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버려두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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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버려두심의 이유
주제: 분주한 삶 가운데 내버려진 것 같은 의심이 들 때, 내게 믿음 있음의 긍휼을 발견하고, 악한 세상에 긍휼을 베풀어라.
목적: 숨을 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도 감사하게 하소서.
1970년대에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습니다. 신학생들에게 신학생이 되기로 한 동기를 묻는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게 한 후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짧은 설교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건물의 스튜디오에서 설교를 하고 지도교수님에게 평가를 받아야 했죠.
그런데 실험의 목적은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이 학생들이 건너편의 건물로 넘어갈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좁은 길이 있었는데, 연기자를 한 명 섭외해서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처럼, 가난해 보이는 옷차림에 기침을 하며 발작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학생들이 이 연기자를 보고 아무도 없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는 거죠. 어떤 신학생들은 이 연기자를 돕고 119도 부르고 최대한 도와줬다고 해요. 그런데 어떤 신학생들은 본채 만채 하고 지나갔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좁은 길이라 그 연기자를 밟고 지나간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신학생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교하러 가는 신학생들이었다는 게 충격적이었던 거죠.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분석해 보았더니,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무엇이 원인이었냐면, 바로 ‘시간’입니다. 어떤 학생들한테는 설교 발표까지 1분도 안남았다는 다급한 상황을 만들었어요. 이런 사람들의 고작 10%만 길 연기자를 도왔다고 해요. 반면 시간적 여유를 준 그룹에서는 63%가 그 연기자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실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언제 서로를 돕지 않을까요? 그 사람이 악해서일까요? 성격 때문일까요? 이런 요인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바쁘게 만드는 상황적 요인 때문”입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악’을 편만하게 만든다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우리의 악함이 있습니다. 직장과 가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바쁜 삶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우리는 이러한 악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복음화가 되어야 하는데, 바쁜 삶 때문에 우리가 나 자신을 포함한 주변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잘 가고 있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죠. 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목사인 저는, 여름성경학교 등 당연히 바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제 주변을, 특히 가족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힘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목회자에게 시집 간다고 한다면 부디 재고해 보세요. 오늘 이 문제를 말씀을 통해 풀어보겠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율법교사가 자신이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향하는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은 강도 만날 위험이 도사리는 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환경이죠. 결국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하고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집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하지만 그냥 지나칩니다. 그들에게는 정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런 더러운 피해자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종교적 명예였고 권위였기 때문이죠.
그 뒤에 여행 중이던, 특정 목적지 없이 그저 길을 따라가던 사마리아인이 등장해 그 피해자의 상처를 싸매고 주막에 데려가 밤새 돌보고 주막 주인에게 숙박비도 대신 지불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잖아요. 이 사마리아인은 선할까요? 이웃을 도왔으니 당연히 선행을 베푼 것 아닌가요? 유대인들에게는 “합법적으로”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7백년 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했을 때 앗수르가 자기 주민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전통을 모두 잃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않는, 율법대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여기가 율법교사가 충격을 받는 지점입니다. 경멸의 대상인 사마리아인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충격을 받은 겁니다. 내가 만약 강도 만난 피해자이었다면, 나의 이웃이 그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지금까지 자기가 사마리아와 구분 짓는 율법을 잘 지킨 자부심이 무의미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교훈은 단순히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돕자”는 윤리적인 강령을 뛰어 넘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나는 그 “길”, 강도가 위협할 수 있는, 악이 편만한 구조와 환경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습니다. 나는 강도 만난 자처럼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그런 줄 몰랐습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든 율법을 지킨다고 자신했습니다. 자기가 옳은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율법 행위로 ‘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교사에게 악은 피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옳지 않은 것은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강도 만난 피해자를 도울 수 없습니다. 이웃 사랑을 못지킵니다. 왜? 자신의 명예를 잃게 됩니다. 모든 종교적 존경을 잃게 됩니다. 가문에서 쫓겨납니다. 사마리아인도 지키는 율법의 한 계명을, 레위인인 내가 못지킨다는 것은 수치입니다. 율법교사는 결국 자신이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악한 환경에 놓여진 그 강도 만난 피해자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각성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한 모습을 보고 정의로운 분노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악한 것은 사라져야 한다며 늘 화를 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라며 조롱합니다. 내가 넘어질 때면 날 왜 이렇게 지었냐고, 내 환경은 왜 이런 모양이냐고, 하나님을 탓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강도 만난 피해자처럼 상처가 아무리 곪아 터져도, 다 죽어가는데 내버려두시는 것 같은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악한 세상에 두셨을까요? 우리의 고난과 상처가 왜 곪아터져도 내버려두실까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긍휼이 무엇인가요? “짐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피해자가 길에 그렇게 버려진 이유는 사마리아인을 통해 긍휼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과 같이, 각종 경멸을 받으시며,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십자가의 여행을 따라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는 이유는 그 죄악의 권세를 이기신 이 십자가의 능력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수가 없습니다.
물론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죠. 하지만 흥분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겐 긍휼이 예정되어 있잖아요. 세상에서는 옳은 걸 이루기 위해서 많은 경우 비열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절망은 우리가 절대로 율법교사처럼 모든 옳은 것을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나약함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시작됩니다. 히 4:15-16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우리를 악하게 만드는 분주한 세상을 극복하는 법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상처를 싸매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분주한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여러분을 흔들어도, 여러분이 그래도 이래도 아직도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 그래서 주님께 나아가서 긍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이미 영생을 얻은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영생의 증거를 우리가 어떻게 붙들 수 있는가, 우리가 긍휼을 얻었다는 믿음의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서 이와 같이 하라”입니다. 우리를 긍휼을 베푼 사마리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아까 읽은 롬 11:32 전에 3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9:23절 이하에는 좀더 명확하게 나옵니다.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5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우리 주변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복음화의 열매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언제 이루어지냐면 내가 지음받은 목적대로 행동할 때입니다. 신발의 목적은 발을 보호하는 것이죠. 그 목적대로 신발을 신어야 신발이 제 기능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교사처럼 “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로, 악이 도사리는 길 위로 나아가서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곳이 직장이건, 가정이건, 또는 나 자신의 연약함이 됬건, 그것은 피할 것나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긍휼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분주함과 바쁨을 이웃에게 긍휼을 전하는 것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세요. 미운 자식에게 맛있는 밥 한끼 베풀어 주시고, 날 괴롭히는 직장 선후배가 있다면 긍휼히 여기셔서 커피 한잔 대접하세요. 우리가 긍휼을 받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개인적으로 감사한 부분은, 저희 처가 식구들이 모두 믿지 않으시는 분들이라는 겁니다. 처갓집에 가면 저는 정말 강도 만난 피해자같게 됩니다. 거기서 전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래서 제 간절한 기도제목은 처가 식구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거기서 제 아들 밥 먹일 때마다 식기도 할 때 의도적으로 소리 내어서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처갓집에 가면 밥 먹기 전에 항상 기도하는 모습을 식구들에게 보여주는 게 반복되다 보니, 처가 식구들이 먼저 제 아들한테 “밥 먹기 전에 기도해야지!”라고 합니다. 본래 기독교에 친화적이지 않았던 식구들을 잘 아는 아내가 항상 놀라고 있습니다. 장인어른은 갑자기 찬양을 찾아서 듣는 경우가 많아지셨습니다. 어제는 처형님이 “왜 밥 먹기 전에 기도 안하냐”고 꾸중하기도 했어요. 비록 제 아들이 아직 많이 어리다는 치트키가 있지만, 기독교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에 제 아내가 많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섬기는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이렇게 쓰임받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 16:3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로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잘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의심되실 때, 이 약속을 붙드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지만 악한 세상 속에서 늘 갈등하고 씨름하는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 여러분의 주변이 구원을 얻고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 속에서도 긍휼을 베풀 줄 아는 구원의 능력을 맛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는 귀한 성도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