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2 viewsNotes
Transcript
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예수님의 예화]-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가는것이 쉽다(마 19:23-24).
왜 그런가? 부자는 누군가를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독립적이고 자족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가교]-구약 성경에서 야곱이 그런 사람이었다.
[야곱의 이름에 따른 삶]-발꿈치를 잡는 자,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으면서 나올 정도로 장자의 축복을 원했다.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다. 또한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 행세를 하며 장자의 축복을 훔쳤다.
에서는 야곱에게 화가 나서 죽이려고 했다. 야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약속의 땅을 떠나는 야곱]-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떠나는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주셨다.
야곱은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시며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 28:15).
[야곱의 성화의 도구 라반]-야곱은 집을 떠나 강호에서 더 강한 고수를 만났다. 바로 외삼촌 라반이었다.
라반은 탐욕스럽게 속이는 자였다. 야곱이 둘째 딸 라헬과 사랑에 빠진 것을 보고 7년 동안 일하게 했다.
결혼식 날 밤, 라반은 아름다운 라헬 대신 평범한 첫째 달 레아를 주었다. 이를 안 야곱에게 능청스럽게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일할 것을 강요했다.
야곱은 그 후에도 열 번이나 넘게 라반에게 품삯에 대한 어려움을 당했다.
하지만 야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라반을 이겼다. 그리고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 30:43).
그 시점에 하나님의 부르심도 있었지만 모든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라반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약속의 땅에 돌아오는 야곱]-길고 위험한 여정 끝에 야속의 땅 국경, 마하나임에 도착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다(창 32:1).
약속의 땅을 떠날 때 만났던 그 “하나님의 사자들”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을 떠날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처럼 약속의 땅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II.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
II.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
[서론]-야곱은 구약의 족장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원래 신앙이 거의 없던 사람으로 자기 꾀에 의존하여 인생을 살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으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계승하게 하셨다.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살던 야곱은 짧지 않은 생애 동안 수없이 많은 시간 속에 연단을 받고 깨달으면서 점점 더 거룩한 족장이 되어 갔다.
그런 점에서 야곱은 모든 족장들 중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세속적인 죄인이 거룩한 성도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형을 보여준다.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경험한 세 가지 사건을 다룬다.
A. 천사와 씨름하다.
A. 천사와 씨름하다.
첫번째 사건은 천사와 싸운 사건이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야곱은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형 에서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에게 자신의 사자들을 보낸다.
야곱은 자신의 사자들에게 할 말과 할 일을 일러준다. “주의 종 야곱이....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창32:4-5).
당시 족장은 선지자, 제사장, 왕 그 셋을 다 합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을 하나님이 족장에게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자기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기도 하고, 또 가족들의 죄를 위해서 대신 제사를 드려주기도 하고, 왕과 같은 권위가 있어서 가족들에 대한 생사를 주관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에서를 족장으로 인정하되 “내 주”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겸손하게 에서의 마음을 달래 너그러움을 구한다.
[얍복강에 도달한 야곱]-야곱은 계속하여 이동하여 마하나임에서 얍복강에 이른다.
야곱이 보냈던 사자들이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 32:6). 라며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야곱에게는 꼭 풀어야 할 인생의 최대의 숙제가 있었다.
그것은 장자의 축복을 속임을 당해 빼앗긴 형 에서와의 재회였다.
그는 장자인 자신이 받을 축복을 속임수로 빼앗아 간 간사한 야곱을 죽일 결심으로 절치부심하며 약 20년 동안을 기다렸다.
더욱이 야곱이 에서에게 미리 보낸 사자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온다는 것이었다.
이때 야곱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민하였다.
7절에는 “이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겁에 질려 있다. 분명히 ‘에서가 여전히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사백 명이나 거느리고 오겠는가?’
[야곱의 잔꾀와 기도]-야곱은 재앙을 피할 방법을 찾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다.
야곱이 잘하는 일이다. 결국 그는 야곱이었다. 그는 “위기는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기발한 계획을 세운다.
야곱은 사람들과 재산들을 두 떼로 나눈다.
그리고 야곱은 기도한다. 야곱은 생애 처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긴 기도일 것이다.
야곱의 기도를 들어보면 상당히 겸손하다.
먼저 약속의 땅을 떠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아뢴다. 다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과거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는데 현재 두 떼를 이루었다고 고백한다(창 32:9-10).
야곱은 자신의 계략과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전과 부자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이 합당치 않음을 인정한다.
야곱은 계속 기도한다. 자신을 에서의 손에서 지켜 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처자’에 대해서도 염려한다(창 32:11).
야곱은 형 에서의 울화를 누그러뜨리는 심산으로 많은 가축들을 선물로 준비했고, 마지막으로 두 아내와 두 첩,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강의 나루를 건너게 하였다.
14절에 보니 야곱은 에서의 선물을 준비한다. 암염소, 숫염소, 암양, 숫양, 낙타, 암소, 황소, 암나귀, 그리고 새끼, 총 550마리였다. 이것은 왕에게나 어울리는 선물, 조공이었다.
야곱은 이 선물을 두 떼로 나누어 보낸다. 에서가 물으면 “주의 종 야곱의 것인데 자기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라고 말하게 한다.
[강을 건내고 홀로 남겨져 씨름하다]-야곱은 선물을 건내 보내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건내 보낸다.
야곱은 모두와 헤어지고 밤에 홀로 남았다(24절).
이제 강변에 홀로 남은 야곱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처지로 인하여 마음이 가난해질 때로 가난해졌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어떤 사람이 야곱을 공격한다. 누구일까? 에서가 죽이려는 것일까? 아니면 강도일까? 야곱은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운다.
이 싸움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고대 근동에서의 씨름은 법적 소송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싸움을 통한 재판을 의미한다.
25절에 보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더라”
야곱은 심한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이게 어느 부분이냐 하면은 골반 뼈하고 허리의 뼈가 만나는 지점이에요.
야곱은 초자연적인 힘을 경험하며 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야곱은 불구가 되어 더 이상 싸울 수 없지만 목숨을 걸고 버틴다.
B. 겨루어서 이기다.
B. 겨루어서 이기다.
두 번째 사건은 천사와 겨루어서 이긴 사건이다.
[이름을 묻다]-26절에 보니, 그런데 갑자가 싸움을 걸어왔던 사람이 갑자기 말한다.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이렇게 씨름은 야곱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야곱은 이 사람이 하나님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고, 축복을 원한다.
27절에 보니,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사람은 야곱에게 이름을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 정체성에 해당한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말한다. ‘발꿈치를 잡는 사람, 속이는 자’라고 인정한다.
야곱은 평생 빼앗고 속이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야곱은 자신의 죄를 한 단어로 고백한다. “야곱이니이다”
[개명-야곱에서 이스라엘로]-오늘 이야기의 절정에 이릅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은 평생을 사람들과 겨루었다.
엄마 뱃 속에서 에서와 다투었고 장자권을 얻기 위해 속이면서 다투었고 눈 먼 아버지를 속이면서 다투었다.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간 라반의 집에서도 다투고 속임수를 써서 부자가 되었다. 야곱은 사람들과 다투고 이겼다.
그러나 이곳 얍복강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직접 겨루어 놀랍게도이겼다.
야곱은 천사의 말에 이 사람이 하나님인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끝까지 버텼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속임수를 쓰던 것에서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속이는 자에서 돌이키게 하셨다.
속이는 자로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얍복강가 씨름에 대한 오해]-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 유명한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 사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왔다.
즉, 야곱이 믿음으로 천사와 씨름을 했고, 이 믿음이 천사를 굴복시켰고 승리함으로써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얍복 강가에서 씨름의 사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곧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 씨름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주어지는데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씨름으로 하나님을 꺾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얍복 강가의 사건에 대한 이런 방식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꺾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호세아서를 통해 본 얍복강 씨름 사건]-먼저 호세아서를 읽어 보자.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말씀의 문맥이 야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다루고 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확실한 사실은 이것이다.
이와 같이 호세아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행실들은 칭찬받을 것이 아니라 벌받아야 마땅한 것들로 묘사되고 있다.
모태에서 형의 발꿈치를 잡은 사건이나 천사와 씨름하며 겨룬 사건을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면 천사는 무엇 때문에 야곱에게 그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하며 이스라엘이라고 개명까지 해 주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의 실마리를 호세아서 12장 4절의 한 단어에서 발견하게 된다.
“울며”라는 단어다.
그는 통곡하였고 그에게 간구하였다. "큰 소리를 내며 울다, 엉엉 통곡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극도의 슬픔이나 고통을 동반한 울음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야곱은 왜 천사와 겨루어 이들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통곡했을까?”
[겨루어서 이김의 의미]-이에 대한 답이 창세기 본문에 암시되어 있다.
“천사는 ...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 (창세기 32장 25절). 이것은 명백한 징계였다.
다시 말해서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만난 야곱이 그와 힘을 겨누었던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의 힘과 재주로 인생의 위기를 넘겨보려고 한 아주 오래된 야곱의 불신앙적인 습관이었다.
이에 대한 징계로서 하나님의 천사는 야곱의 척추와 골반에 있는 뼈를 때려 위골되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사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야곱이 부르짖는 진정한 자기 깨어짐의 통곡은 그 사건 후에 있었다.
곧 이제껏 자신의 술수와 재단으로 천사를 이겨 복을 받으려 했던 자기의 세속적인 시도를 통곡하면서 회개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은 씨름하는 육체의 힘이 아니라 통곡하며 자기의 죄를 쏟아붓는 회개 때문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눈높이에서 말하자면, 야곱이 씨름하는 고집으로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야곱이 회개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스스로 져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런 마음은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토록 깊고 진실한 회개는 야곱의 생애를 통틀어서 일찍이 없었던 아주 뛰어난 것이었다.
일평생 하나님 대신 자기 꾀를 의지하며 살아온 야곱의 커다란 자기 깨어진 자아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켜 그에게 축복을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과 새이스라엘]-그리고 이렇게 해서 야곱이 만든 새 이름이 이스라엘은 후에 선택된 백성들의 민족과 국가의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후일에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 뜻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은 그분을 꺾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통곡하는 회개가 하나님께 감동을 드려 마음을 바꿔 우리를 축복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는 민족이다.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로 특징 지워진 그분의 백성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회개하는 사람이다]-그래서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자 평생 순교하기를 갈망하였던 사람 테르툴리아누스(c.160-220).
자신의 책 회개론(De Paenitentia) 제6장에서 자신을 회개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문이에요.
"만일 우리가 그토록 자주 죄를 짓는다면 그토록 자주 회개가 필요하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죄로부터 결코 자유하지 않으며, 위험으로부터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절대적인 위기 앞에서 야곱의 옛 자아가 깨어지면서 그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였다.
이때 야곱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철저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감동을 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돌이켜 그를 축복해 주셨으며, 새 이름 이스라엘로 불러주셨다.
[당신은 회개하는가?]-우리의 신앙생활에 회개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가 마음을 다 풀어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회개한 적이 언제였던가 우리가 그렇게 깨끗한가?
회개할 것이 없을 정도로 순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서도 넉넉히 살아간다.
죄가 마음에 겹겹이 쌓여서 이제 마음이 그것을 인식하는 데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종종 인생의 벼랑 끝까지 데려가실까?
때로는 거기서 우리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기까지 무서워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인생의 위기 속에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라]-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으로 두려워 떨며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다시 하나님 앞에 살게 하려 하십니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위기 속에서 갈 길을 찾게 해 준다.
왜냐하면 눈물의 세례로 우리의 마음 깨끗이 씻겨질 때 우리의 지성은 비로소 총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심정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의 위기에 있는가?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며 회개하라.
거기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라.
[회개에 따른 축복]-야곱은 이제 낯선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오직 권위 있는 자만이 사람에게 새 이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9절에, 야곱은 자신이 싸운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름을 묻는다.
천사는 야곱에게 이름을 밝히는 대신 축복함으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C. 에서와 화해하다.
C. 에서와 화해하다.
셋째로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하는 사건을 겪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념함]-30절에 드디어 날이 밝았다. 야곱은 하나님과 만난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너무나 특별했기 때문에 야곱이 그런 이름을 그곳에 붙여진 것으로 것으로 여겨진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 중대한 사건을 기념하기 원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해석]-이 이야기를 듣는 최초의 독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이고 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답을 듣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을 잡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불구로 만드신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복을 쟁취하고 자신의 힘으로 약속에 들어가려고 했던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전에 불구로 만드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힘으로 약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땅을 선물로 받아야 했다.
[새이스라엘된 오늘날 교회]-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간다. 그것은 선물이다.
자수성가하고 자급자족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다.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힘써서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께 매달려야 한다.
예수님도 나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에서와의 대면]-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엄연하였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원한 때문에 평생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던 형 에서를 만나야 했다.
아마 형에서는 결코 야곱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은 놀랍게 바뀌었다.
동생 야곱이 저만치서 걸어올 때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오고 있었다.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짐승의 떼는 많이 거느렸으나 초췌한 몰골로 절룩거리며 오는 동생 야곱의 모습을 에서는 보고 있었다.
[에서의 호의]-이때 그의 가슴에서 불타던 복수심은 눈높이 사라졌고, 그냥 야곱이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과 종들 앞으로 나아가 형 에서를 대면했다.
그때 광경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몸이 땅에 닿기까지 7번이나 절하는 것은 신하가 왕에게나 할 법한 예법이었다.
야곱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형 에서를 향해서도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서의 마음이 물처럼 녹아내렸다.
마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야곱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내렸던 것처럼 말이다.
[에서의 화해 제스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그를 맞이하여 안고라는 표현은 에서가 야곱 두 팔을 어깨 위에다 떨어뜨렸다는 표현은 강렬한 포옹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후 함께 울었다.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날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동생 야곱을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던 에서가 한순간에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게 자유로운 형이 되어 동생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올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교훈]-하나님께서 종종 우리를 절망의 벼랑 끝에 세우시는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의 마음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세상 사람과 죄악의 찌꺼기들을 떨쳐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잠시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 있는 신앙으로 살게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사람들과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지금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지금 여기 야곱처럼 철저히 회개하고 모든 죄를 털어버린 채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있는가?
요즘 우리에게 통곡하는 눈물의 회개와 울부짖는 기도가 살아 있는가?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토록 애처롭게 은혜 주시길 간구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그래, 내가 졌다” 라고 하실 만큼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종종 인간의 한계를, 인간 이성의 한계를 초월한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뒤돌아갈 수도 없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그때에 하나님은 두 길 말고 다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지친 우리의 두 어깨 위에 날개를 달아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도처럼 밀려오는 원수들 앞에서 절벽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며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이다.
이제껏 야곱처럼 온갖 인간적인 술수와 장대로 살아왔던 인생의 날들을 동곡과 눈물로 회개할 때이다.
그리고 이제 생사 간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고 의지할 때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회개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야곱에게 승리의 깃발을 안겨주신 것처럼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이다.
III. 적용 및 결론
III. 적용 및 결론
신자의 일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난 성격과 부패한 본성을 다듬어 가시는 과정이다.
산골짜기를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 그 물의 흐름 속에서 작은 돌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맨들맨들한 돌이 되어 가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다듬어 가신다.
이따금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하시는 것은 그런 고난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랑과 자랑을 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다.
당신이 얍복 강가에 혼자 남겨진 야곱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두려움과 불안으로 요동치는 마음을 추스르면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찾으라.
지금도 하나님은 큰 통곡과 많은 눈물로 기도하며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하신다.
"그래 내가 졌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의미다.
당신은 이 말씀 앞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