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목적지보다 누구와 함께하는지가 중요하다!

하나바이블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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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

빌립보서 4:10–13 NKRV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자족’이라는 주제로 함께 말씀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자족이 무엇인가? “스스로 만족함을 느끼거나,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상태”를 말한다. 여러분은 이러한 자족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보통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이루었을 때 스스로 뿌듯함과 자족을 느낄 수 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잘 해결하거나, 어려운 일들을 혼자 해냈을 때 자족을 경험한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한 즐거운 시간에서도 느낄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건강할 때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자족의 경험이다.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 또는 요즘 헬스나 런닝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하는 자신을 보면서 자족할 수 있다. 봉사활동이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끼며 자족을 느낄 수 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거나 건강한 식습관을 지키면서도 ‘내 몸을 잘 돌보고 있다’고 느낄 때 자족을 느낀다. 이러한 예시는 외부에 환경의 조건이나 다른 사람의 인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내면에서 행복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어느 정도 내 몸이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자족하기가 쉽다. 여러분들이라면 감옥에서 이러한 자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오늘 읽은 성경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쓴 편지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고백한다. 생각해보라. 사도 바울은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반역죄로 인해 감옥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황제가 언제든지 사형을 시킬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 보통 이런 상황에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에 희망이 아니라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도대체 왜 기뻐할만한 상황인가?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자신은 기쁘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시 읽어보기 원한다.
빌립보서 4:10 NKRV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배경을 잠시 살펴보아야 이해가 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신에게 예전부터 헌금을 보내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드디어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 보낼 수 있게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한 선한 마음을 갖게 하고 또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신 것이 누가 그 일을 하셨기 때문인가?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허락해주셔서 크게 기뻐한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누구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인가? 우리 주 하나님으로 인해 감옥에 갇혀 있어도 충분히 기뻐할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1절에 바울은 이런 말로 자신의 궁핍함에 대한 불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어느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 불평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당시 헬라어에서 말하는 “자족”은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것으로 만족해하는 태도”로 스토아 철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덕목이었다. 불교에서도 비슷하게 “무소유”라는 가르침으로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고행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빌립보서 4:12 NKRV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비천에 처하는 방법도 알고 풍부에 처하는 방법도 안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난할 때에도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낙망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되었어도 자만하고 방심하여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즉 배부른 상황이든지, 푸부함이든지 결핍이든지, 자족하고 적절히 처신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한다. 여기서 “비결을 배웠다”라고 번역한 말은 당시 그리스의 신비 종교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신자가 되어서 그 종교의 비밀을 터득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바울은 보통 이방 철학이나 종교의 냄새가 나는 용어를 쓰지 않고 피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평소에 쓰지 않는 언어를 써가며 말하는 이유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자족하는 태도는 중요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궁핍한 상황에서도 자족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것임을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자신이 그렇게 어려운 것에 대한 비결을 알아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너무나 유명한 고백을 사도 바울이 선포한다.
빌립보서 4:13 NKRV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통 시험이나 수능보기 전에, 중요한 대회나가기 전에, 대학입시 원서를 제출할 때, 입사 면접을 보기 전에 등등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에 이 말씀만 딱 떼어내어서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고백한 자족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고 이 말씀을 본다면 마치 “하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사고의 표현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맥락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다. “수능을 잘보고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에 가서 좋은 일이 생기거나, 혹 반대로 수능을 망치고 네가 가고 싶은 대학에 다 떨어져도 너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니?” 그러니 사도 바울은 내 인생에 주어진 일에 결과가 어떠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절대적으로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지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자족하려면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자족하기를 힘써야하는데, 바울은 자신에게 힘 주시는 하나님에 힘입어 자족한다고 분명하게 고백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족하기에는 한계가 너무나도 많다. 인생에 억까와 같은 상황이 계속 주어진다면 과연 자족이 가능할까? 더 나아가 인생에 바닥을 쳐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거기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의지하는가? 술을 찾고 그 상황을 지나가버리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은 바뀌지 않기에 다시 술을 찾고, 그러다가 술이 없으면 안되는 인생이 되어버리기 쉽다. 결국 몸도 망가지고 정신적으로도 점점 피폐해져간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그런 상태인 줄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상황이든지, 아주 최악의 상황이든지 간에 어떠한 상황에도 넘어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 온다고 고백하는가? 하나님이 힘 주시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 놓여있을지라도 하나님 때문에 감사할 이유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다.
하박국 3:17–18 NKRV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기서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하는 내용은 인생이 완전히 망해버린 상황을 말한다. 여러분들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하면 이렇다. 수능보러 갔는데, 배탈이 심각하게 나서 1등급하던 사람이 올 9등급을 맞아 원하는 대학에 다 떨어진 정도이다. 당시 어느 정도로 망한 상태냐면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인간이 가장 슬픔을 크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나라가 사라져 잃어버렸을 때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라를 빼앗겨 슬픔을 문학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 여러분의 고등학교 국어 시험에 나오는 것들 아니겠는가?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더 이상 법이라는 울타리도 없기에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민들이 전 세계적으로 다니는 이유도 이젠 국가가 그들을 책임질 수 없기에 스스로 자신이 각자도생을 해야한다. 그러니 자신의 땅이라는 소유의 개념도 사라지고, 재산이라는 개념도 사라져서 결국 오늘 하루 어떻게 살아갈까가 인생의 최대 고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는 상황이 나라를 잃어버린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기뻐한다고 고백한다. 왜인가? 여호와로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 어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기뻐할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전도사님은 군대를 늦게간 편이었다. 그래서 19년도 10월에 입대해서 20년도 1월에 일병이 딱 되었는데, 무엇이 터졌는가? 코로나가 터져서 휴가를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군대는 자유가 없어서 안그래도 갇혀있는 곳이라 답답한데 더 답답한 상황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훈련도 안하고 쉬면 좋을텐데 꼭 꾸역꾸역 훈련은 일정대로 어떻게든 시켰다. 근데 당시 지휘관들 중에 정말 재밌는 소대장님이 계셨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중위 계급의 형님이셨는데, 말 하나하나가 주옥같이 재밌었던 분이셨다. 무슨 훈련도 예능 게임하듯이 재밌게 하다보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가면서 오히려 즐거운 기억으로 군생활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반대로 전도사님은 군 입대하기 전에 혼자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여행이 나의 컨디션대로 다니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가서 먹으면서 베트남 마사지도 받고 재밌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언제가 가장 힘들었냐면 방에 들어왔는데 나 혼자 조용한 방에 있는 것이 괴로웠었다. 숙소에 와서 재밌었던 일들을 나눌 친구가 없으니 그만큼 외로운 감정이 들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가기 싫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누구와 동행하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의 만남에는 다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어디를 가든지 모든 순간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늘 함께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와 영원토록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뻐할 이유와 즐거운 이유를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되기를 소망한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경험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이 닥쳐와도 그것으로 인해 넘어지거나 힘든 감정에 얽매이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날 줄 믿는다. 전도사님도 힘든 순간이 다가와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또한 위대하시고 능력의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그 사실이 오늘 나를 살아갈 힘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꿈사땅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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