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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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스가랴 8:1-15
본문 : 스가랴 8:1-15
오늘은 금식이 기쁨의 절기로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와 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로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모습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증한 이방종교와 이방문화들을 혼용하여 수시로 우상들을 섬겼고 또 성전과 제사를 더럽혔습니다. 또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 아니라 억압하고 짓누르고 괴롭게 하는 짓들을 저질렀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죠. 그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기로 정하시고 70년간 바벨론의 포로가 되도록 뜻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14절에보면 개역개정에는 생략되었지만, 14절의 끝자락에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라는 말이 생략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두번씩 말을 반복하는 것은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 입에서 내뱉은 말씀에 대해서는 반드시 뉘우치지 않으시고 행하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로 넘어오게 되면, 어떻게 시작하고 있냐면 개역개정에서는 이제라고 시작하지만, 원어로 보면 켄이라는 말로, 마찬가지로, 그처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바벨론에게 포로로 넘겨주신 것도 하나님의 강한 의지로 행하신 일이지만 마찬가지로, 15절에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예루살렘과 유다족속에게 은혜 베푸시기로 뜻을 고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고집하시는 일, 하나님이 반드시 행하겠다고 하시는 일에 대하여 누구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실까요? 그들은 위축된 상황 속에 놓여있습니다. 이전의 이스라엘의 영광은 사라졌고 모든 사람들 마음은 위축되어 있고 낙심하고 있고 그들으 성전을 짓는 일들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언제 찾아올까요? 교만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현실이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현실을 보더라도 담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가 현실을 해석하는 문제에 아주 밀접하게 영향을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교만은 어떤 가능성을 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지을 수 있을까?.. ) 내가 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무엇인가? 가능성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또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에수님은 굶주린 그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가져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빌립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저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을 나에게 두게 되니까 두려운 것이고 막막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지 않습니까? 처음 물위로 오라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자신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없었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저 주님의 능력에 가능성을 두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도중에 왜 넘어졌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의심했다라고 합니다. 무슨 의심일까요? 내가 또 한발을 걸을 수 있을까? 뭐가 생겼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가? 자신에 대한 가능성이 그를 넘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나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긍정적인 부분도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정확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너희는 어떤 것도 책임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기독교 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능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입니다.
14절과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평생에 이스라엘의 무엇과 씨름하시는가? 교만과 씨름하시는 것입니다.14절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졌을 때, 인간의 가능성으로, 인간의 최선으로 빚어낸 결과가 무엇인지 맛보게 하셨습니다.재앙이었습니다. 15절에 그들이 교만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지자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평생에 우리의 교만을 다루어가실 것입니다. 나에게 가능성을 두고 내가 책임지려하는 삶의 방식들이 점점 변하여 나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주님께 모든 가능성을 두고 살아가도록 이끌어가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때론 우쭐할 때에는 깎으시는 때도 있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는 나의 가능성에서 주님의 가능성을 보게하는 그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다시 그 영광을 되찾아주겠다 말씀하신 것이죠. 그러면 이어지는 말은 내가 너희를 이러이러하게 인도할 것이고 누구도 너희를 대적하지 못하게할 것이고 내가 너희를 영원히 복되게 할거야라는 말이 뒤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그런데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겠다고 하시고 그 방식은 무엇인가? 우리의 순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주님과의 관계에 높은 담이 쌓여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서도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하도록 우리를 버릇없이 만드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순종이라는 그릇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고난없이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모든 복은, 예수님과 나와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그 온전한 관계는 반드시 순종을 통해서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서 예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순종을 통해 주어진다라고 우리들에게 전수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시고, 주님과 더 친밀해지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순종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부름에 응하는 사람만이 내 인생을 경영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16절에 이스라엘이 순종할 내용은 잉렇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6절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 서로 진실을 말하여라. 너희의 성문 법정에서는 참되고 공의롭게 재판하여, 평화를 이루어라. 17절 이웃을 해칠 생각을 서로 마음에 품지 말고,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이스라엘의 재판은 성문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무엘하에 보면 압살롬이 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송사를 봐주던 자리가 어디였는가 하면 성문 앞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문 앞에서 재판을 진행할 때, 진실을 앞세우고 공의롭게 재판할 것이며 17절에 넘어가면 이웃을 해칠생각을 품지 말고 거짓 증언하기를 즐겨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7장으로 거슬로 올라가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명령하셨던 내용 중에도 비슷한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7:9–10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여기서도 보면 하나님은 진실하게 재판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장과 8장은 동일한 명령이 떨어진 것 같지만 몇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표로 정리했는데요. 7장에는 진실하게 재판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8장에서는 무엇이 더하여 졌는가 하면 진실하고 화평한 공의로 너희 성문에서 재판하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7장에서는 진실을 말하고 정의로 백성들을 재판할 것을 말했다면 8장으로 넘어가서는 진실과 정의로 재판하되 화평을 도모하고서로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중재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방금 막 서로가 손가락질하면서 싸우고,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하던 사람들더러, 서로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겨야할 말씀은 무엇일까요? 진리를 분별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도 교회가 응당 지켜야할 일이지만 거기에서만 멈출 것이 아니라 서로가 화평하고 하나되고 사랑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공동체로서 붙잡아야 할 가장 고급하고 가장 영광된 본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정의를 넘어 사랑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분, 정의, 올바름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말하자면 남들이 다 하는 술수과 속임수와 편법을 버리고 정의를 따라 행하는 것도, 신자로서 많은 수준을 요구하는 미덕입니다. 그러나 정의를 넘어서 사랑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수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두가 이전까지는 꾸역꾸역 올 수는 있습니다. 인상을 써가며 눈물을 삼켜가며 정의를 세우는 자리에는 올 수 있지만, 나보다 비겁한 저 사람을 용서하고 품어주고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서는 대부분 나자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 깨뜨린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이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킬 그 성전,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킬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엇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시는가? 화평과 사랑의 법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올바른 재판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넘어 방금 막 싸움을 싸운자들이, 방금 막 갈등으로 인하여 갈라진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품어줄 수 있는 그 단계를 완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분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 그 사랑의 능력들을 회복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연습하는 공간이 어디인가 하면 가정이고 교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모든 사람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들은 오늘 내가 사랑을 실천하라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계속해서 새벽예배자에 관하여 듣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며 부르짖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성대로 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만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 여러분, 나에게 보내주신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지 생각해보며 기도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18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스가랴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넷째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화요일에 부목사님을 통해서 이 네가지의 금식, 넷째달, 다섯째달, 일곱째 달, 열째 달의 금식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배웠습니다. 모두다 무엇을 기억하기 위한 금식이였습니까?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수치를 당했던 그 치욕적인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금식이었습니다. 이 금식이 예루살렘 멸망 이후 무려 70년 동안 진행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이 행하는 금식과 애통함이 오늘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무기력함에 얽매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19절에 보면 변하여에 동그라미를 쳐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수치가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이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상처가 간증이 되시고 지나간 아픔이 노래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과 상처를 사용하셔서 기쁨과 즐거움과 간증으로 바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다보면 예기치 못한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만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 살아가다보면 바보같이 실수하고 넘어지고 일을 그르치는 부끄러운 순간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면, 슬픔을 통하여 상처를 통하여 기쁨으로 열매맺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고난없이도 슬픔없이도 상처 없이도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우리의 삶에 때때로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순간들을 통하여 주님의 빛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