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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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권위를 입으신 분
스스로 권위를 입으신 분
시편 93편은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로 시작한다. 새 번역은 ‘다스리신다’이다. 많이 들어본 ‘말라크’ 이다. 원문도 ‘아도나이 말라크’이다. ‘여호와께서’가 주어이다. 세상의 주권과 달리 하나님의 주권은 ‘스스로’이다. 그 의미가 ‘옷을 입히다’는 단어를 두 번이나 연속에서 사용해서 드러낸다. 스가랴 3:4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에서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권위를 입었다’, ‘능력을 입었다’로 번역을 했다.
옷을 입는 의미는 모두에게 스스로의 지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하신 왕은 ‘능력’과 ‘띠’를 이어지는 ‘세계’와 연결해 능력으로 다스리는 통치가 ‘공의, 의, 인애’를 통해 드러남을 그동안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악인과 의인으로 대조하는 시편은 악인과의 대치로 보고 ‘능력’, ‘띠’는 마치 악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여호와의 통치’의 모습을 그린다. 어느 누가 스스로 옷을 입고 왕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시편을 묵상하는 신자는 예수께 홍포를 입히고(타인에 의해) 머리에 관을 씌우는 장면이 떠올라야 한다. 또한 왕(하나님)이면 스스로 구원하라거나 내려오라는 조롱도 함께 묵상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통치는 영구하다고 고백한다. 그러하신 통치가 ‘세계도 견고히 서서’라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미가 4장에는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라고 사2장의 표현을 언급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사야는 ‘많은 백성’이라고 했다. 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왜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가 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공의(심판) 때문이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정의하고 심판 하신다. 그렇게 심판의 정당함이 드러나자 이방인조차도 여호와의 산, 전에 올라 올바른 가르침을 바라고, 그의 길로 행하자는 외침이다.
세계가 굳건히 설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통치하실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2절에 ‘예로부터 견고하셨고 영원부터 계신 분’이시다. 그러니 영원부터 계신 분이 견고하게 통치하시고 계신다는 기도자의 고백은 이어지는 자신의 상황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라는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문제가 크고 눈 앞에 버티고 있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는 시편22편의 고백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토로를 한다. 하나님의 부재의 상태를 비록 경험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다스리심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3절에 ‘강물이 소리를 지른다’는 표현은 이해는 쉽지가 않다. 중동 지방의 강물은 평상시에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라 있다. 강물은 생명이다. 그렇지만 ‘큰 물이 소리를 높였다’를 3번에 걸쳐 강조한 3절은 4절의 ‘높이 계신 여호와’와 비교된다. 강물이지만 평상시에 바닥을 드러낸다. 하지만 우기가 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땅을 집어 삼키듯 말 그대로 휩쓸고 지나간다. 물은 생명이지만 동시에 죽음과 파멸을 가져오기도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 비가 지역에 폭탄처럼 내린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크심과는 비교할 수 없다. 몇 백년 만에 내렸다는 비도 끝이 아닌 더 내릴 수 있다. 하루라더 더 내린다면 재난은 몇 배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하늘도 무심하다’라는 말을 내뺕지 않는가? 농부가 하늘을 원망해도 이내 상한 마음을 갖고 돌아서 다시 하늘을 기대듯 때론 기도자도 삶의 절망감을 안고 ‘여호와의 통치 앞에서’ 그래야 한다. 그렇게 기도자는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다. 흔히들 마음에 상처와 현실의 고통을, 요즘 말로 긁히는 상황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때론 하늘의 무심함을 한탄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기도의 자리에서 해야 한다.
기도자는 그렇기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온전히 고백하는 것이다. ‘더 크신 분, 소리를 높이는 큰 물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끝나면 안되고 기도자는 크심을 오히려 ‘주의 증거’로 고백한다. 우리는 스스로 크다 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본다. 권력과 돈을 이용해 자신을 크게 하려는 이들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 보고 있다. 마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이들처럼 말이다. 그러니 기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집어 삼키듯 몰아치는 큰 물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더 크신 분이심을 묵상하고 증거로 삼는다. 그리고 ‘주의 집에 합당하다’라고 고백한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로 번역되는 의미는 마치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한 ‘주의 집’처럼 딱 보아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성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고, 사람다움이 아름다운 것이고, 아이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처럼 여호와의 통치는 기도자에게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백이다.
어떤 이들은 보석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비싼 것, 희귀한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기도자는 오히려 흔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발견하고 진정한 ‘아름답다’을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