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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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진리,
예배와 진리,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장 23절로 24절 말씀 아멘,
언젠가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주문한 적이 있습니다.
없이 배가 고팠고 얼큰하면서도 육류가 들어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보리차로 빈속을 달래면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요리가 탁자에 놓이는 순간 후회하였습니다.
제육볶음인데 젓가락으로 아무리 뒤적거려도 고기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파와 파, 양배추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육볶음이 아니라 차라리 야채 볶음이었습니다.
그것을 비우고 나면서 중얼거렸습니다. “다시는 이 집에 안 온다.”
설교가 제육볶음이라면 그 안에 깃든 진리는 고기점입니다.
설교자는 받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요리해야 합니다.
교인들의 신앙과 지식의 수준에 맞춰서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고기라 할지라도 요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즐겨 먹을 수 없습니다.
요리를 잘한다 할지라도 재료가 충실하지 않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가 온전히 성경의 진리를 전달해야 합니다.
진리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
진리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
예배에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는 진리입니다.
이 예배는 단지 의무의 이행이나 어떤 사건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 곧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는 심령을 더욱 굳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갈망을 상실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신자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말씀으로 영원히 깨어나면 즉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영혼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를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5년, 10년, 20년, 30년씩 예배를 드렸지만 회심의 징표조차 없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의 감격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를 나눌 때 그 기준은 교회 출석이 아닙니다.
예배 참석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회심했는가 그리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그분의 성품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단지 감정적인 흥분이나 정서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자기를 잊어버리는 이방 종교의 엑스터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지식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깨닫게 하신 신령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마음의 감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감화는 은혜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말씀 없이 찾아오시는 법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실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알리셨습니다.
그때 천사는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 파송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온 것입니다.
“보라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오.”(눅1:31-32)
요단강 강변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받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는 분명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 3:17)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증거하고 있는 사울의 회심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셨고 거기에서 이루어진 만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
사울은 일생일대의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단지 신비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체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말씀이 있습니다.
만남은 하나님의 교훈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 배우기를 원하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고 싶다는 것입니다. 영적 체험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말씀의 체험입니다.
말씀 체험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신비 체험을 했지만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룩해지려는 노력도 없고, 주님을 닮아가는 기쁨도 없습니다.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요?
신앙은 불꽃입니다. 불은 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빛도 필요합니다.
뜨거운 열정뿐 아니라 분명한 지식도 필요하지요.
신령한 체험도 중요하지만 진리가 아니면 우리를 붙들어주지 못합니다.
말씀에 붙들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체험을 해도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예배에서 진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다리입니다.
설교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다리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거기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리가 없다면 아무도 건널 수 없습니다. 말씀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목회자들과 함께 원어 성경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함께한 이들 가운데 이단에 속한 교파의 교역자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교역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원어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자기 교주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확신이 깊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뭐야 뭐 때문일까요? 성경적 확신이 아니라 이단적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을 보아도 올바른 가르침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가 선포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더 멀어질 뿐입니다.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는 일 없이는 올바른 이 예배가 드려질 수 없습니다.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들려져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상 중에 지시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시키는 선지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이적보다는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곳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예배 시간에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증거되는 말씀을 통해서 예배자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설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지만 (구두로)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설교의 권위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지만(롬1:2),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전까지는 공개적으로 또 구두로 선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록의 집(pen house)이 아니라 선포의 집(mouth house)이다. 신약과 복음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니 살아있는 목소리와 입술로 선포되고 촉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으셨다. 또한 기록하라고 명하지 않으시고 선포하라고 명하셨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글자와 음성으로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보았습니다.
성경 해석하는 설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과 그분의 왕국을 증거하는 두 증인이 있다. 하나는 성경 곧 철자로 이해되는 말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음성 곧 입술로 선포되는 말씀인데, 바울과 베드로는 이 말씀을 빛과 등불이라고 불렀다(고후4:4, 벧후1:19). 빛이 비치지 않고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5장 3절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신약은 구약을 열고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의 모든 설교는 그야말로 성경에서 출발하였고 성경에 근거한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도 비슷한 견해를 보입니다. 파커(T.H.L.Parker. 1916-2016)는 이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하여 제시합니다.
성경은 확정적이고 주권적인 반면 설교는 파생적이며 종속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의 설교에 맞추어져야 할 필요는 없으나 설교는 성경에 일치하여야 한다. 정확히 말해서 설교의 영광이란 성경에 대하여 파생적이고 종속적인 지위로서의 겸손함에 있다. 칼빈에 따르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위를 성경으로부터 차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설교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설교, 예배자들의 마음, 그 위에 내리시는 성령의 은혜,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됩니다.
예배를 모세가 신의산에 올라가는 것에 비유해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마음과 의복을 정결케 합니다.
모세는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올라갑니다.
드디어 산에서 하나님을 뵙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 줍니다. 백성들은 거기서 거룩한 헌신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 예배가 그런 것입니다.
예배에서 설교의 위치를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곳에 어떻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을 받고 그로서 영적 변화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 변화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합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 아주 맑은 샘물이 있습니다. 그 물을 퍼다 사람들에게 순수한 상태로 나누어 주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운반 과정에서 오염의 요소가 없어야 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진리입니다. 모든 설교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사람이 전하는 설교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진리가 올바르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간구하십시오.
교회에는 언제나 순결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예배의 어려움도 함께 있었습니다.
진리의 빛이 사라지면 언제나 어두움의 영들이 활기를 칩니다.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마음은 미신과 오류가 깃들기에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설교가 예배에 꽃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임하는 은혜는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이해가 이성을 통한 것이라는 것이든지, 믿음을 통한 것이든지 아는 것과 은혜를 받는 것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물리적 폭력이나 신비로운 힘이 아니라 지성의 설복을 통해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승복하게끔 인도하십니다.
설교를 통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변화시키고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순수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심판과 위로를 포함해야 합니다.
죄인을 향한 진노와 용서하시는 자비를 함께 보여주어야 합니다.
모든 설교자는 위로하는 자인 동시에 죄를 깨닫게 하는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 이 예배자들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설교는 알아듣기 쉽고 평이해야 합니다. 이 점에 관해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자신의 책 [참된 목자](The Reformed Pastor)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양무리를 가르칠 때에 그 가르침은 쉽고 단순해야 한다. 훌륭한 대의를 널리 펼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쉽고 일반적이며 완전히 이해되도록 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성경 말씀과 설교가 동일한 가르침의 선상에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과 성경 해석, 그리고 설교 사이에는 진리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결코 현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는 진지해야 합니다. 지나친 유모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을 감추고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드러나게 하려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깨달은 성경 말씀을 친숙한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미 적용했고 스스로 실천했기 때문에 체화된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자신이 소화하지 못한 내용을 전달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과장이나 꾸밈으로 말씀의 본뜻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맺음 말
맺음 말
오늘날 예배는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위기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설교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곧 설교자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성도들에게도 기도를 촉구합니다.
설교의 회복 없이는 예배가 회복된 적이 없습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전하고자 하는 말씀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예배의 영광은 회복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합니다(요4:23).
그리고 이를 위해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