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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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7:24-30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2025. 8. 13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내신 후에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의 단락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지금 예수님이 계신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이제 막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고, 또 전부터 계속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먼저 예수님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자, 오늘 본문 2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예수님이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시는데요. 세 번 다 동일한 질문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밑에 25절에도 이 질문을 하시고, 26절에서도 또 한번 하셔요.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시는 겁니다. 반복은 곧 강조를 의미하죠.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심으로써 뭔가를 강조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면 과연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실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질문을 다시 살펴봐야겠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백성들에게 너희가 광야에 나간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계셔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너희가 뭘 보려고 광야까지 나갔냐는 거죠. 그러면서 뒤에 하나의 예시를 덧붙이셨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너희가 광야에서 보고 싶어한 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는 겁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 광야에 나갔느냐? 여러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갈대는 보잘것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에 나가면 실제로 갈대가 많아요. 그래서 아주 흔하고 가치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겠다고 광야까지 나가는 사람은 없겠죠.
이어서 밑에 25절에서 두번째로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25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아멘.
두번째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질문을 하시는데요. 이번에도 예시를 주셨어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 광야에 있겠습니까?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권력자를 의미하는데, 권력자가 왜 광야에 있겠어요? 예수님도 그래서 뒤에 덧붙이셨죠.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나 있지 광야에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백성들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겠다고 광야에 나간 것도 아닌 것이죠.
그래서 정리해보면, 백성들은 갈대처럼 보잘것 없는 사람을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도 아니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화려한 사람을 보려고 나간 것도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일까?
자, 26절을 봐 볼까요? 26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아멘.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그리고 또 예시를 드시는데, 이번에는 선지자를 예시로 드셨어요. “너희가 보려고 한 것이 선지자냐?” 이렇게 질문을 하시고, 곧바로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옳다” 백성들이 대답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 본인이 질문을 하고 본인이 대답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백성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는지를 알고 계셨던 거죠. 예수님이 계속 질문을 하시지만,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었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갈대를 보기 위함도 아니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함도 아니고, 오직 선지자를 보기 위해서 광야로 나간 겁니다. 여러분, 그 선지자가 누굽니까? 세례 요한이죠. 요한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사람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갔어요.
그런데 여러분, 왜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갔다는 것을 강조하실까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해서 광야에 나갔었던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섭니다. ‘아, 그래. 내가 요한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었지?’ 이렇게 광야에 나갔던 그때 그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보려고 한 그 사람이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다’라고 선언하십니다. 26절 후반절이 그 말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누가요? 세요한이.
백성들은 갈대도 아니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도 아니고, 선지자를 보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선지자도 아니었다는 거예요.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백성들이 기대한 것 그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백성들 나름대로 요한을 보러 갈 때 기대한 것들이 있었겠죠.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거든요. 이 400년의 기간을 보통 “중간기”라고 그래요. 구약과 신약의 중간이라서 중간기인데요.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끝나고 새로운 계시가 선포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멈춘 기간이죠. 이 기간을 중간기라 그래요.
그런데 마침내 중간기가 끝나고, 요한이라고 하는 새로운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열광을 할 수밖에 없죠.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가 않았거든요. 사가랴 제사장이 늙은 나이에 낳은 아들인데,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었을 때 서판에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죠. 그래서 이 일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져서, 이 일을 듣는 자마다 과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이 내용이 누가복음 1장 65절 66절에 있어요.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아멘.
요한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는 겁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백성들이 다 궁금해했어요. 여러분 혹시 해리포터라는 영화를 아시나 모르겠어요. 해리포터가 주인공인데, 태어나면서부터 그 이름이 만방에 퍼져서 누구나 다 알아요. 그래서 어디 가서 “내가 해리포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놀라는 거죠. 니가 해리포터냐고, 반갑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그런 경우죠. 그 이름을 다 알아요. 그리고 요한이 그들의 기대에 맞게 잘 성장을 하죠. 누가복음 1장 80절 봐 볼까요? 요한이 어떻게 성장을 합니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아멘.
요한이 키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졌어요. 그리고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빈 들에 머물렀습니다.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문명에서 동떨어져 구별된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백성들이 기대한 모습 그대로 요한이 성장해 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어요. 지난 400년간 선지자가 없었던 이 땅에, 요한이 선지자로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 백성들은 그를 보기 위하여 기꺼이 광야로 나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이 너희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사람이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 그동안에 선지자도 본 적이 없었는데, 선지자보다 훌륭하다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일까?
오늘 본문 27절에서, 요한이 왜 선지자보다 훌륭한지를 말씀하십니다. 27절에 보니까,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아멘.
요한이 선지자보다 훌륭한 이유가 뭡니까? 요한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사자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는데, 이 예언이 바로 이 사람, 요한에 대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두 명의 선지자가 요한을 예언했어요. 이사야와 말라깁니다. 자, 먼저 이사야 40장 3절을 봐 볼까요? 이사야 40장 3절에서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을 했어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바로 요한이죠. 요한이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리라는 예언입니다.
이어서 말라기를 보겠습니다. 말라기 3장 1절 에는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아멘.
오늘 본문 27절에,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이죠.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이사야가 예언했고, 말라기가 예언한 그 사람이 바로 요한이라고 예수님께서 증언을 하신 겁니다.
그만큼 요한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다른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됨으로써 백성들이 기대하면서 기다린 위대한 선지자. 그리고 구약에 다른 많은 선지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메시야를 예언하기만 했지,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지는 않았어요. 오직 요한만이 메시야의 길을 직접 준비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선지자보다 훌륭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요한이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것이 요한의 명성을 깎을 수 없어요. 감옥에 갇혀도 요한은 요한입니다. 백성들이 바로 그런 사람에게 세례를 받은 겁니다. 선지자를 보려고 광야에 나갔다가 그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사람을 보고 세례를 받았어요.
그래서 밑에 28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아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어요.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다 여자로부터 태어나니까. 요한은 전 인류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에게 세례를 받았다면 가문의 영광이고, 평생의 자랑거리죠.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뒤에 추가로 덧붙이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지금까지 실컷 요한을 크고 위대한 자라고 칭찬을 하셨는데, 바로 그 뒤에 요한보다 작은 자가 없다고 하셔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갈대처럼 보잘것 없고 하찮은 자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면, 그가 요한보다 크다는 겁니다. 광야에 있는 갈대는 보잘것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갈대는 크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위대한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돼요. 그러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요한은 선지자보다 훌륭하고, 또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한 위대한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요한은 예수님을 오해했죠.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심판자로서의 예수님을 기대했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예수님을 의심했어요. 그래서 제자들을 보낸 거 아닙니까? 당신이 진짜 우리가 기다린 메시야가 맞습니까? 이것을 확인하려고 했어요.
아무리 위대한 요한도 진정한 메시야를 보지 못한 겁니다. 자기가 기대하는 메시야의 모습에 맞는 메시야를 보려고 하지, 이미 오신 메시야를 보지 않아요. 광야에 선지자를 보겠다고 나갔으면 그 선지자를 보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그 선지자의 모습이 내 기대와 다르다고 해서 실망을 하고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병자들을 고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나서, 방금 있었던 치유의 역사를 요한에게 가서 그대로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이러한 일들을 메시야가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는 것이죠. “요한 네가 원한 메시야의 모습과 다르다 할지라도, 이미 이 땅에서 이러한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네가 계속 네가 원하는 메시야를 고집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이 메시야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 판단을 요한에게 맡기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메시야는 내가 기대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메시야는 내가 무엇을 기대하든지 간에, 그 이상의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에요. 나는 물질을 원해, 나는 건강을 원해, 나는 심판을 원해. 각자 바라는 것이 다 달라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서 가장 좋은 것을 주셔요. 그게 뭡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영생보다 좋은 것은 없어요. 우리는 죽어도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영생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 지금 당장 나에게 별로 와닿지 않기 때문에. 영생이 좋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을 원해요. 물질, 건강, 또는 악인의 심판, 정치의 정상화, 경제적 성장, 뭔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체감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우리가 구할 수 있고, 또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에만 우리가 몰두해서는 안 되겠죠. 그러다보면 우리도 요한처럼, 내가 기대한 것을 받지 못할 때 의심하게 될 수 있어요.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것을 받는다 할지라도, 또는 기대한 것을 전혀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신 하나님이 그보다 못한 것을 안 주실까요? 우리가 기대하며 구하면 하나님의 때에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보기 위해서 여기에 오셨습니까? 여러분 각자가 마음에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 왔을 것인데, 무엇을 기대하고 오셨습니까? 말씀에 은혜 받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부르짖어 기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제 얼굴 보러 오셨습니까? 봐줄 만하게 생겼죠?
여러분이 무엇을 기대하고 오셨든, 그 이상의 것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광야에 있든, 왕궁에 있든, 감옥에 있든,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임합니다. 내 마음에 믿기만 하면, 그것을 받을 수가 있어요.
우리 하나님은 영생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기대한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요한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여 요한보다도 더 뛰어난 자로 우리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무엇인들 못 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세우시고,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담대히 구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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