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병이어 학생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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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1-13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 두 가지가 있는데요. 이 두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요. 또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4가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될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가지 모두 나옵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이야기가 모두 나옵니다. 그만큼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한 가지 사건에서 파생된 이야기라고 한다면 숫자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같은 이야기가 여러번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에도 늘 숫자는 똑같습니다. 숫자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는 특별한 문자였고, 아무나 사용하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숫자가 중요한데 오병이어는 항상 5,000명이라고 나옵니다.
또 숫자가 나오는 경우에 복음서에서만 본다면 열두제자는 늘 열두명으로 나오고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서 결실을 맺는 배수도 100배가 모두 똑같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사흘’도 항상 똑같습니다.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시고 시험 받으셨다는 내용에서도 모두 40일이라고 나옵니다. 이처럼 숫자는 같은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살과 추가 내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어도 숫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숫자가 달라졌습니다. 오천명에서 4,000명으로 줄었습니다. 더 적은 인원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광주리의 개수도 달라졌습니다. 또 다른 사건이자 또 다른 의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무 이유없이 똑같은 사건을 남겨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종이도 모자라고 최대한 빠르고 간략하게 기록을 남겨야 했던 시대에 똑같은 이야기를 넣을 리는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보니까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라고 나옵니다. 앞에 있었던 오천명이 넘는 무리와 비슷한 또 큰 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6장 34절에서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거기서도 “큰 무리”였는데요. 오늘 말씀에서도, 칠병이어 사건에서도 또 ‘큰 무리’가 또 다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와 같은 큰 무리가 또 모였다는 것이죠.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진행하십니다. 제자들을 불러서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라며 불쌍히 바라보십니다.
여기서는 사람들과 예수님이 함께 계신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꽤 오랫동안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사흘이나 함께 한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줘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이번에도 제자들은 떡을 어디서 얻을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일곱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땅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조금더 적극적으로 빠르게 진행하십니다.
일곱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줍니다. 여기서 ‘앉게 하시고’가 나오는데요. 여기서 앉는 자세는 당시 사람들이 밥을 먹는 자세인 기대어 앉는 자세입니다. 거의 누워있는 자세입니다. 편하게 누워서 먹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오병이어보다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리들이 배고픈 상황이 더 심했던 모양입니다. 예수께서 기진할 것을 염려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보면 마치 성찬식을 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무리를 향하여 ‘앉으라’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 하시고요.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작은 생선 두 마리를 들고서도 축복하시고 생선도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몸을 기억하라는 성찬식과 같습니다. 이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떼어주시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몸을 떼어주시고 나누시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무리들은 그 예수님의 몸을 떼어 먹으면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배불리 먹고 남은 양이 일곱 광주리입니다. 여기서는 바구니가 아니고 광주리입니다. 열두 바구니가 아니고 일곱 광주리라고 나옵니다. 바구니와 광주리가 다른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굳이 나누어보자면 바구니는 κόφινος 광주리는 σπυρίς인데요. 예수님도 이 두 가지를 구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8장 19-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너희는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열두 바구니입니다.”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광주리입니다.”
우선 예수님도 이 두 사건을 나눠서 말씀하십니다. 두 개의 사건이 다르다는 것이죠. 두 번이나 보여줬는데 아직도 떡이 없다고 염려하고,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때 예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봤을 때 두 개의 사건은 다른 사건이고요. 두 번이나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에서는 바구니, 칠병이어에서는 광주리를 말씀하십니다. 두 가지 도구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굳이 나누자면 바구니는 유대인들의 도구이자 조금 더 작은 바구니라고 할 수 있고요. 광주리는 이방인들의 도구로 조금 더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25에서 바울이 피신할 때 바울의 제자들이 밤에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려 탈출하게 해줬을 때는 ‘광주리’라고 기록합니다.
그곳은 다메섹이기 때문에 이방 땅입니다. 이방 땅에서 사용하던 것은 광주리라고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여기서는 복음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빨리 결론을 말씀드리면 열두 바구니는 유대인들을 위한 바구니였고, 유대인들의 바구니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먹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먹이시고 열두 제자를 통해 열두 바구니를 남기시고 제자들이 이제 그 일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칠병이어 사건에서는 광주리라고 표현하면서 이방사람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사용하시고, 이방인의 것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먹이셨고, 이방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인 것이죠. 여기서 일곱 광주리는 유대 땅에 남아있는 이방 민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땅을 점령할 때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다 점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아있던 가나안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입니다. 이 이반 사람들까지 포함하시는 것입니다. 이 숫자의 의미는 조금 재미없으실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숫자에 의미가 있다기보다 이 칠병이어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보다 더 이방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예수님,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나누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제 묵상이기 때문에 동의하셔도 되고 안 하셔도 자유이지만 제가 받은 은혜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받은 은혜, 누린 양식을 우리만 가지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풍족하게 남기시고 넘쳐 흐르게 하셔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라고 하십니다. 같은 민족 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도, 땅끝까지 이 하나님 나라 잔치를 전하고 나누고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보다 세상과 일터와 가정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나눠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1절에서 13절에는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활동과 기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표적을 보고 들었음에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의 일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며 깊이 탄식하십니다.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는 자들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고, 자신의 행함으로 보여주어도,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먹이는 일을 하여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사람을 바꾸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큰 간증을 바라고, 기적을 바라고 하지만 사실 그 기적은 그때뿐이고요. 큰 체험을 해도 그것이 식고 난 후에가 더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가슴은 식습니다. 신실함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큰 기적이 없어도 말씀에 집중하면서, 예배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더 대단한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믿는 자들보다 아무런 기적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 감사하며 말씀 읽기와 기도에 충실한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늘 새벽을 지키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분들인줄 믿습니다. 신실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특별한 것을 바라기보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받아 먹고 누리고 나누는 신실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은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누리며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