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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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오늘 이 예배의 자리 가운데 나아오신 여러분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부르심 앞에서 선택
본론1
본론1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거기 가서 그들의 죄가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고 어서 회개하라고 외쳐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주십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해주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요나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다보면 그런 생각들을 하게되곤 합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내 생각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어떤 이들은 그렇게까지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신다고만 한다면 나 뭐든 순종할 수 있다고, 그 음성을 내가 직접 들을 수만 있다면 나 그게 뭐든 기꺼이 순종할 수 있다고.
지금 내가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수도 있어서 그래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네, 어떻게 보면 십분 맞는 말인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기사들을 통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로 눈 앞에 보여도, 뒤 귀에 직접 들려도 우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불순종의 길을 걸어간다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셔도 홍해 앞에서, 위기 앞에서 언제나 불순종만을 택하는 우리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셨건만 요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직접 보여주시고, 직접 말씀해주시는 것과 우리의 순종 여부가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보여줘도 못 따라갑니다. 말씀해주셔도 듣지를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무언가 다른 음성에 귀 기울이고 싶어합니다.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찾는 것일까요?
한국의 한 목사님께서 설교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부러워 한다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들었던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서 부러워한다고 그런데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면,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이 우리에게 뛰어와서 물어볼거라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은 어떤 삶이였냐고. 하나님이 늘 그 안에 계셔 함께하는 삶은 어떤 삶이였냐고, 정말 매순간 가슴 뛰고 신이나는 삶이였냐고 말입니다.
네, 오늘 날 우리 성도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는 언제나 성령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신다 라는 사실 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언제나 함께하신답니다.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여주시는 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을 보며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하여주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나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책을 펼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항상 함께하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항상 함께계셔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그분의 선하신 뜻 가운데로 인도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그분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주저하지 말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광주동광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가 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2
본론2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나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바보같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나아가야지 그러지 못하고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속이 막 답답해집니다.
네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렇습니다. 굉장히 답답합니다.
그 경기를 직접 뛰고 있는 선수가 아니라 저 밖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면 그 선수가 하필 그 중요한 순간에 실책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그 자리에 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야구경기만 해도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멀리서 지켜볼 땐 그거 별것도 아닌것 처럼 보여도 직접 해보려고 그라운드 위에 서면 그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나의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관중석에 앉아 요나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속 터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나가 되어서 그 자리에 선다고 생각하면 그 요나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이고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앗수르는 서로 원수지간입니다.
훗날 요나 시대로부터 약 40년 뒤에 이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요나의 입장에서 니느웨는 하루 빨리 망해버려야 하는 도시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한창 일본과 전쟁 중이던 그 시기에 일본에 가서 선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 가서 선교하면 그게 무슨 의도가 되었든 간에 누군가는 충분히 나를 매국노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가고 싶지가 않지요.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제가 교회의 집사이지만, 하나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목사지만, 장로지만, 전도사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다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여기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해를 넘어 선 하나님의 뜻은 바로 당신이 그곳으로 가는 것 입니다.
이십대 초에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찬송가지요
이 찬송가의2절 가사는 더 뼈저립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우리 다 그렇게 고백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고백할 때면 그때는 진짜로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데 막상 아골 골짝이 찾아오면, 이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바로 어제 그렇게 다짐했어도 오늘 우리의 눈 앞에 아골 골짝이 나타나면 주님, 쟤가 여기 있나이다. 쟤를 통해 일하여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설령 그 자리에 가서 실패할지라도 나를 대신해 니가 가주었으면 하는 그 자리가 있습니다. 쟤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가주었으면 하는 그 자리가 있습니다.
네, 우리가 거기 가면 매국노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 걔네가 무슨 짓을 했는데 어떻게 거기를 가냐며 생각만해도 속이 터지는 그 자리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다 죽어버렸으면 하는 그 곳, 그 자리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제발 여기만큼은 하나님이 안 보내셨으면 하는 그 자리. 제발 여기만큼은 하나님이 모르셨으면 하는, 못 본척 해주셨으면 하는 그 자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그 자리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지금도 바라보고 계시는 그 자리 애써 외면하지 맙시다. 아프다고, 어렵다고, 힘들다고해서 저기 마음 한 켠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지 맙시다.
만일 그 곳에,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영혼이 단 한 영혼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께서 지금도 마음 아파하시며 바라보시는 영혼이 단 한 영혼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우리 그 자리 끄집어 냅시다. 꺼내놓고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봅시다. 우리가 꽁꽁 숨겨 놓았던 그 자리, 애써 외면했던 그 자리,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 그렇게 결단하는 분들이 나오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한 번 순종해 봅시다.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우리 집에 있는 원수같은 그 사람에게 우리 한 번 나아가봅시다. 쳐다도보기 싫은 그 공동체 안으로 아버지의 마음 품고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피워내봅시다.
그 곳에 가면 내가 죽을 것 같고,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질 것 같은 바로 그 자리로 나아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헤아려 봅시다.
그것이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면, 우리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봅시다.
반드시, 반드시 하나님께서 일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비록 그 길이 형통의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자리가 모두가 열광하는 자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바로 그 곳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동행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3
본론3
3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닳을 수 있게 되는 바.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다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망하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다 저주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고자 욥바로 내려갑니다. 그 곳에 도착해서 항구에 가니까 마치 요나가 여기 올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 마냥 다시스로 가는 배가 짠 하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때 당시에 배편이 자주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요나가 미리 예약을 해놓을수 있는 그런 예약 시스템도 없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상황과 여건이 요나가 다시스로 수월하게 갈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결코 가볍게 넘겨선 안 될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잘 풀릴 때, 그 때가 바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때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내가 바라는 나의 생각과 나의 뜻인지. 우리는 멈춰서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3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요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욥바로 갔는데 그곳에서 마침, 너무나도 기가막힌 타이밍에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일이 너무나도 수월하게 잘 풀리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것 같습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박수쳐주고, 격려해줍니다.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그 길로만 쭉 가면 된다고. ‘아, 하나님도 어느정도 이 길을 지지해주시는구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길들이 열립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요나에게 열린 다시스로 가는 가장 형통한 길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게되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지게 되는 가장 비참한 길이 됩니다.
요나에게 있어 일이 잘 풀린 것이 오히려 요나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다음 시간들을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가장 절망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오히려 요나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서게 되는 축복의 자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습니다. 물고기 뱃속이라는 가장 절망스러운 자리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마주하게 되는 축복의 자리가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축복입니까? 무엇이 저주입니까?
기도도 안하고 예배도 안드리는데 우리 자녀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정 반대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이 형통하다면, 네, 얼른 그 배에서 내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결단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미 올라탄그 배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니느웨로 갔으면 그나마 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 탄 시점에서 그거 다 포기하고 그 배에서 내려온다라는 것은 앞선 것 보다 더 큰 결단을 요구합니다.
애초에 니느웨로 가는 배 탔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었을건데, 다시스로 가는 배 올라 타서 앞으로 승승장구할 것 다 생각해 놨는데 그거 다 포기하고 배에서 내려야 된다고 한다면 이건 더 큰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축복고 무엇이 저주입니까.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저주입니까.
하나님의 뜻 따라간다고 하면서 그 안에 은근슬쩍 내 뜻 다 집어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부흥성장하고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더 큰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찌되었건, 그 안에 내 생각, 내 마음, 내 뜻 들어간 건 맞지만 어쨌든 그렇게 부흥성장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한다면,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타기 위해 지불한 배 삯이 있습니다. 이 때 당시 배 한 번 탈 때 드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초에 그 배 안 탔으면 괜찮은데, 이미 비용 다 지불하고 출발한지 오래입니다. 여기서 내리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지금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풍랑을 통해서, 그 배에 탄 선원들을 통해서, 제비 뽑기를 통해서 지금 네가 잘못가고 있다는 것을, 그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임을 가르쳐줍니다.
내가 잘못 가고 있구나, 내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구나 라는 이 깨달음 앞에서 요나가 한 결단이 바로 배 위에서 뛰어내린 것이였습니다.
혹자는 요나가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고 묘사하는데, 충분히 저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모르는 척 하고 내가 탄 배와 함께 침몰하기를 선택합니다. 차라리 망하더라도 내가 한 선택을 돌이키는 것은 죽어도 못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풍랑이, 선원들의 다급함이 자신을 돌이키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배에서 뛰어 내리기로 결단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요나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