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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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유한함, 부활의 소망
인생의 유한함, 부활의 소망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시작하며
시작하며
오늘 함께 나눌 욥기 13장, 14장은 소발의 이야기에 대해서 욥이 대답을 하는데 그 답이 12장부터 14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소발이 욥에 대하여 너무 교만하고 말이 많다고 이야기를 하자 욥은 아주 더 긴 말로 답을 해준 것입니다.
12장에서 욥은 소발과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분명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너희도 알 것이다. 나도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너희만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나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판단이나 심판이 아니라 위로이며 침묵이라는 것입니다.
세 친구들이 욥을 향하여 한 말은 이미 욥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편적 지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의롭고 복받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과 문제들이 욥을 힘들게 만들고 절망에 빠지게 했지만 가장 큰 고통은 이제 껏 믿었던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으로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이러한 순간에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거두어 가신 것도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제 13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3장을 살펴보고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있는 14장으로 넘어 마무리를 지어 보려고 합니다.
아는척 하지 말아
아는척 하지 말아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먼저 1절부터 12절은 욥이 계속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규범적 지혜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을 합니다. 1절에 보면 이러한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단순히 지식으로 알고 있는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해서 규범적 지혜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법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너희들이 말하는 규범적 지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어떠한 특별한 경험 통해서 주어지는 지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기본적인 법칙과도 같은 것이라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쭈욱가서 12절에 보면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말씀합니다. 격언은 히브리어 “직카론”을 번역한 것입니다. “너희의 기억”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상이 전해주는 지혜를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학습법인데요. 그것이 재-이페르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죠. 또한 이페으로 같은 선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토성이라고 말합니다. 크신 하나님 비하면 천한 인간을 상징을 하는 단어로 “재” “토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네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특별한 것도 아니고 비밀스러운 지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처럼 알 수 없는 고난을 맞이하게 될 때 보통 그 당사자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님들, 우리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님들, 한국 교회 신앙의 선배님들, 그리고 여기에 계신 분들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고난을 당했을까요? 그 고난을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잘 지키고 있던 자들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러한 자들 앞에서 아는 척 하고 있으니 욥이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그 지혜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4,7절에 보면요. 욥은 친구들이 ‘거짓말 퍼뜨리는 자들’이고 ‘돌팔이 의사’일 뿐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판단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만한 죄를 저질렀던 것을 본적도 없고요. 욥의 자녀들이 죽임을 당할만한 죄를 지었는지 그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4절 후반절의 표현이 너무 재밌습니다.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히브리어로 “로프에이 엘릴”인데요. “헛된 치유자”라는 뜻입니다. 원래 욥의 친구들이 방문은 위로였는데 욥의 상태를 고치려는 것으로 변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상태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없습니다. 병을 고치려면 원인을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욥이 고난 받은 이유를 누구도 알 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을 고치려고 하고 있으니 그들이 “헛된 치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8절, 11절에서 굉장이 중요한 부분을 언급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원래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헛되 치료자들로서 고난 당하는 욥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자신들 알고 있는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 없는 자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 하나님을 변호했던 것입니다. 7절과 8절의 말씀을 읽어 볼까요?
욥기 13:7-8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불의를 말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사기를 치는가? 자네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어 그 분을 위해서 변호를 한다는 것인가?
욥은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대하여 변호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대하여 변호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뿐더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약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믿는 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바라보고 믿는 것이 믿는 자들의 올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의 자신의 드러내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십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그들의 지식과 앎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은 본것을 그대로 말 할 수 있지만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하나님의 대하여 변호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현재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현재 욥의 겪고 고난과 하나님의 행하심은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또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관으로 알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자신의 지식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변호하려는 것 자체가 불경 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11절입니다.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 멈춰라, 천번을 받을 사람들아,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그러면서 욥은 이러한 상황에서 최고의 지혜는 침묵이라고 말합니다. 답이 있더라고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답을 내려고 합니다. 나의 문제도 그러하고 타인에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오늘 욥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때로는 특히, 알 수 없는 고난을 맞이 할 때는 침묵하는 최고의 지혜이다.” 지난 주에도 이야기 드렸죠? 우리는 많은 알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지식”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그 유일한 지식만 있으면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지식은 바로 에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우리에게 분명한 것도 없으며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경험이나 전통들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엎어버리기도 합니다.
금요일에 설교 할 내용이기도 한데요.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를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다말이 등장하는데요. 창세기 37장과 39장 사이를 보면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는 이야기 사이에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고대라 할 지라도 시어바지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난 아이의 이름이 베레스인데요. “헤치고 나옴”을 의미를 가집니다. 나중에 다윗의 조상이 되고 그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오게 됩니다.
고대에도요. 현재에도요. 이 관계는 용납이 안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 지식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관으로 완벽하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 다 아는 척 -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의 의미)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되는 고통 가운데 모르면 모르다고 해도 되고요. 침묵해도 됩니다. 굳이 답을 말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의 지식만 있으면 됩니다. 할렐루야
제발 입을 다물고 내 말을 들어라
제발 입을 다물고 내 말을 들어라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그래서 욥은 13절에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잠잠하고” 제발 입을 다물고 자신을 내버려 두라는 것이죠. 14절이 난해 구절인데요.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어떻게 내가 내 이빨로 내 살을 뜯어 먹을 수 있겠으며, 내가 내 손으로 어떻게 내 목을 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인데요. 내가 아무리 고난 가운데 있으지라도 어리석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죄인이거나 어리석은 자가 아니니 제발 입을 다물라는 것입니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인 것 같으니 그 앞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은 어떠한 일들은 가끔은 도저히 이해 안되고 판단이 안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볼 수 없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인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어찌 알고 판단 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모든 판단을 겸손히 맡겨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입장에서 오히려 죽음이 더 나은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면 자신을 잘 아는 하나님께서 직접 신원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욥은 자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고난이 자신의 죄때문에 오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현실은 저주 받은 자의 모습이니 이 괴로움은 끝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의 호소 -
욥의 호소 -
그래서 욥기 13장 20절 부터는요. 하나님을 향한 욥의 호소 또는 기도가 이어지게 됩니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20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 그리하며 내가 주님을 피하하여 숨지 않겠나이다.”
그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부디 하나님의 손으로 치신 고난과 고통이 물러가게 하시고 이제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이 기도가 어떻습니까?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내 능력 밖에 고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할 수 밖에 없는 기도 아닙니까?
그래서 욥의 이야기는 먼 옛날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욥을 보면서 그에에 찾아온 고난이 너무하다 생각이 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요? 여기에 계신 성도님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 보다 더한 일이 찾와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각 사람이 겪는 고난이라는 것. 고통이라는 것. 크기를 비교 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자기가 겪는 고난과 고통이 가장 큰 법입니다.
타인은 쉽게 판단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있으면 어떠한 고난과 고통이라도 크기가 가늠이 안되는 법 입니다. 우리가 이 지구라는 곳을 밖에서 봐야 크기를 알 수 있지 이 안에 있으면요? 지구의 크기를 절대로 가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집니다. 고통 속에 있으면요. 고난 안에 있으면요. 특히 욥처럼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고난 가운데 있으면요. 그 고난의 크기를 가늠 할 수 없게 되고요. 죽음의 상태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아지는 상태. 무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민낯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게 되면 … 자신의 죄와 허물이 무엇이냐 물어 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종적인 외침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을 잘 못 하였습니까? 이 고난을 거둬가 가 주세요! 나와 함께 해주세요.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14장으로 넘어가서 욥의 대답이 마무리가 됩니다. 14장의 전체 내용은 간단합니다. 이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13장 20절부터 시작되는 욥의 호소가 계속되는 것이죠.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짧은데 그 짧은 삶 마져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피었다가 금새 시드는 꽃과 같고 한번 지나가면 사라지는 그림자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5절에 말씀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과 악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의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6절에 보면 “그의 날을 마칠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라는 표현이 있는데 죽게 해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13절에는 “스올에 감추시며” 이것도 죽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고통을 끝내는 방법이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나무는 비록 찍혀 죽더라도 물 기운으로 다시 새 생명을 얻게 되는데 인간은 죽으면 끝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죠. 그런데 욥은 그 끝에 가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 라고 호소 할 정도의 상황에 처해 본 경험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 곳에는 오늘 본문의 욥의 호소가 이해가 되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이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 주세요. 이 고난 가운데 있기 보다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욥의 솔직한 마음은 14절인 것 같습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아무리 힘이 쎈 사람도 죽으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이길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살고 싶다는 고백일 것이고 이 고난을 끝내주라는 호소일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욥의 호소를 우리는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고난 중에도 살기를 원합니다. 죽음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통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어떤 것도 변화 시킬 수 없으며 단지 땅의 먼지로 돌아가는 뿐이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세상을 능히 살아낼 수 있는 능력 주시는 통로가 되시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살아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이러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호소는 고난 받는 사람의 원천적인 호소이며 자연스러운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호소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내가 살기를 원합니다. 여전히 고난 중에 있지만 그 고난을 헤쳐 나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고난과 고통. 죽음까지도 이기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마무리
마무리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욥의 소발의 답에 길게 답을 하지만 이렇게 요약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대로 일하시는 것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은 그 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괴롭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가르치고 판단하려 하지말고 위로해주어라”
이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이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 고난을 감내하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낫습니다. 죽어서라도 내가 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으면 다시 살아 날 수 없으니 이 고난이 거둬지기를 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도 미천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는 것이 많고 이 세상을 다스릴만한 힘이 있는 것 같으나 크고 작은 고난에 그 존재가 위협 받게 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인간의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죽을 것 같은 고난 중에도 이겨낼 힘을 주시고 살아가야 할 의미를 주십니다.
죽는 것이 차라니 낫습니다.의 호소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죽고 싶은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래도 주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고 ..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장 지독하고 고난. 그 고난의 정점. 죽임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