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אמר 1
성경에서 가장 많은 단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이르시되”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기록된 단어를 보면 “이르시되”입니다. “이르시되”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오냐면 “이르되”, “말씀하시기를”, “말하기를”, “이르기를”, “말하되” 이런 같은 의미의 단어들을 모두 합하면 5288번이 나옵니다. 그만큼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장면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 등과 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한 책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는 책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의 신학자’라고 불리는데요. (Deus Dixit)라고 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라는 말을 중심 신학으로 잡았습니다. 이것은 20세기 유럽에서 예수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종교성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와 성경 없이 인간의 종교심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견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없이도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를 빼고, 성경도 빼고, 인간의 양심과 종교심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했고요. 우리가 다 하나님이다라는 종교심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 상황 속에서 바르트는 ‘아니요’를 외치며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유럽에서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생겨났었는데요.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이론들 속에서 바르트는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요.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인간의 악함을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말씀이신 예수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고 진리를 알 수 있는데 그 말씀은 죄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이성과 선한 양심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대로, 나타나시는대로, 말씀하시는대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 말씀으로 나타내십니다. 창조를 시작하실 때도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소통하시는 방식은 말씀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교제하십니다. 이것은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와 교제하시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세상과 교통하셨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계시하시고, 교제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일서 1:1에도 보면요.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요 그 때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처음부터 같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등장하시기 전인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3,000번을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과 선지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이제 눈으로 볼 수 있게, 손으로 만질 수 있게 그 말씀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사명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화목제물이자 다리가 되셨습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 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생명을 부여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시대에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죄인인 우리에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생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이 빛은 태양과 다릅니다. 태양은 4번째 날에 창조됩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어떤 빛이냐면 하나님의 빛입니다. 해와 별도 창조되기 전에 만드신 하나님의 빛입니다.
사실 많은 고대 신화들은 해를 신으로 여기고 많은 창조 이야기들이 있지만 특히나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를 보면 마르둑이라는 신이 있고, 신이 괴물을 만들어서 서로 싸워서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해가 되는 그러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창조는 오직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집트와 같은 민족도 있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 태양도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태양은 넷째 날이나 되어서야 등장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많은 고대 신화들이 신으로 여긴 태양과 별과 물과 같은 것들을 창조하신 분들입니다. 더 강하시고 더 위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양이 가장 큰 존재이자 큰 신으로 여겼던 자들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태양보다 먼저 빛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빛이 나옵니다. 이 빛은 물리적인 빛이면서 언제나 세상을 밝히고 우리의 어두움을 밝히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모든 어두움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2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빛은 그 세 가지 상태의 반대 개념, 반대 가치입니다. 혼돈에 맞선 질서와 안정, 공허에 맞선 의미와 보람, 어둠에 맞선 빛과 희망과 같은 것들, 그 모두가 창세기가 말하는 빛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시 ‘하나님’에 보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면에 밝히신 빛이 무엇인지 감탄하며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그 사랑에 안겼네
푹 안겼던 꿈 깨어 우러르니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이었네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텅 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됨이었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나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밝히신 우리 내면은 우리의 어두움을 밝히시고 충만함으로 채우십니다. 알 수 없는 벅참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하나님의 백성을 밝히시는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요. 이사야 60장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빛은 어두움 가운데 비추시는 빛이고요. 어둠의 힘 가운데 비추는 뜨겁고 따듯한 사랑의 빛입니다. 요한은 이 빛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태초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그 말씀은 생명의 빛이라고 증언합니다. 생명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참 빛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빛으로 만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났을 때 빛이 갑자기 바울을 둘렀습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도 설명할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 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은 사도바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셨고 그의 어두움을 밝히시고 내면을 밝은 빛으로 가득 채우시고 감싸셨습니다. 이처럼 창세 때에 하나님께서 비추신 빛은 말씀으로 비춰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닌 빛으로 나타나시기를 순종하신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빛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이신 빛은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고 우리의 내면을 뜨겁게 변화시키시는 어둠을 이기는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우리의 어둠이 물러가고 우리가 빛으로 환하게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드러나고 깨끗해지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 빛을 보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저녁이 먼저 시작되고요 밤이 되니 첫째 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째 날은 영어로는 first day 라고 안하고 one day라고 합니다. 둘째 날은 second day인데 first, second 이렇게 순서대로 가지 않고 첫째 날은 one day로 한 날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날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곱째 날까지 있는 중에 첫째 날은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 창조 때에 날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one day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날’은 히브리어로 ‘욤’인데요.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24시간으로 보기도 하고요. 백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으로 보기보다 인간의 ‘날’ 개념에 맞추어주신 하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창세기의 ‘날’이 몇 시간이냐, 해가 없는데 어떻게 ‘날’이 있냐 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창조의 첫 번째 순서를 인간의 ‘날’로 사용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 빛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빛을 보시고 참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어두운 세상과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셔서 우리를 밝히 비추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비춰져서 우리가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심히 좋아하십니다. 우리 영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빛이 비춰져서 어둠과 죄된 우리 영이 주님의 빛으로 환히 밝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어두움을 하나님의 빛으로 밝혀주옵소서. 말씀으로 비춰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영으로 우리를 거룩한 빛으로 창조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찬송가 510장
축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게 하시는 은혜가
하나님의 빛이 밝히 비춰져서 거룩한 빛의 사람으로 창조될 하나님의 창조물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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