 허락을 구하는거에요.
이게 어순을 보면 참 재밌는데요, 원어에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내가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 중에서, 이렇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상대가 부담스러워하거나 싫어하는 말을 어디로 빼요? 맨 뒤로 빼잖아요. 엄마아빠한테 그런거에요. 엄마 나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그 때 딤나에 갔을 때,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애는 블레셋 사람이야 라고 뒤에 말한거죠. 충격완화 방식으로 부모에게 이야기 했는데요, 삼손의 부모는 단호합니다. 3절에 보세요,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은 굉장히 거부감이 드는 일이였습니다. 여러분 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 민족주의 경향이 있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단순히 혈통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고 반복적으로 경고하고 있어요.
신명기 7:3–4 NKRV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에 보면요, 이방인과의 결혼은 단순한 문화적 혼합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가치관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되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자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이방민족에게 베타적인 문화였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규례들을 오해해서, 이방민족들을
베타적으로, 편협적으로 대하는 모습들이 보여집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같은거죠. 그 가자지구 사람들이, 뭐 아말렉 족속의 후예라고 말하면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전쟁을 통해,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는데, 이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행동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거룩한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모든 이방민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비전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그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오히려 거스르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것이죠.
다시 이방민족과의 결혼에 대해 결국 나중에 솔로몬 왕 역시,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이 이방 아내들로 인하여, 우상 숭배로 무너졌다고 말씀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삼손의 부모가 그것을 거절했던 기준은 하나님의 뜻과 기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오늘날의 시대 역시 비슷한 것같습니다. 청년의 때에 많이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배우자에 관한 것이죠.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과 교제 해도 되느냐. 불신자와 결혼을 해도 되느냐에 대한 질문을 많이들 가집니다.
여러분들은 뭐라고 답해주실래요? 만약에 저희 아들과 딸이 그러한 일로 저에게 물어보면 저는 뭐라고 답할까요? 당연히 안된다고 하겠죠. 그런데 안되는 이유가 뭐냐는거에요. 그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는 삶에 중요한 기반과 틀이 되기 때문이에요.
요즘 성격이 안맞다고 뭐 하나만 틀어지면 이혼하는 시대래요. 그런데 이 믿음의 문제는, 성격, 성향, 뭐가 안맞네 문제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있는 문제기 때문에, 저는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찌됐건 삼손의 부모는 이 삼손의 요청에 거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삼손의 답이 중요해요. 3절 후반절에 보세요.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삼손의 사랑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요,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다는거에요” 내가 좋다는게 여기서 핵심입니다. 여기서 ~를 좋아한다라고 번역된 동사는요, 직역하자면 “내 눈에 좋다”입니다. 이것은 사사기를 대표하는 구절에 정확하게 명시된 단어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기에 자기의 소견에 옳게 라고 번역된 이 구문과 정확히 같은 숙어입니다.
삼손의 주장이 뭐에요? 내가 좋은데, 내가 맘에 드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거에요. 이 모습은 삼손의 개인적 판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삼손이 “작은 이스라엘’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금 나실인인, 사사인, 삼손조차, 내가 좋은대로, 내가 보기 좋은대로, 자신의 소견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합니다.
이게 누구의 모습이에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삼손의 말은 단순한 결혼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한 사람이 무엇을 기준 삼고 살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별된 나실인이었음에도, 뭐가 최우선이에요? 하나님 말씀이요? 아니요, 그것보다 자기 욕망, 자기 기호, 자기 만족을 우선시 하는 삶을 살았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삶에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모습들은 없습니까?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준이 많은 것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2가지 인것 같아요.
첫번째, 나한테 이득이 되는가? 나한테 유익이 되는가? 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입니까. 어떤 일이 득이 되고 실이 되는지 너무나 분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요. 나한테 손해되고, 불합리한 일들을 당하는 것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와 반대로,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이익이 되고
내가 행복한 일에는요,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제가 아는 여자애 중에, ‘데이식스’라는 가수 찐팬이 있어요. 근데 이제 가수가 콘서트 하면, 한 지역에서만 하는게 아니라 전국에서 하는거죠. 그런데 어디 지역에 가든지, 그 콘서트를 따라갑니다. 심지어는 예매도 잘 안되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 그것 뚫어가지고, 만약 서울에서 공연을 한다 하면, 서울까지 갑니다. 광주에서 한다고 하면 광주에 갑니다. 근데 걔가 섬사람이에요. 육지에서 하면 날마다 비행기를 타고 나와야 하는거죠.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열정이 대단하잖아요. 그래서 서울한번 갔다오면, 돈이고 에너지고 많이 들텐데 괜찮냐 그러니깐, 괜찮테요. 가면 행복하대요. 아 그래서 리스펙 해줬습니다.
이것은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런거에요.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돈, 시간, 물질 아끼지 않는 것이 요즘 시대 정신인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요즘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다 하니깐 나도 하는 경우가 많다는거에요. 요즘 참 빠른 것이 뭐냐면, 유행입니다. 트렌드에요. 그런데 이 유행이라는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근데 빨리 변화해도요, 요즘은 다 커뮤니티나 유투브나, 인스타를 통해서요, 그 유행들을 너무나 손쉽게 공유합니다.
그리고 뭐 한 주, 한 달만 지나도 이런 트렌드들이 너무 빨리 바뀌어요. 근데 사람들의 심리가 뭐에요. 많은 사람들이 그거 하면, 따라하고 싶은게 우리의 마음이라는거에요.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점검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뜻과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더라도요, 성도는 그렇게 살아선 안되는 것이죠. 사실 지금 시대나, 삼손의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고대시대 때에도 사람들은 어떤 욕망에 유혹 받고 있어요? 내 눈에 보기 좋은대로, 내 욕망대로 사는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죠.
지금 역시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것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 욕망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내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뜻을 쫓는 삶이 필요한 것이죠.
“내 눈에 좋사오니”라는 이 삼손의 말이, 우리의 고백이 아니길 바랍니다. 내 느낌, 내 이익, 내 감정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소망합니다.
참 신기한 것은요, 사람이 내 눈에 보기 좋은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거에요. 오히려 하나님이 지으신 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경험들을 계속할 수 있는 우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로 살펴볼 부분은 바로 4절 입니다. 4절에서 보면, 개역개정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사기 14:4
사사기 14:4 NKRV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이 말씀에 따르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했던 이유가 뭐라고 등장해요?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다. 즉 삼손이 이방여인과 결혼하려고 했던 동기를, 블레셋을 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조금 번역에 대해 다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삼손이 틈을 타서라고 번역한 부분에서, 삼손은 원래 원어로 3인칭 대명사가 쓰이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가 틈을 타서 이렇게 한거죠. 만약 삼손이 그런 계획 때문에 이방여인과 결혼하려 했다면, 그의 계획은 좋은거에요 안좋은거에요? 그가 사사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의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계속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으로 이 이야기에서는 그리고 있기 때문에,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한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고 했다라고 보는게 맞습니다.
어찌됐던 5절부터 보면, 삼손은 부모님과 함께 딤나로 내려갑니다. 부모가 삼손의 요구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함께 딤나라는 도시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포도원에 들리게 됩니다. 근데 거기에 뭐가 있었냐면 사자가 있는거에요. 사자가 막 삼손을 보고 포효합니다.
그러니깐 삼손이 어떻게 해요? 6절에 보면요, 여호와의 영이 임하더니, 손에 아무것도 든게 없었는데, 그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그리고 딤나에서 그 여자를 만납니다. 7절에 보면, 그 여자와 말하고요,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대요.
그니깐 그 전에 부모한테 말할 때, 사실 말도 안한거에요.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첫눈에 반해서 결혼하겠다 그런거에요. 웃기죠. 어찌됐건 며칠 뒤에 다시 갑니다. 가니깐 포도원에 죽은 사자의 시체가 있는거에요. 거기에 꿀이 들어있는거죠. 손으로 그 꿀을 떠서 먹으면서 막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꿀을 자기 부모에게 가져다 줘요.
이게 무슨 모습이냐면, 그냥 막무가내 진짜 자기 멋대로 하는 모습인거에요. 삼손이 뭐라고요? 나실인이래요. 나실인은 하면 안되는 규정이 있죠. 뭐에요? 포도의 소산물을 먹으면 안되요. 그리고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되요. 머리를 자르면 안되요.
그런데 딤나로 내려가면서 뭘해요? 포도원에 갑니다. 자기한테는 부정한 장소인 것이죠. 거기서 뭘해요? 사자를 찢어죽여요, 찢어 죽인다는게 뭐에요. 그 사자가 죽으면 시체가 되는거에요. 심지어 며칠뒤에 그 시체에 가서 꿀을 먹어요. 이게 말이 안되는 행동인거에요.
그런데 독특한 것은요, 아까 4절에도 그렇고요, 6절에도 그렇고요, 이 삼손의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뭘 계획하세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을 계획하고 계시는거에요.
삼손이 이방여인과 결혼하려했던 잘못된 선택도,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블세셋을 치려 하심이었다. 삼손이 사자를 찢여죽이는 그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여, 삼손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계시는걸까요? 하나님이 계획하셨으니깐, 그가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것도 괜찮아. 하나님이 도와주셨으니깐, 그가 사자를 찢어죽이는 것도 괜찮아. 그 말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처절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삼손이 나실인이고, 사사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사람이지만, 그는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뭐하세요? 어떻게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까. 어떻게 그 압제로부터 고통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할까. 하고 계시는거에요. 그래서 저 지멋대로 하는 삼손을 통해서라도 구원을 베풀기를 작정하고 계시는거죠.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에서도 아주 분명하게 똑같이 보여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까지, 수많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인물들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자신의 출세와 권력 때문에,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 넘겨주었던 빌라도, 참 메시아가 이 땅에 왔음에도, 질투와 시기 때문에, 참 메시아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의 12제자였음에도, 돈과 욕심 때문에 넘겨주었던 가룟 유다.
이 모든 사람들은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람 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죄악 많은 세상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섭리를 통하여, 구원을 일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확신과 지식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요. 인간의 자유의지나 책임을 결코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일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통로가 되어지는 사람들의 책임은 여전히 중요함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인가?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던, 삼손, 빌라도, 종교지도자들, 가룟 유다처럼 쓰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참 믿음으로 쫓았던, 수많은 제자들처럼, 예수님처럼 쓰임 받을 것인가.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만을 쫓으며 그것을 분명한 기준삼고 살아가, 선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삼손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나실인’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 나실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였지만, 실제 삶에서는 말씀보다 욕망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죄 많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구원을 이루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삼손의 삶을 긍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용하시지 않고, 죄를 이기시며, 때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넘어서서 그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가입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며 동참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과연 ‘내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기준으로 살고 있진 않습니까? 내 기분, 내 감정, 내 이익이 기준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혹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실인처럼 구별된 자라 부르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말씀보다 욕망을 앞세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기준삼는 사람은, 때로 손해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평강과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준은, 말씀 중심의 삶,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정, 자기 욕망을 절제하며 주님의 뜻을 우선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도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살아갈 것인가? 삼손처럼 자신의 욕망을 기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순종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결단하는 오늘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비추어보고, 다시 주님의 뜻을 붙드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첫 번째 기도제목

“내 욕망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삶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 사사기 14장을 보면,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자로 살아가기보다, 늘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삿 14:3)
그는 한 번 보고 반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고집하고, 부모의 신앙적 권면도 무시해버립니다. 결국 나실인의 서약도 하나하나 깨뜨리며, 자기 욕망을 따라 행동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기분, 내 판단, 내 욕망을 따라 살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삼손처럼 살아갑니다. 기도하지 않고 결정하고,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여기며, 말씀이 아닌 내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 이 시간 기도합시다.
“하나님, 삼손처럼 내 욕망과 내 판단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 되게 하소서. 결정 앞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자 되게 하소서. 나의 고집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 두 번째 기도제목

“거룩한 구별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삼손은 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 구별된 자였습니다. (삿 13:5, 7)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시작할 사람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거룩함을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는 포도원에 들어가고, 사자의 시체를 만지고, 꿀을 먹고, 부모에게도 부정함을 나눠주며 무감각하게 살아갑니다. (삿 14:5-9)
우리도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구별되지 않는 말, 행동, 관계, 소비, 가치관, 생각들이 우리 삶에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습니다.
👉 이 시간 기도합시다.
“하나님,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거룩을 잃어버린 신앙이 되지 않게 하시고, 말씀 앞에 내 삶을 날마다 구별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일상의 작은 선택 안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묻고 따지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나의 거룩함이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 세 번째 기도제목

“우리 교회가 말씀 위에 서는 거룩한 공동체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삼손의 부족함과 실수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삿 14:4) 삼손의 불완전함보다, 하나님의 구속 의지가 더 크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완전하진 않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 공동체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 위에 서는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내고, 거룩하게 구별된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여름성경학교 – 다음세대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게 하소서.
전교인섬김수련회 – 모든 성도들이 ‘교회됨’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 되는 시간 되게 하소서.
연약한 지체들 – 육체적 질병, 마음의 상처, 신앙의 침체 속에 있는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회복이 임하게 하소서.
👉 이 시간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거룩한 공동체 되게 하소서. 다음세대가 말씀 안에서 자라나게 하시고,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가 임하게 하소서. 전교인수련회 가운데 모든 세대가 하나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교회 되게 하소서. 연약한 지체들에게는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셔서, 모든 성도가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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