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10 성령강림 후 아홉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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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관찰과 해석
9:31의 내용을 보면 교회가 “평화를 누리면서 튼튼히 서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을 핍박하였고, 그래서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자 그를 죽이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박해 속에서 ‘평화를 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보이는 이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평화’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샬롬’,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하는 말로 쓰입니다. 이 단어의 가장 첫번째 의미는 ‘온전함’입니다. 흠이 있거나, 부족하거나, 깨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평화’라는 말은 종종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평화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4절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14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이처럼 평화는 서로 갈라져있는 것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말로 번역될 수 있는데, 내 마음 속에 갈등과 충돌이 없이 온전한 상태에 대해서는 ‘평안’이라고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을 ‘화해’, ‘화목’이라고 번역합니다. 또 공동체나 사회적으로 분열이 없고 하나가 될 때에는 ‘평화’라고 번역합니다. 우리말로는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원어로는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평화’의 의미를 알게 되면, 왜 우리가 예배의 시작에 평화의 인사를 대신하여 ‘연결’하기를 하는지를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건 우리가 연결되어 하나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면 이제 아까 읽은 말씀이 조금 더 잘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내 상황에 위협이 없고, 고난이 없는 편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 보다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 ‘평화’라는 말이 조만간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직 읽지 않았지만 10장 36절말씀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0:36 “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전한 것은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고넬료를 포함한 이방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평화’를 전하셨다는 말의 의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고 있던 담을 예수님께서 허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민족이든 상관없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큰 그릇에 네 발 짐승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과 새들이 들어있었고, 베드로에게 이것을 잡아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는 그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율법에서 금지하는 부정한 음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환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허락하신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본질에서 많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사도행전 10:28 “28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건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상황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허무신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허무신 담은 그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허무셨던 벽은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벽이었습니다.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가르는 벽이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율법은 사랑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그것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라고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28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의 의미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오늘 우리는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여러 부분에서 서로를 혐오하고 헐뜯는 목소리들이 많이 들립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나 종교적인 이유에서나, 또는 세대 차이, 성별의 차이로 인해서 서로 배제하고 비하하는 경우를 흔하게 봅니다. 인터넷 뉴스의 댓글창을 보면 가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담을 허무는 일입니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오늘의 기후위기는 어떤가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 파괴되어도 된다는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이 망가지면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사회운동이나 환경운동을 하면 되는 걸까요? 그것도 좋지만, 가장 먼저는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가르는 담은 사실 실재하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누군가를 구별짓고,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생각을
느낌과 욕구
감사와 요청
사도행전 9:26-31
사도행전 9:26–31 NKSV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27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28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29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과 말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꾀하였다. 30 신도들이 이 일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다. 31 그러는 동안에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역에 걸쳐서 평화를 누리면서 튼튼히 서 갔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로 정진해서, 그 수가 점점 늘어갔다.
관찰과 해석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난다. 처음에는 그를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 두려워했지만, 바나바가 그를 맞아들이고 제자들에게 소개한다. 사울은 그 때에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지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말씀하셨던 그 정신으로 같은 것을 선포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다. 헬라어를 할 수 있었기에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과 토론도 가능하였다.
그러자 유대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사울을 죽이려고 생각한다. 이에 형제들은 이 일을 할고 사울을 다소로 보낸다.
저자는 이러한 중에도 교회가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역에 걸쳐서 평화를 누리면서 튼튼히 서갔다고 말한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평화’를 누린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평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적어도 환경과 조건에 따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에이레네’는 개인적으로는 ‘평안’, 관계 속에서는 ‘화해, 화목’,
저자는 행10:36 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다고 말한다. 관련하여 마5:9; 마10:12-14; 눅10:5-6; 요14:25; 요16:32-33; 롬5:1; 엡2:14-18;
에베소서의 말씀에 근거하면 그것은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서로를 가르는 담을 허무셨고, 모두를 화해하게 하셨다. 원수된 것과 율법을 폐함으로서 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다. 즉, 우리는 한 민족이고, 한 몸이기에 서로 갈라져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요한복음 16:33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근거로 예수님의 고난 때에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겠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있다. 이 말씀을 전하신 목적은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에 있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환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평화롭다는 역설을 말한다. 그 평화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근본이신 하나님과 함께하신다는 것, 하나이시라는 것에 근거하며, 또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세상은 진리를 배척하여 우리도 배척한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고 숨길 수 없다. 그 진리를 붙잡는 우리들은 마침내 승리한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이겨내라.
메시지
나는 평화를 전하고 있는가? 여전히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가?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시대에 나도 그것을 내재화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가는 길이 불안정하다. 비참해질 것 같은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까? 이 불안함이 나로 하여금 넓은 길로 가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또 다른 말을 해주는 것 같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불안함에 지지말고 승리를 확신하고 평안함을 누리라는 것. 너가 발견한 진리를 붙잡으라는 것.
느낌
솔직히 불안하다. 이게 내가 만난 하나님이, 이 성경의 증언이 진리가 맞는지, 내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 눈에 색안경이 껴있지는 않은지… 성경은 분명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왜 내 눈에는 길이 보이지 않는 건지.
사실 나의 고민은 두 선택지 모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로 가름하기는 어렵다. 나의 부르심이 하늘나무교회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훗날을 도모하며 안정적인 상황에서 더 성장하고 준비하는 것에 있는지에 대한 선택일 것이다.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이 사역을 지속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상황까지 이 사역을 붙잡아야 하는 걸까? 최후에 최후까지 이 사역을 붙잡아야 하는 걸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 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이 큰 역사 가운데 한 지체로서 무엇을 하도록 부름받았는가? 가장 먼저 나는 말씀이 전하는 바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나를 더 필요로 하는가? 하늘나무교회 공동체에 내가 필요한가? 잘 서있는 교회보다는 더 필요로 할 것이다. 내가 없다면 공동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내가 없어도 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면, 나는 미련은 없을 것 같다.
이 공동체가 유일한 교회는 아니다. 그래서 사라지고 흩어질 수는 있지만.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감수하는가? 목회자의 생계? 아니 그것보다..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목사 안수’의 문제다.
욕구
안정적인 삶
소명
감사와 요청
하나님 아버지, 저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이 깨달아 알기 원합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사도행전 9:32-43
사도행전 9:32–43 NKSV
32 베드로는 사방을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내려가서, 거기에 사는 성도들도 방문하였다. 33 거기서 그는 팔 년 동안이나 중풍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하시오” 하고 말하니, 그는 곧 일어났다. 35 룻다와 샤론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36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37 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38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42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43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관찰과 해석
베드로는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방문한다. 거기서 8년간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애니아를 고친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일으킨 사건을 상기시킨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돌아온다.
8년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완전을 의미하는 ‘7’이 지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욥바의 다비다라는 여제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 시신을 씻어서 다락방에 두었다.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를 불러 다비다(도르가)를 살린다. 이 일이 욥바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 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일으키신 사건을 상기시킨다.
무두장이는 바리새인의 견해에 따르면 기피 대상으로 예루살렘 입성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지낸다. 마치 삭개오의 집에 머물렀던 예수님을 상기시킨다.
적용과 메시지
우리에게는 이런 능력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람들이 보고 몰려올 만한 선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일까?
기쁜 소식의 선포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 사람을 치유하고 살린다. 우리는 이 능력을 믿고 있는가? 기적은 믿는 자들에게 일어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선언이다. 그것은 또 필연적으로 ‘예수로 사는 삶’을 의미하기도 하다. 우리의 문제들이 이것으로 인해 해결될 것을 믿는가?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가?
믿는다면 무엇을 행하게 되는가? 먼저는 우리의 정체성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관심사가 변한다. 어떻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할 것인가? 어떻게 이 기쁜 소식을 믿게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게 이 소식이 믿어져야 하며 기뻐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정녕 기쁜가?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 기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어야 한다. 우리는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와도 그만, 오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기쁘기 위해서는 나의 실재적인 문제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해결되는 경험이 있어야 하겠다. 우리를 가난하게 하고, 부자유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그 근본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기쁘지 않게 만드는가?
병자, 죽은 자, 여인, 무두장이… 아픔과 차별이 있는 그곳. 우리는 어디를 봐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의 문제로 가득한 가운데에서는 내 시선이 다른 이들을 향하기 어렵다.
나의 상황은 정녕 괜찮은걸까? 부족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괜찮지 않아보일텐데.. 하나님이 정말 책임져주실 건가?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아보기 이전에.. 내 안에 약함을 돌아보자. 그리고 그들이 용서받은 것처럼 나의 약함을 용서하자. 완벽해야 한다는, 잘해야한다는 강박을 벗어나라. 그저 너의 약함을 수용하자.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는 그런 상황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것인지, 매 순간의 현재에 집중하라. 나는 흔들리지만 잘하고 있다. 잘못되고 있다면 돌이키면 된다. 하나님은 나를 몇번이고 용서하실 것이다. 지쳤다면 쉬어라. 하나님께서는 너를 원망하지 않으신다.
느낌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아 희망적이고 기대가 된다. 이 기쁜 소식은 먼저 내 안에서 먼저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욕구
행복
진리, 하나님의 뜻
소명
감사와 요청
하나님,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거짓들로부터 우리를 자유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옵소서. 나의 부족함을 채움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함을 알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동기가 나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에 있지 않고, 충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온전한 사랑에 있게 하시옵소서. 나의 결핍은 나를 채우려 하지만, 충만한 마음은 이웃을 채우고자 합니다. 내 안에서 생명수가 흘러 넘치기 원합니다.
사도행전 10:1-8
사도행전 10:1–8 NKSV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2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3 어느 날 오후 세 시쯤에, 그는 환상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똑똑히 보았다. 그가 보니, 천사가 자기에게로 들어와서, “고넬료야!” 하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4 고넬료가 천사를 주시하여 보고, 두려워서 물었다. “천사님, 무슨 일입니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네 기도와 자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 5 이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이라는 사람을 데려오너라. 6 그는 무두장이인 시몬의 집에 묵고 있는데, 그 집은 바닷가에 있다.” 7 그에게 말하던 천사가 떠났을 때에, 고넬료는 하인 두 사람과 자기 부하 가운데서 경건한 병사 하나를 불러서, 8 모든 일을 이야기해 주고, 그들을 욥바로 보냈다.
관찰과 해석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자선을 많이 베풀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부르신다.
오후 세시쯤 그는 환상을 본다. 천사는 고넬료의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기억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베드로를 데려오라고 말한다. 고넬료는 자신의 부하를 보낸다.
천사는 고넬료의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며 자선의 행위를 소홀히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믿음은 선한 행위를 일으킨다.
고넬료가 믿었던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이었다. 그는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오후 세시에 기도를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그런 고넬료에게 응답하신다.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신다.
진정으로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된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즉, ‘소명’의 모티프다.
적용과 메시지
느낌
욕구
감사와 요청
사도행전 10:9-23
사도행전 10:9–23 NKSV
9 이튿날 저들이 길을 가다가,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때는 오정쯤이었다. 10 그는 배가 고파서, 무엇을 좀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들어갔다. 11 그는,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땅으로 드리워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12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 있었다. 13 그 때에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14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15 그랬더니 두 번째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뒤에,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서 올라갔다. 17 베드로가, 자기가 본 환상이 대체 무슨 뜻일까 하면서, 속으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서, 문 앞에 다가섰다. 18 그들은 큰 소리로 베드로라는 시몬이 여기에 묵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19 베드로가 그 환상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다. 20 일어나서 내려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거라.” 21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내려가서 물었다. “보시오, 내가 당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오. 무슨 일로 오셨소?” 22 그들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 유대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집으로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거룩한 천사에게서 받았습니다.” 23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들여서 묵게 하였다. 이튿날 베드로는 일어나서 그들과 함께 떠났는데, 욥바에 있는 신도 몇 사람도 그와 함께 갔다.
사도행전 10:24-33
사도행전 10:24–33 NKSV
24 그 다음 날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들어갔다. 고넬료는 자기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25 베드로가 들어오니, 마중 나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십시오, 나도 역시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27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와 말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28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29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부르러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반대하지 않고 왔습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오라고 하셨습니까?” 30 고넬료가 대답하였다. “나흘 전 이맘때쯤에, 내가 집에서 오후 세 시에 드리는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눈부신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기를 ‘고넬료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자선 행위를 기억하고 계신다. 32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을 불러오너라. 그는 바닷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묵고 있다’ 하였습니다. 33 그래서 나는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와 주시니, 고맙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 모여 있습니다.”
고넬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한다.
고넬료 사건은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를 꿰뚫는다. 그것은 복음이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죄인, 세리, 병자, 여인, 이방인들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계를 짓던 그 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었다.
그것은 사도들에게 이어져 민족적 경계를 넘어선다.
오늘 우리가 허물어야 할 벽은 무엇인가?
관찰과 해석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자선을 많이 베풀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부르신다.
오후 세시쯤 그는 환상을 본다. 천사는 고넬료의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기억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베드로를 데려오라고 말한다. 고넬료는 자신의 부하를 보낸다.
천사는 고넬료의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며 자선의 행위를 소홀히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믿음은 선한 행위를 일으킨다.
적용과 메시지
느낌
욕구
감사와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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