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9-24) 하나님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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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는 학력으로, 누군가는 경력으로, 또 누군가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려 합니다.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은 언변으로, 성취가 많은 사람은 업적으로, 가족이 성공한 사람은 자녀의 성과까지 동원해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근거를 만들어갑니다. “자랑”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이지요.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배 출석률, 봉사 시간, 헌금액, 성경 지식의 깊이, 기도 생활의 열심까지 하나씩 나열하며 스스로를 점검하고, 은연중에 점수를 매기기도 합니다. 마치 신앙생활도 어떤 기준표가 있어서 그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식이 필연적으로 비교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정도 하는데, 저 사람은 못하네"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비교는 곧 시기로 이어지고, 시기는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시선이 점점 거칠어지면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불편하게 느껴지고, 나보다 못하는 사람은 은근히 무시하게 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도 남을 더 높이기 보다, 내가 높아지지 않으면 못견디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직접 언급하신 것은 “율법”이지만 우리가 보통 가치있게 생각하는 외적인 조건으로 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더 와닿습니다. 율법은 사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곳으로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귀하게 여겼지만, 어느새 그 율법을 자기 의를 자랑하는 근거로 삼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이유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과 20절에서 율법의 본래 목적을 다시 세워줍니다. 율법은 우리를 자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겸손히 서게 하는 거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이 얼굴의 때를 보여줄 뿐 그것을 닦아주지 않듯이,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거울 앞에서 침묵해야 할 때에도 끊임없이 변명과 설명을 덧붙이려 합니다. 바로 이때부터 왜곡이 시작됩니다. 내가 지키지 못하거나 탁월하지 못한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내가 조금 잘하거나 지키는 것은 최고의 가치인 것으로 과시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율법의 자리는 겸손과 고백인데,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그것을 자랑과 비교의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본론
본론
1) 율법과 세상의 조건이 가진 같은 문제
율법은 본래 선하고 거룩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조건들, 곧 돈이나 지위, 명예, 능력 같은 것들도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죄된 마음에 붙잡힐 때 발생합니다. 그 흐름은 거의 항상 동일한 패턴을 따릅니다. 먼저 비교가 시작됩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너는 못했네"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서, 이런 비교는 스스로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낮추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비교가 깊어지면 곧 시기로 발전합니다. 비교에서 뒤처진다고 느끼는 순간, 남의 잘됨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기뻐해야 할 일을 기뻐하지 못하고, 함께 축하해야 할 순간에 속이 쓰리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시기가 자라나면 우리의 반응은 여러 방향으로 왜곡됩니다. 어떤 이는 위선의 길을 택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미고, 겉으로는 의로운 척하지만 속은 전혀 다른 모습을 유지합니다. 또 어떤 이는 가혹함으로 반응합니다. 자신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타인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합니다. 반대로 어떤 이는 회피를 선택합니다. 기준이 무서워서 관계를 피하고 공동체에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체념에 빠집니다. "나는 원래 안 돼"라며 스스로를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왜곡의 마지막 종착역은 언제나 정죄와 공격입니다. 자기 의는 비교 없이는 유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교에서 오는 불편함을 해결하려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돌려야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작은 흠도 도덕적 결함으로 단정하며, 그를 향한 비난을 정당화합니다. 율법이 더 이상 방패가 아니라 창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2장 1절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교에서 시작하여 시기로 이어지고, 자기 의를 수호하려는 몸부림이 결국 정죄와 공격으로 귀결되는 이 사슬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방식으로 서로를 물고 뜯다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갈라디아서 5장 15절이 경고하는 그대로입니다. 갈라디아서 5:15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더욱 비극적인 것은, 정죄가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남을 향해 세운 기준이 그대로 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는 실적표가, 학교에서는 성적표가, 교회에서는 봉사 기록과 각종 '인증'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처음엔 질서와 선을 위해 만든 기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열을 매기고 자랑의 근거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절대적인 평가기준이 되어버리면, 그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하고, 나의 부족함도 견디지 못합니다. 나의 성공은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고, 남의 부족함을 멸시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3:19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결국 19절이 말하는 "모든 입이 막히고"라는 자리로 내려가지 못합니다. 입이 막히지 않으면 귀도 열리지 않습니다. 변명과 설명이 넘치면 은혜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2) 율법의 본래 목적: 침묵과 자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래 목적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수단'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20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의롭지 못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율법 앞에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 반응이 바로 진정한 신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첫 번째 반응은 침묵입니다.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19절이 말하는 "모든 입이 막히고"가 바로 이것입니다. 더 이상 변명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습니다"라는 주장도, "저 사람보다는 낫습니다"라는 비교도 모두 멈추는 것입니다. 이 침묵은 패배의 침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들을 준비가 된 거룩한 침묵입니다. 시끄러운 자기 변호가 멈출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반응은 깨달음입니다. 침묵 가운데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만나게 됩니다. "나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는 뼈아픈 진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 부족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내 노력으로는, 내 선행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완전한 무능력의 고백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절망적인 자각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시작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반응은 시선의 전환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던 시선을 하나님께로, 내 성취에 매달리던 손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점수표를 들여다보던 눈을 은혜의 선포로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익사 직전의 사람이 자기 힘으로 헤엄치기를 포기하고 구조의 손길을 붙잡듯이, 우리도 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침묵하고, 자각하고, 시선을 돌린 마음에 21절의 말씀이 천둥처럼 선명하게 들립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선포입니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그 의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혀 다른 길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3) 하나님의 의(dikaiosynē)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하나님이 공정하시다는 성품 묘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시고, 죄인을 올바르게 세우시는 구원의 행동 전체를 아우르는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가볍게 보시지 않으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이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정의를 세우면 자비를 포기해야 하고, 자비를 베풀면 정의가 무너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시면서도 죄인을 살리는 길을 여셨습니다. 의롭다 하신다는 것은 단순한 호의나 눈감아주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법정에서의 무죄 선언이면서 동시에 가족으로의 입양 선언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신분,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부여하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는 구약 전체가 이미 증언해 온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면서도 대속의 길이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외친 의로움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완벽하게 만났습니다.
4) 예수의 믿음(pistis)과 우리의 믿음
22절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의 믿음을 통해 나타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신실함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순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고뇌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의를 완벽하게 드러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이 믿음은 어떤 조건을 채우는 성취가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주어진 구원을 붙드는 빈손입니다.
이 두 축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함이 없으면 믿음의 내용이 공허해지고, 우리의 믿음이 없으면 복음은 내 삶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도 동일한 진리를 증언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예수의 신실함이 우리의 믿음을 낳고, 우리의 믿음은 예수의 신실함을 붙드는 것입니다.
5) 복음이 비교와 정죄를 끊는 이유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모두가 예외 없이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24절은 이어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선포합니다. 출발이 같고, 구원의 제공이 값없이 주어진다면, 우리에게 시기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복음은 정죄와 공격의 힘을 완전히 꺼버립니다. 나의 의가 내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에서 온다면, 다른 사람을 낮출 이유가 사라집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전제는 내가 내리는 모든 판단이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정죄의 언어를 고백의 언어로, 공격의 태도를 중보의 태도로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타인을 단죄할 권한을 내려놓는 순간, 공동체는 비로소 회복의 질서를 되찾습니다.
6) 왜곡된 반응을 바꾸는 길
복음은 율법과 조건의 오용에서 비롯된 모든 왜곡을 이렇게 변화시킵니다.
위선이 있던 자리에 고백이 들어섭니다. 더 이상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가 됩니다.
가혹함이 있던 자리에 온유가 스며듭니다. 동일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자각이 우리의 판단의 어조를 부드럽게 만들고, 이해와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회피가 있던 자리에 친밀함이 자라납니다. 기준이 무서워 피하던 공동체로 다시 나아가 은혜를 나누고, 서로의 연약함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체념이 있던 자리에 소망이 피어납니다. 실패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의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열어준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정죄와 공격이 있던 자리에 중보와 책임이 들어섭니다. 여전히 사실을 말하되, 사람을 고발 대상으로 삼지 않고 심판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의 언어를 점검하고, 사실과 은혜와 소망의 순서로 말하며, 상대의 입장에서 기도하는 훈련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결론
결론
오늘 본문은 우리를 두 길 앞에 세워놓습니다. 하나는 비교와 시기의 길입니다. 이 길의 종착역은 언제나 정죄와 공격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나의 의는 결국 정죄와 심판으로 흐릅니다. 그것은 기준을 세워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그 위에서 내 의를 확인하려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의는 구원과 생명을 주는 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으로 죄를 드러내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십니다. 나의 의는 나 자신도, 타인도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의 의는 나도, 타인도 세우고 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결의 언어를 내려놓고, 고백과 중보의 언어로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나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이 우리를 초대하는 길입니다. 정죄와 심판의 길에서 벗어나 구원과 생명의 길로 옮겨가는 참된 회심의 여정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비교와 시기의 굴레에 갇혀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의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길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초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