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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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드로라면 어떨까?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13장 36절- 38절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서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아 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마지막 제자 훈련 마지막 트레이닝 세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근데 재미있게도 제자들의 귀에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보다는 다른 말이 더 들렸던 것 같습니다.
34절 35절에 보면은 예수께서 새 개명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근데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약간 알쏭달쏭한 말씀이 나옵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전에 유대인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이를 수 없다.
나는 어딘가를 가는데 너희들은 못 갈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 어딘가로 간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나를 따라서 어딘가로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예수님은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가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다 지시고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형벌을 그분이 대신 감당하시러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실 겁니다.
그렇죠? 아 그게 예수께서 가시는 길인 거죠. 근데 제자들의 귀에는 이게 그냥 아 예수께서 어딘가에 도망간다라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냥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무엇을 하러 가시는지 왜 가셔야만 하는지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소명으로 부르심 받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새 개명이 무엇인지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도 그렇게 대단히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만 두려웠죠.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가 제가 예수님은 아닙니다만 그러니까 이런 상황을 저는 우리 교회에서도 좀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이런 변역을 추구하기 위해서 제가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교회가 까 새로 개척되는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지금 현재에 있는 우리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을 통해서 제 아까 진규 형제도 기도할 때 그 얘기를 하셨는데요.
무릎 꿇는 사랑에 대해서 여러 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죠 기억나시죠?
근데 많은 분들이 실제로 귀에 들리는 건 제가 떠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정말 사랑하고 여러분들도 저를 사랑한다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이 여러분들에게 크게 들릴 거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3절에 작은 자들아 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떠난다. 작은 자더라 작은 자더라라는 표현은 뭘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르지만 그 부르시는 말 중에서 제일 아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스윗트한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사랑을 많이 담아서 하시는 말씀 그들을 부르시는 단어가 호칭이요 작은 자라 옛날 성경에는 이제 소자들아 이렇게 번역이 됐죠 저는 옛날 성경 번역을 더 좋아합니다.
소자들아 내 사랑하는 작은 자들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 못할 것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기억하지 않는다면은 계속해서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안으로 안에 갇히게 될 겁니다.
시광교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라라는 이 소명을 그러니까 인식하지 않고 도대체 왜 누가 뭘 떠나나요 뭐가 바뀌나요 라는 식으로 그러니까 나 당장 내게 주어지는 변화와 그리고 내가 겪는 불편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공동체가 될 겁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사랑을 흘려 보내거나 떠보내는 공동체가 아니고 그러니까 사랑의 샘이 되고 사람들을 마시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우리 안에서 마시다가 고갈되는 공동체가 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이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이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래서 36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몸에 들어가 이르대 주야 어디로 가십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만 귀에 들렸죠. 어디로 갑니까?
그러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는 지금 따라올 수 없단다.
그렇지만 나중엔 따라오게 되겠지.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쥐어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를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아마 저는 예수께서 이 지점에서 그러니까 넉넉하게 웃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시니컬한 어조가 아니었을 겁니다. 학자들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네요. 네가 나를 위하여서 내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 무슨 말일까요?
요한복음을 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은 복음서에 익숙하신 분들은 그 이후에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지 아실 겁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배신하는 것도 그 그냥 배신한 게 아닙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요 예수님이 잡혀가요.
잡혀가고 나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야 너도 저 잡혀간 예수라는 작자와 한 패거리였잖아 그러니까는 베드로가 부인합니다.
아니다 난 저 사람 모른다. 또 한 사람이 물어봅니다.
그 물어본 사람들도 전부 다 종들이에요. 그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부인할 때 예수님을 부인할 때 무슨 뭐 대제사장이나 높은 사람들 앞에서 부인한 게 아닙니다.
그들의 종들 그중에서 여종에게 부인합니다. 여자가 별거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고요.
당시에는 여성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무서워할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서워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부인할 때는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얘기하냐면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여러분 저주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누굴 저주했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저주했다는 겁니다. 근데 이 저주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무슨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저주가 아닙니다.
저주가 예수께 있을지어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 이 영어로 욕설이 뭐죠?
curse 랭귀지잖아요. 뭐 다른 말도 있지만은 크스 랭귀지 맞죠?
영어 잘하시는 분들 제가 틀렸다면 나중에 알려주세요.
크스 랭귀지잖아요. 저주하는 말입니다. 그렇죠?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그냥 무슨 뭐 신앙적 종교적 저주가 아닙니다.
쌍욕을 했다는 겁니다. 쌍욕을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쌍욕을 내지른 후에 이렇게 말한 거죠.
나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해 이게 몇 시간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게 실패했죠
그리고 나서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베드로는요 생각이 났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 라고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이 생각이 나서 울었습니다.
통곡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이제 우리는 아 21장에 보면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그런 베드로를 예수께서 찾아오신 장면을 보게 됩니다.
계수께서 찾아오셔서 회복시키시고 다시 세우시죠 그렇죠?
아 그게 전반적인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13장에서 베드로가 배신할 거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보게 되고요.
18장에서 실제로 베드로가 배신한 장면을 보게 되고요.
그리고 21장에서 회복하는 장면을 보게 되죠. 저는 본문은 이 36절부터 38절만 읽었지만 전체 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할 겁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어떻게 회복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누군가는 신앙적인 실패를 지금 겪고 계신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을 겁니다.
혹은 그 그렇게까지 아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심각한 신앙적인 침체를 겪고 계신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은 신앙적으로 실패한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또는 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조를 아직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직 아 나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바꿔서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신앙을 가지는 데 실패한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까?
그 이걸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는요 베드로가 왜 실패했는지 두 가지 이유를 말씀드릴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요 베드로가 어떻게 회복됐는지 그것도 역시 두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씩 보도록 하죠. 배들은 왜 실패했습니까? 37절을 봅시다.
신문 베드로가 이르데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36절부터 읽을게요.
베디스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데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뭘 볼 수 있습니까?
자기 신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죠. 자기를 신뢰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과신이라고 볼 수 있죠.
그 나는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아십니까?
내가 얼마나 당신께 신실한 존재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한 거죠.
실제로 이 본문은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 말고 누가 복음의 본문을 보잖아요.
그 그 이후에 베드로가 한 마디 더 한 것이 기록돼 있습니다.
뭐라고 말했냐면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감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는 자신만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쌍욕을 하면서 부인하죠
그것도 세 번을 부인합니다. 한 번이 아닙니다. 세 번을 부인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대단한 사람 사람 앞에서 부인한 것도 아니었고요.
쌍욕을 하면서 부인하죠 그렇죠 이걸 통해서 뭘 할 수 있습니까?
뭐가 문제였습니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만만했습니다.
바꿔서 말해보자면요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도 몰랐습니다.
그는요 자신의 신앙과 신실함에 있어서는 과대 평가하고 있었고요 자신 안에서 꿈틀 대면서 움직이는 죄의 능력에 있어서는 과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어 여러분들은 어떤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여러분들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 생각하는 영역이 있을 겁니다. 아 나는 거짓말은 웬만하면 잘 안 하지 이런 죄에 대해서는 강해 혹은 나는 뭐 뭐 뭐 뭐라고 할까 위선적인 사람은 아니야
나는 성적 유혹에 있어서는 나는 강한 사람이라고 나는 뭐 남의 거를 그 탐욕을 가지고 그러지 나는 보통 자족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성향을 지니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여러분들 자신의 강점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자신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으니깐요. 그리고 그거는 진짜 몇 시간 안에 들통이 나버렸습니다.
어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스스로를 과신하게 되면은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아십니까?
이건 참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를 과신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스스로의 죄성에 대해서 과소 평가하는 동시에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 과대 평가하잖아요.
그 두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면은 여러분들은요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를 싫어합니다.
재미없거든요. 시업계를 오래 다니신 분들이라면 느끼겠지만은 저는 설 그 때 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물론 성경이 그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 그리고 제가 가급적 여러분들을 정죄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집요하게 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죄가 우리 마음을 어떻게 황폐화시키고 망쳐버리는지에 대해서 많이 말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도 꽤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죄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해요.
어쩌면 제가 너무 여러분들을 막 들쳐내면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얘기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안의 문제에 대해서 많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자신만 말하는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연약하다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거예요. 또 하나는 그거고요. 또 하나가 있습니다.
재밌있는 건데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게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신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잘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후에 베드로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드리죠. 베드로가 이 이후에 어떻게 되냐면 이제 그다음에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훈련시키십니다.
마지막으로 설교를 하시죠 고별 설교를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게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게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내가 심히 고민해서 죽게 됐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와 함께 기도하자.
그러면서 또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너 네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서 기도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이미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아실 겁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됐죠? 베드로는 잠들어 버렸습니다.
베드로 기도하다 잠들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아 여러분들은 기도하다가 잠들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실 겁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가 지루하니깐요 기도는 지루하니깐요.
1부 예배 때 제가 기도는 지루하니까요 라고 말하니까 아이들이 공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점자는 분들이니까 공감을 안 하시는 건가요?
보십시오. 기도가 지루한 이유는요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가 재미없고 기도를 멀리 하는 이유는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요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거죠.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안다면 기도는 습관이 될 겁니다.
그리고 기도는 지속적으로 지루하지 않게 될 겁니다.
조금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드리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작년 말쯤에 교회를 개척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저를 그때 그러니까 굉장히 불가항력적으로 부르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 근데 이제 처음에 개척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을 때 제가 머릿속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아 맞아 나는 개척을 했지 그렇죠 개척을 두 번째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겁니다.
그럼 저는 이미 개척을 한 번 한 거죠 이 교회를 개척했잖아요.
그리고 나서 아 저는요 제가 처음에 개척을 2011년도에 개척을 했고 지금까지 왔으니까 그리고 나름 개척이 자리를 잡고 교회가 성장했으니까는 무언가 좀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개척을 염두에 두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건 전략을 짜는 거였습니다.
전략을 짜야지 이런 전략도 짜고 저런 전략도 짜고 교회 개척에 대한 책들도 많이 읽고 그리고 시업 교회가 그동안 교회를 개척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도 해보고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저렇게 해야지 라는 그러니까 로드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알게 됐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구나 어떻게 하게 됐는지 아십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이제 예수님의 고별 설교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을 설교하기 위해서 좀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해왔거든요.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했기 때문에 몇 달 전부터 본문을 읽었겠죠 여기서 저는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 나는 용기에 있어서는 괜찮지 나는 용감한 사람이야 나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넘어지는 걸 보았죠. 저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겁니다.
나는 개척 전문가예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나는 개척을 했어 서울에서 개척을 했다고 개척에 대해서 한마디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두 번째 개척을 해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조금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들여다 본다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한 겁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11년간요 엄청나게 많은 바보 같은 결정들을 했습니다.
저는 엄청나게 많은 바보 같은 짓들을 했고요 그리고 심히 어리석은 죄들을 지어 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보존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 때문이었지 절대 제가 무언가 개척에 대해서 전문가이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항상 저는요 되돌아보면은 슬프게도 제가 제일 열심히 기도할 때는요 힘들 때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언제 기도하십니까?
힘들 때요 힘들지 않을 때는 기도 안 합니다. 그때는 기도가 지루하거든요.
왜 그렇죠? 시험이 닥칠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라. 조금 있으면 시험에 들 거거든요.
근데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모든 게 평안해 왜 예수님은 갑자기 이렇게 오버 하시지 그렇죠?
여러분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도 비슷한 생각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삶에서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자신만만한 부분들이 분명히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아 내가 이 부분에 있어서 능력이 있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는 아 안심할 만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게 여러분들의 능력일 수도 있고요 여러분들의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외모일 수도 있고요 어떤 분들은 여러분들이 성품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요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내 성품을 내가 알고 있다고요.
예컨데 여러분들 중에서 착하고 인기가 많은 사람은요 자신이 착하고 인기가 많다는 걸 압니다.
어떻게 모릅니까 그걸 내가 착하고 인기가 많게 나이스하게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나의 내가 그렇게 대할 때 나한테 좋은 반응을 보여준다는 것을 내가 경험으로 알 뿐 아니라 나처럼 반응하지 않고 좀 약간 교만하게 말하거나 좀 자기 과신에 허세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기피하는 걸 옆에서 내가 보면서 거기에 대해서 내가 우월감을 한 번 느껴보고 맛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착하다는 걸 내가 모릅니까 그렇죠?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스스로를 믿게 됩니다.
아 내가 성품에 있어서는 괜찮지 그리고 그런 사람은요 겸손하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기도하겠습니까? 나는 이미 겸손한데 그런데 되게 재밌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는 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밌지 않습니까? 그죠? 그때 그 부분에 있어서 이 사람은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는 거죠.
여러분 잘 보십시오.
여러분들은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영역들이 있을 겁니다.
건강일 수도 있고 여러분들의 성품일 수도 있고 여러분들의 능력일 수도 있고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 만만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들이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방금 성취한 학업이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생각합니다. 아 내가 이런 이런 부분은 잘 해 내가 몇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내 삶에서 경험한 경험을 유추해 볼 때 이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염려할 게 없지.
이런 부분만 잘 대비하면 여러분 항상 종종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요 우리의 약점이 아닙니다.
우리의 강점이죠. 그때 여러분들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누구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전능자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자 두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월감입니다.
베드로가 넘어졌던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월감입니다.
베드로는요 일종의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37절에 보면 주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근데 이 본문에 대해서 이 이제 사복음서가 요한복음 뿐만 아니라 다른 세 개의 복음서가 더 있잖아요.
마테 마가 누가 가 있잖아요.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다른 부분을 보면은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마태복음 보면요 26장 33절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가복음 십사장 이십구절은 베데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이 사람들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러하지 않겠습니다.
아 여러분들은요 이렇게 알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신앙생활을 좀 하시고 또 성경 인물에 대해서 좀 공부하신 분들은요
베드로 그러면 보통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맞죠 베드로 그럼 보통 수제자로 유명하잖아요. 근데 성경에 보면 정작 예수님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베드로를 향해서 수제자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늘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보다는 좀 낫지 얘네들은 좀 겁쟁이가 있어.
그렇지만 나는 최소한 용기에 있어서는 내가 이 12명 중에서 최고야.
내가 담대함에 있어서는 누구도 뒤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버릴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얼마나 강한데요.
그리고 베드로는요 여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기 시작하죠.
되게 재밌는 게 뭔지 아십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다시 베드로를 만나서 물어보실 때도 뭐라고 물어보지 부르는지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보십니다.
예수님도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렇죠 베드로는요 자신의 충성스러움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순종을 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요 아 우리도 똑같을 수 있다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조금 이따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신앙을 정체성으로 삼는 게 나쁜 건가요?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정체성으로 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정체성으로 삼는 건 다릅니다.
그리고 전자는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이따 더 자세히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자 봅시다. 아 우리가 우리의 강점에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의 성취나 우리의 외모나 우리 다른 우리가 생각할 때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에 정체성을 두잖아요.
즉 우월감을 가지잖아요.
그러면요 우리는 두 가지 결과를 겪게 됩니다. 이 두 이게 두 가지 부작용인 동시에 실패입니다.
하나는 의기소침해지는 거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요 분노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의기소침해지거나 아니면 분노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드리죠. 이후에 베드로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후에는요 리온 모리스라는 신약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가 이제 설계할 때 카슨이라는 신학 학자를 많이 언급했죠 잘 모르는 몰라도 몰라도 됩니다.
근데 이제 디 카슨과 함께 제가 요한복음을 연구할 때 제일 많은 영향을 미쳤던 학자입니다.
리온 모리스는 이 본문을 굉장히 상세하게 주석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네가 다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거다.
네가 나를 배신할 거다. 이렇게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이후로 이제 14장부터 16장까지 예수님의 긴 설교가 계속되거든요.
근데 그 설교가 예수님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자들도 막 질문을 하고 그렇습니다.
근데 그 이후에 베드로의 말은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건 좀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은 예수께서 다른 데서 설교를 하실 때 베드로는 항상 끼어드는 사람이었거든요.
항상 한마디씩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항상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거든요.
항상 괜찮은 대답을 해 가지고 아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뿌듯해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예수께서 이 긴 설교를 하시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의기조심해졌거든요. 네가 다 굴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거다.
너는 너를 용기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너의 실상은 그렇지 않단다.
그리고 베드로는 의기소심해졌습니다. 마음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겸손해졌다기보다 그냥 쪼그라 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 잘못된 정체성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쉽게 위축되고 쪼그라들어 버립니다.
또는요 쉽게 분노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도 해 드리죠.
그리고 나서 개세만의 동산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나서 간절히 기도를 하고 이제 일어났었을 때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옵니다.
대제사장들의 종들이요 종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오고 그리고 베드로는 아마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다가왔을 때 베드로는 갑자기 칼을 빼듭니다.
그러고 나서 대제사장의 종들 중에 한 명이 이름이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칩니다.
도대체 저는 어떻게 귀만 딱 노려가지고 쳤는지 되게 궁금하긴 한데 어쨌든 귀를 칩니다.
그러니까 귀가 댕강 떨어져 나갔죠. 귀가 잘렸습니다.
뭘 하진 않았어요. 아직 그 잡으러 왔을 뿐이에요.
그리고 예수님 반응도 하시기 전에 갑자기 자기가 나섭니다.
왜 그래요?
내가 용기 있다고 말했었거든요. 나는 용기 있고 당신과 함께 죽을 겁니다라고 말도 했는데 예수님은 그걸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됐던 거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했던 거죠.
그리고 그 분노가 말고를 향해서 갔던 겁니다. 이해하십니까?
그리고 잘못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요 쉽게 이 지점에 있어서 분노합니다.
즉 오버하게 되는 거죠. 물론 예수님은요 그걸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칼로 흥한 자가 칼로 망하느니라 라고 대답해 주고요.
그리고 귀를 다시 주스셔서 아마도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고 다시 고쳐주셨죠 그분의 능력으로요.
그렇지만 중요한 건 이겁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장점에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여러분들이 거기에 몰두할 때 여러분들은 쉽게 의기소침해지거나 아니면 쉽게 분노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죠. 저 스스로를 예로 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얘는 지겁게 들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아마 아실 겁니다.
저는
물론 여러분들이 부인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그렇다니까 여러분들은 어쩔 겁니까?
저는 저를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재수 없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뭐 그래요 나는 똑똑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내 방에 있는 내 사무실에 있는 저 많은 책들을 봐 나는 저 중에 많은 책들을 읽었다고 아는 게 많아 똑똑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근데요 재미있는 건 이겁니다. 제가 저 자신의 지능에 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종종 아 제가 실제로는 별로 똑똑하지 않다라는 걸 누군가 입증해 버리잖아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저는 쉽게 의기소침해집니다.
그냥 아 제가 그걸 몰랐군요 아 제가 좀 더 발전해야 되는군요 나아지면 되는군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의기소심해져 버리죠. 쪼그라들어 버립니다.
혹은 혹은 이렇게 되는 거죠. 네가 감히 내 지성을 무시해 너 따위가 내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고 공부를 내가 막 하기가 있고 어 하기 없는데 사실은
석사는 있잖아요. 석사가 있고 말이야 어찌 감히 그러면서 이제 칼을 들어가지고 상대의 귀를 치는 거죠.
그렇죠 실제로 칼을 들지 않고 입으로 하는 겁니다.
말로 상대의 귀를 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 못할 바가 절대 안 할 겁니다.
종종 신앙인들도 그러거든요. 신앙인들은요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여기서 그래서 아 오늘 설교는 나와 관계가 없군.
나는 신앙적으로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지금 잘 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내가 뭐 매일 기도나 성경 읽기도 하고 있고 그리고 뭐 이 정도면 교회 모임도 뭐 이 정도면 충분히 많이 하고 있고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고 또 뭐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근데 그런 사람일수록 누군가 그러니까 그 사람 자신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자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그 사람의 문제를 겸허하게 지적할 쉽게 의기소침해지거나 쉽게 칼을 들어 가지고 상대의 귀를 칩니다.
그렇죠 네가 어떻게 알어 니가 내 신앙에 대해서 알아 니가 뭔데 나를 판단해 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왜 신앙 나 나보다 우리 시광 교회 보면 나보다 신앙 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은 천재 빛깔인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라고 생각하는 거죠.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신앙이 정체성 신앙이라 하더라도 정체성이 된다면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된다면 이런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신앙이 아니면 또 마찬가지겠죠. 여러분들이 수많은 것들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러분들은요 의기소침해지거나 혹은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되게 재미있는 게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은요 되게 많은 것들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요 여러분들의 외모를 정체성으로 삼을 수도 있고요.
여러분들의 직업을 정체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정체성으로 삼죠.
내 직업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그러면 내가 인정받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혹은 외모를 정체성으로 삼습니다. 혹은 다른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데 여러분들은요 여러분들의 젠더를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여성이라는 거야 혹은 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남성이라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칼을 빼가지고 상대방 젠더를요 귀를 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페미니스트야 그러면서 남성을 다 비하하는 겁니다.
나는 일배 이렇게 나누나 어쨌든 이건 창피하니까 이거 나라라 그러면서 여성의 귀를 치는 겁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냥 평등 운동을 하면 됩니다.
근데 갑자기 칼을 맵니다. 이게 낯선 풍경인가요?
아니요 여러분들이 이미 커뮤니티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봤습니다.
또는 이런 것도 있죠 정치도 쉽게 정체성이 됩니다.
저도 뭐 나름 정치적인 지지하는 입장이 있지 않겠습니까?
거의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리고 사실 뭐 이 이야기는 저한테 재미있고 흥미 있는 주제도 아니기 때문에 거의 이야기하지 않지만 어쨌든 저도 선호하는 정치 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요 보통 두 개의 크게 진보와 보수 이렇게 두 개의 정치로 나뉘죠.
그렇죠? 근데 제가 되게 재미있고 흥미롭게 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죠. 이미 여러분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진보라면요 그리고 내가 진보적 정치 색깔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여러 정체성 중에서 제일 중요하고 깊이 있는 관심사라면요 여러분은 칼을 빼가지고 보수의 귀를 칩니다.
여러분들이 보수라면요 진보의 귀를 치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요 저는 이제 저도 나름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정치 뉴스나 이런 것들은 꽤 봅니다.
보면요
선거철인 경우에는 둘이 이렇게 싸우거든요. 근데 요즘은 선거철은 아니잖아요.
선거철이 아닌 경우에는 그 내부끼리 또 계파끼리 엄청 싸웁니다.
그리고 같은 전투력으로 싸우더라고요. 재밌지 않습니까?
모든 것들이 다 여러분들의 정체성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정체성이 학력이라면 여러분들은요 여러분들보다 낮은 학력을 보면서 깔볼 겁니다.
근데 여러분들이 여러분들보다 학력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보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요 분노하면서 깔볼 겁니다.
여러분들의 정체성이 자신의 성과라면요 여러분들은 회사 안에서 자기보다 성과가 낮은 사람들을 보면서 칼을 빼앗들어서 귀를 칠 겁니다.
진짜 무시무시한 건 이게 이것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쉽게 흘러 들어온다는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어떤 기독교인이요 다시 한 번 얘기하드리지만 이 기독교인을 제가 비웃슬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기독교인이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거에 대해서 너무 자랑스럽고 이게 정체성이라고 합시다.
그래서 절에 갑니다. 그래서 불상을 막 붓습니다.
이건 어 어떤 일이 일어난 겁니까? 타 종교인들을 막 비방하고 비판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겁니까? 이 사람의 정체성은요 그리스도가 아니고 기독교입니다.
이게 예민하고 미묘한 지점입니다. 이게 속기 쉬운 지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 나는 신앙인이야 나는 기독교인이야 라는 정체성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돌보셨어 라는 정체성보다 강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칼을 들고요 불상을 칩니다.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 그렇군 저렇게 칼을 들고 불상에 가가지고 불상을 부수는 사람은 저런 사람은 저런 짓을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점자는 그리스도인이지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 그러면요 여러분들은 낫지 않습니다.
똑같은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은 베드로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는요 자기 자신을 향한 베드로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큰 사랑에서 자기가 생각할 땐 크다고 생각했겠죠 자신의 큰 사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삼았던 거죠.
예수님은 베드로의 구원자라기보다는 베드로 입장에서는 베드로의 스승이었을 뿐입니다.
그럼 누가 베드로의 구원자였네요 베드로 자신이죠 내가 나의 구원자다 내 용기가 나를 구원한다 내 성과가 나를 구원한다 내 힘이 나를 구원한다 내 지성이 나를 구원한다 내 학력이 내 외모가 여러분 여기 계신 분들은요 최소 20살 이상 사셨죠 그렇죠?
20년 이상 살면서요 이미 그런 정체성을 배신당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미 그런 문제 때문에 한 번 이상 실패를 겪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문제에 있어서 이미 좌절을 겪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장 강하다고 느끼는 그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심지어 약하다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베드로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여러분들에게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면 저도 해결되어 가는 과정 중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죠.
여러분들 뿐만 아니라 저도요. 그럼 어떻게 회복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어떻게 변화됐습니까?
두 가지를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는요 정직한 자기 인정이죠.
이건 자기 과신의 반대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먼저 정직하게 자기를 인정했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인정하도록 뼈를 때리셨습니다.
38절 봅시다. 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요 예수께서 되게 자주 하시는 특히 요한복음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아주 아주 분명하게 꼭 기억해야 하는 진리라는 걸 강조하는 표현이죠.
탁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어떤 존재인지 그냥 드러내 주십니다.
요즘 말로는 뼈를 때린 거고요. 그리고 베드로가 어떤 존재인지 그냥 베드로를 밟아 벗긴 거죠.
내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 서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 일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자리가 언제인지 압니까?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기도의 자리로 올 때 이 일이 가장 잘 이루어질 겁니다.
여러분 만일 만일요 아까도 얘기했지만요 여러분들이 최근에 기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면
하나님과 더불어서 교재하면서 그분을 찾는 감각을 잃어버렸다면 기도가 여러분들에게 계속 지루한 일이라면 사실상 습관적으로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면요 문제는 단순히 기도를 기도라는 선행을 안 했다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요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까먹었다는 거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과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진짜 문제입니다. 그럼 어떻게 여러분들은 자신을 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습니까?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오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여러분들이 계획을 세워서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기도하는 자리로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과 교제하십시오. 그분 앞에 서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단순히 여러분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어보십니다.
베드로야
니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니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이렇게 물어봤을까요?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이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안 버릴 겁니다.
그럼 바꿔서 말하면 뭡니까? 이 사람들은 주를 안 사랑해도 나는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말이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건 뭘 의미할까요?
비꼬는 걸까요? 아니요 이렇게 물어보신 겁니다.
너는 이제 네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느냐 너는 너의 충성심이 너의 구원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달았느냐?
너는 스스로 아주 용기있고 담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너는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이해했느냐 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어본 겁니다.
자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다고 합시다.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예수께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여러분들 가운데는 두 가지 마음이 들 겁니다.
하나는 이겁니다. 여러분들 실패와 죄를 생각하면 감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죠?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넌 나를 안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억울할걸요 그렇죠? 어 안 사랑하는 건 아닌데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에요 예수님이 다시 그 질문을 할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를 내가 못 믿겠습니다.
분명히 나는 당신을 사랑하긴 하지만 내가 진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나에 대한 나의 평가를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아십니다. 당신은 진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진짜 내 마음의 중심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에 대한 나의 지식은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에 대한 형실의 지식이 나의 구원입니다.
그만큼 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용기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당신이 나를 정말 아십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당신은 완전합니다.
이게 베드로의 고백의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갑작스럽게 좋아하게 된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노래 난이도가 너무 높아가지고 이따 부르진 못할 것 같아요.
저는 못 부르겠어요. 근데 옛날에 별로 안 좋아했어요 이 노래를 왜냐하면 이 노래의 가사가 너무 유약하고 저는 좀 약간 도전적이고 뭔가 영광스럽고 영광이라는 단어도 좀 많이 들어가고 무슨 뭐 32 일체 하나님 이런 거 좋아하거든요.
근데 이 가사는 너무 유약하고 막 너무 패배자 같은 내용인 것 같아 가지고 별로 안 좋아했던 노래가 있었어요.
제가 가사를 읽어드릴게요. 제목은 주는 완전합니다 라는 내용이에요.
이거 좋아하시는 분들 계실 거예요. 제가 읽어드리죠.
주야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 합니다.
옛날에 이거 보면서 별로 안 좋았어요. 나 오늘 안 힘들었는데 나 오늘 힘이 넘쳤는데 우린는 오늘을 힘겨워합니다.
주듯 이루며 살기에 부족합니다.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 주의 금유를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 주님만의 길이 오니 우린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 날에 우리를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 가사가 너무 유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하나님 앞에서 진짜 나를 비추어 볼 저는 이렇게 밖에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압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조블 트로 넘어가죠.
첫 번째로는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거지만 두 번째로는요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는 겁니다.
이게 우월감에 반대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6절을 봅시다.
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신문 배 들어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여기는 절망과 소망이 뒤섞여 있습니다.
절망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십자가로 가는데 너는 못 따라온다 너는 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을 거다 내가 너를 위해서 죽는 길로 간다 그렇지만 너는 나를 위해서 죽을 수 없을 거다 그러나 나중에는 갈 거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세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예수께서는요 베드로의 진짜 마음을 아십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형편 없는지 아십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쉽게 실패하는지 아십니다.
베드로가 몇 시간 후에 이렇게 자랑차게 말했다가 몇 시간 후에 자신을 배신할 걸 아십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이 내가 나를 배신할 게 뻔하면요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싶거나 아 이 사람을 마음을 두고 싶지 않을 겁니다.
배신감 때문에요. 그렇지만 예수께서는요 한편으로는 네가 나를 배신할 거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요 그렇지만 너는 반드시 나를 따라올 거다 너는 반드시 나를 따라올 거다 지금 너는 못 따라온다 그렇지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 네가 변화할 때까지 니가 나를 정말로 사랑할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제가 지난주에 읽었던 책 중에서 프레디 뷰크너라는 사람의 어떤 장로계 목사님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있었는데요 그 정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이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전달할 때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읽어드리죠. 모든 능력 가운데 사랑은 가장 강력하면서 동시에 가장 무력하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동시에 무력하다고 말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최후이자 최고의 난공불락 요세를 정복할 수 있으므로 가장 강력하다.
그러나 상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가장 무력하기도 하다.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동시에 가장 무력합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볼 때 제 삶에서 변화가 있었다면 그 모든 변화는요 제게 무언가 강요를 하거나 뭔가 어떤 뭐 강압을 주었기 때문에 제가 변화된 건 없었습니다.
늘 사랑이 저를 변화시켰죠.
저를 사랑해 주는 제 선배 목회자들이나 리더들의 사랑이거나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의 사랑이거나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저를 무장해제시켰죠.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저는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변화되는 사람들은 힘과 강요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으로 변화됐죠.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강력합니다.
또 동시에 가장 무력하죠. 왜냐하면 제가 사람들을 섬길 때 저는 너무나 많이 느꼈습니다.
사람들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요구해야 하기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요.
여러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상황에 처하셨습니다.
그분은 베드로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쌍욕을 하지 않도록 머리채를 쥐어잡고 어디 딱 가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과정을 지켜보십니다. 인내하십니다.
그러나 버리지 않으셨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때까지 그 예수님을 그분은요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있어서 베드로를 변화시킨 가장 큰 힘 가장 큰 강력함과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무력감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골고다 언덕으로 가보십시오.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광경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동시에 가장 무력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힘을 보십니까? 아니요 비참한 사형수를 봅니다.
피를 철철 흘리고 사람들에게 비난 받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비난할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저들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라고 기도하는 무력한 존재를 봅니다.
그렇지만 그 무력한 존재가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까?
그 무력한 십자가로 말미암아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과 능력을 찾았는지 아십니까?
십자가는 가장 강력한 동시에 가장 무력합니다. 베드로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 여러분들의 정체성을 두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을 향한 그분의 큰 사랑에 여러분들의 정체성과 가치와 안정을 둔다면 여러분들도 변화됩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변화시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되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예수께서요 베드로한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심모아 시모아 사탄이 너를 밀값으로 듯 하려고 요구했으나 그러니까 간단하게 얘기하면 사탄이 너를 채가려고 자기 걸로 데려가려고 나한테 요구를 했다.
그렇지만 내가 너를 위해서 니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그리고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리처드 필립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탄은 베드로의 용기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이길 수 없었다고요.
여러분 여러분들의 장점들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신앙 따위는 사탄이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아 성취는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는요 여러분들의 외모는요 사탄이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외모 10년 지나 보십시오. 이미 사탄은 이겼습니다.
돈 여러분들 허무해질 겁니다. 여러분들 학력 여러분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탄은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지금 기도하고 계시는 그분의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게 여러분들의 정체성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경험하고 알고 있습니까?
설계가 길어졌지만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이야기니까요. 매일 묵상 하신 분들은 이 영화 이야기를 미리 들으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매일 묵상을 안 하시는 분들이 계실 테니까 재밌는 얘기니까 해드리죠.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봤습니다. 3 시즌이라는 영화입니다.
3 이렇게 발음 안 해도 되죠
베트남 영화예요.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위대한 영화입니다.
제가 되게 좋아하는 영화에요. 99년도 작입니다.
90년대 영화 좋아하는 거 아시죠? 참고로 이 영화는 유튜브에 무료로 풀려 있습니다.
한글 자막 다 달려서요 나중에 링크를 올려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 찾아보세요. 3 시즌이라는 영화는요 베트남 영화인데 세 가지 옵니버스식 구성으로 이야기가 돼 있습니다.
세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아 근데 그중에서 이제 한 이야기를 얘기해 드리죠.
아 이거는 인력 가꾼인 시클로 운전사인 하이와 그리고 창녀인 랜의 이야기입니다.
하이와 랜의 이야기예요. 시클로는 뭐냐 하면 이 인력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사람들 날라주고 하는 지금 보시면 택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택시 운전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이는 렌을 짝사랑합니다.
이 하이의 시클로를 탄 적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하이는 랜을 짝사랑하는데 랜은 창입니다.
랜이 가장 원하는 거는 렌의 화려한 삶을 꿈꿉니다.
레는 남자들을 통해서 그러니까 자기가 만나는 남자들을 통해서 자기가 이제 부유하게 되고 화려하고 높은 호텔에서 그러니까 하룻밤을 보내고 그러니까 사실 그런 데서 살면서 화려한 장신과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하게 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시클로 일력학군인 그 하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게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사실 랜도 하이한테 잠깐 마음이 있긴 했지만은 계속해서 거절합니다.
하이가 하찮게 느껴집니다. 랜이 하이가 계속해서 랜을 부르고 찾고 하지만 계속해서 랜은요 익십을 합니다.
그때 카톡이 있었다는 건 아니에요. 근데 어쨌든 그러다가 문제는 뭐냐 랜이 이제 계속해서 남자들을 통해서 무언가 구원을 받기를 바라지만 결국은 남자들은 랜을 이용만 합니다.
하룻밤 정욕을 채울 상대로 이용만 하고 계속해서 랜은 버림 받죠.
그러다가 하이가 시클로 운전을 시클러 운전하는 사람이라고 그랬잖아요.
근데 시클로 무슨 대회 같은 걸 나가요. 뭐 지금으로 치면 자전거 경연 대회 이렇게 뭐 보면 되겠습니다.
거기 대회에 나가서 이제 그 대회에 나간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대회에서 상금을 좀 얼마라도 받아 가지고 하이를 하룻밤이라도 사고 싶었던 거죠.
50달러가 있으면 살 수 있으니깐요. 하룻밤이라도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대회에 나갔는데 뜻밖에 우승을 해버려요.
돈을 꽤나 많이 벌게 됩니다. 그리고 하이 렌을 찾아갑니다.
여자를 찾아가요. 여자를 찾아가 가지고 이제 자기와 함께해 달라고 말합니다.
렌은 매물 차가 거절하죠. 그러니까 하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한테 50달러가 있어요. 오늘 밤 나와 보내줘요.
그리고 랜은요 그러자 그래 가지고 하이가 렌이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좋은 호텔을 예약해 줍니다.
그리고 거기로 랜을 데리고 가죠.
레는 말합니다. 빨리 해치우자. 그러니깐요 하이가 이렇게 얘기해 줍니다.
남자가요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내 선물을 받아줘요.
선물 박스가 풀립니다. 거기에는 아주 아주 예쁜 잠옷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잠옷을 입는데 화장을 지워주세요.
화장을 지우고 이 잠옷을 입어요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이가요 그리고 랜이 화장실에 들어가 가지고 화장을 다 지우고 잔 옷을 입고 나옵니다.
그리고 랜은 그냥 하룻밤 잘 줄 알았습니다. 하이하고 하이가 성관계를 할 줄 알았죠.
그런데 하이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누워 있어요.
여기 누워 있어요. 여기 누워서 잠드세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레는요 정말 정말 오랜만에 좋은 옷을 입고 안락한 침대에서 화장을 지우고 편안한 잠을 잡니다.
그리고 하이는요 그것을 밤새도록 쳐다보다가 아침에 나가죠.
그리고 그 이후에 레는요 여자는요 그 이후의 스토리도 있는데 그 이후의 스토리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거든요. 나중에 관심 있으면 보세요.
그런데 항상 이런 얘기 하면은 기도해라라는 메시지보다 이게 더 많이 남으시더라고요.
영화를 봐야겠다 오늘 설교의 결론 3 시즌을 봐야겠다.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기도의 자리로 더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아 근데 그 이외의 이야기는 안 할게요. 그렇지만은 제가 여기까지만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레는요 그 다음 날부터 자기가 원래 하고 있는 일을 하기 어렵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당장 그러니까 자기가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둔 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하는 것이 어렵다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삶을 살면서 자신을 이렇게 존귀하게 대해준 대해준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레는요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살았습니다.
자신이 존엄하다라는 느낌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누구나 다 자신을 이용하려고 들었습니다. 사실 성적인 매력을 사용해서 만족하려고 하는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이가요 별것도 아닌 사람이 이 일력 거꾼 하나가요 자기를 자기의 가장 귀한 걸 주어서 자기를 대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편안한 잠을 자도록 해줍니다. 자신을 이토록 사랑해 주면서 내가 이렇게 내가 귀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정체성이 바뀌는 순간 어 내가 뜻밖에 생각보다도 귀한 존재인지도 귀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 과거의 일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는 경험입니다.
똑같이 느끼는 감정이에요. 더 이상 과거에 가지고 있던 교만과 자신만만한 것, 죄가 낯설어집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랑을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존귀하게 여러분들을 존귀하게 높이시기 위해서 자신을 온통 내어주신 사건을 아십니까?
그것을 지성으로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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