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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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적 설교) 1 하나님의 마음알기
하나님을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최고 핵심이다.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가 창조된 이유이자 우리 인생의 목표”라고 말했다. 동시에 하나님께도 가장 큰 기쁨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하나님을 직접 아는 것 2) 하나님을 들어서 아는 것.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 (렘 22:16) 예레미야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한 지적 이해를 넘어 그 분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과 뜻이 통하는 것이다. 지성의 문제를 넘어 전인격적인 삶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2 찬양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 하나님께서 관심을 쏟으시는 곳에 나도 마음을 두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는 사랑의 문제로 귀결된다. (예> 부모의 사랑 - 자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관심 :”무엇을 좋아하는 지,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선물 - 쌍방의 기쁨” (하린 : 검정색, 하온: 자동차 중 버스) 안다는 것은 감정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 안타까움.
3 본문 (호 6:1-6)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이고, 4-6절에는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소제목은 ‘백성들의 불성실한 회개’이다. 왜 그런 소제목이 붙었을까? 4절에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애가 문제이다. 인애가 부족했다. 인애의 정의 : 인애란? 히브리어로 헤세드.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에 제한되지 않는다. 인간 - 이웃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함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제한했다. 그래서 ‘제사와 번제’에만 관심을 두고 신경을 썼다. 회개를 표현하는 방법도 ‘제사와 번제’를 통해서였다. 회개는 종교적 행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우리로 치면 ‘예배’, ‘신앙’ 생활에만 신경 쓰고, 더욱 강화시킨 것이다.
히브리어에는 ‘평행법’이라는 것이 있다. 6절에 제사-번제, ‘인애-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렇다. 호세아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동일선상에 둔다. (렘 22:16)에서 그는 요시아 왕을 지칭한다. 요시야 왕은 가난한 자와 궁핌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게 했다. 그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드러낸 일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행위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곧 궁휼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자, 인애이다.
(개인적 의견 추가) 죄의 속성 : 자기 중심성, 한국 사회 - 한국 교회에서 인애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다. 회복을 종교적인 행위로 인식하고, 종교적으로만 강화했다. 사랑 : 자기 중심성의 반대 - 사랑은 희생이다. 나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나에게 주신 마음, 선물로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 엄청난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 서진교 목사 -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나님의 마음 - 나의 자리 : 사명의 자리에서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읽을 것이냐) 내가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1-6) 1-3절은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 선포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전하고 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고백은 백성들이 응답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절을 통해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거짓 회개, 거짓 경건이라 여긴다. 하나님은 에브라임과 유다의 인애가 아침 구름과 같고 일찍감치 길 떠나는 이슬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4절은 하나님이 에브라임과 유다의 인애가 참으로 덧없고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임을 책망하시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호세아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것이 제의와 종교가 아니라 삶 속에서의 진리와 인애였으나(호 4:1), 이스라엘은 이를 행하지 않았고 망하게 되었다. 결국 1-3절에 등장한 이스라엘의 회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서 있다.
1-3절에 상요된 표현들이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것들로 가득하지만, 그들의 회개는 결국 그럴듯한 종교적 표현들로 가득한 말뿐인 회개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을 알자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고백 속에 나오는 하나님은 마치 기계적으로 응답하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예> 우리의 익숙한 종교적 언어나 종교적 습관 : 중언부언하는 기도 마6:7)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토록 바알 신에 미혹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 역시 공식과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분으로 만들고 있다. (하나님을 비인격적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여호와를 알자고 서로에게 권면하지만, 그렇게 알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내용이 오직 새벽빛같이 일정하신 분, 땅을 적시는 비처럼 임하신는 분이라는 표현에서도, 그들의 앎이 지극히 편향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든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분, 언제나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일 뿐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람의 필요에 부합하는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하나님 지식은 또 다른 욕망의 종교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다.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소중한 신앙의 본질이면서, 꽤 많은 순간 탐욕을 신앙적으로 정당화하고 치장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기도 관련 서적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통제하는 법이나 마찬가지인 경우도 많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길들이고 하나님에게 마구와 멍에를 메워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 한다.
특히 4절에서 문제시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인애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애의 하나님이지만,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인애가 없음으로 인해 쇠잔케 될 것이다. 현실은 인애를 말하지만 그것이 최우선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애는 사실상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며 아침 이슬처럼 덧없어 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마로 오늘날 우리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집중하는 교회의 현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얘> 개인의 구원, 자기 중심적 신앙의 모습 등)
6절에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이 대칭되는 자리에 제사와 번제가 놓였다는 점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종교적, 제의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1-3절과 같은 그럴싸한 고백을 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자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여전히 인애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이제 곧 응답하시고 그들을 치료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더 많은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구호는 대부분의 경우 더 정성스럽고 마음을 다한 제사로 귀결되기 쉽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고발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여전히 예배의 회복을 외친다믄 점에서 그 시대와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 정체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예배의 회복은 결국 더 큰 정성과 헌신에 대한 촉구이며, 더 빈번한 모임, 더 빈번한 집회, 더 빈번한 기도회와 같은 노력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바울이 그토록 배격하고 맞섰던 외적 표지로서의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종교적 행위 - 번제와 제사, 율법과 규레와 절기(안식일) / 우리의 교회 - 예배, 집회, 봉사, 헌금 등)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인애다. 그리고 인애야말로 하나님 아는 지식의 핵심이고 요체다.
이스라엘의 회개는 참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는 회개가 아니라 다시금 종교적 방식으로 그들이 처한 난국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는 어쩌면 십일조나 주일성수, 예배, 기도회, 성경공부, 금주, 금연 같은 것이 그리스도임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한 믿음은 마땅이 그에 합당한 삶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애를 행하는 삶,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미 6:6-8)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인애와 정의, 공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종교 의식으로 구별되는 민족이 아니라,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내신 여호와로 말미암아 구별되는 민족이며, 거룩한 백성의 삶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닮아가는 삶으로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