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이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바이블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9 views
Notes
Transcript
Handout

절제

사사기 14:1–9 NKRV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잠언 25:28 NKRV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는 언제 ‘금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가? 부모의 말을 엄청나게 잘 듣는 아이를 금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말을 더럽게 듣지 않는 아이를 보고 부르는 호칭이다.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출연하는 아이들의 이름과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금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대부분 아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은영 박사님에게 의뢰를 했지만, 정작 문제의 원인은 자녀가 아닌 부모에게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듣는다면 굳이 박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겠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전라도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이렇게 말한다. “왐마 부모 말도 드럽게 안 듣는구마잉, 어따 쓸까?” 부모 말을 안듣는 사람이 누구의 말을 듣겠는가? 한 마디로 답이 없고 구제불능이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절제’이다. 절제의 뜻이 무엇인가?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통제하고, 과도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금쪽이의 모습을 가진 삼손이 등장한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원수의 나라였던 블레셋에 대하여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여호와의 사자가 약속한다. 그렇게 약속된 삼손이 태어나면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지 시작하셨더라”라고 13장 마지막에 삼손에 대한 기대가 엄청나게 커진 상태였다. 그러나 삼손은 정반대의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도시인 딤나로 가서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적과 싸우기는커녕 블레셋 여자를 보고 결혼하려고 부모에게 요구한다. 블레셋 사람인 외국인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삼손의 아빠 마노아는 어떻게 할례도 받지 않은 원수의 나라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결혼하려고 하냐고 만류한다. 그러나 3절에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좋아하오니”는 보통 히브리어에서 ‘좋다’라고 표현할 때 쓰는 토브가 아니다. ‘옳다'라고 표현하는 야사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사사기 전체를 요약하는 주제인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에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가 ‘좋아하오니’와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다. 다시 히브리어로 직역하여 말하자면, 삼손은 “내가 저 블레셋 여자가 내 눈에 보기에 예쁘고 내 마음에 든다는데, So What?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전에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방 사람들과 국제결혼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또한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이방인들과 가까이 하지 말고 국제 결혼을 금지했다. 그러나 삼손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거룩하게 살아야할 나실인임에도 이러한 법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니 사사기 기자는 삼손의 처음 결정이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삼손을 사사 시대의 딱 전형적인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사 시대는 무질서의 시대이다. 여호와의 율법이 있었지만 그 법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던 시대가 당시 이스라엘이었다. 이처럼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만 행동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블레셋을 심판할 기회를 찾고 계셨다. 이러한 삼손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서원도 하고 그렇게 엄청난 기대를 품고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할까 했지만, 도움이 되기는커녕 율법을 어기며 살아가는 모습에 정말 가슴이 무너지고 답이 없어보일 것이다. 마치 중학생이 되서 세례도 받고 이제 뭔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으며 교회 일을 하고 섬기고 봉사할 줄 알았는데, 수련회가서 사고치고 제자훈련도 안 받겠다고 그러고, 주일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교회도 잘 안 나가려고 해, 여자친구 생겼다고 했는데 안 믿는 여자인데다가 몸에 문신도 많고 그러면 부모 마음이 어떻겠는가? 나는 아직 부모가 아니라서 정확히 모르겠지만, 분명 억장이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나는 아직 애기인 사랑하는 조카가 있는데,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나쁜 친구들 또는 못된 남자와 연애하다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정말 마음이 찢어지게 아플 것 같다. 4절 말씀을 히브리어 직역으로 읽어보기 원한다.
사사기 14장 4절 부모들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당시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칠 틈과 빌미를 찾고 계셨다.
삼손은 현재 지금 당장에 자신의 눈에 옳은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레셋에게서 빌미를 찾느라 분주하신 모습을 알 수 있다. 사사로서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기 본능에 몰두하는 삼손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빌미를 찾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대조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여호와께서 무대 뒤에서 블레셋을 칠 틈과 빌미를 찾고 계신다고 한다면 삼손이 오히려 방해가 되고,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상황이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선택된 종들이 사명을 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종들의 개인 일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야 말기 때문이다. 삼손은 본능을 따라 여인을 쫒아가지만 그런 삼손의 본능도 여호와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멋대로 딤나 여인을 데려가 결혼하기로 결심한 삼손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약속을 성취하실지 궁금하게 된다. 그렇게 마노아 부부는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삼손의 고집을 꺾지 못하여 삼손과 딤나와의 결혼을 허락해버렸다. 자신이 원하던 결혼을 하게 된 삼손은 딤나라는 지역을 가는 길에 젊은 사자를 만난다.
사사기 14:6 NKRV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삼손에 손에 어떤 무기도 없이 염소 새끼를 찢듯이 사자를 찢을 수 있었다. 곰은 사람을 찢지만, 삼손은 사자를 찢는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 임했기 때문인가? ‘여호와의 영’이 강력하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겁과 두려움이 없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누구의 능력인가?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삼손은 사자보다 강한 존재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하고 있음을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는다면 사자보다 강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사자를 죽인 것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분명 부모님이 엄청 싫어했을 것이고, 또한 나실인이 죽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7절에서는 어떤가?
사사기 14:7 NKRV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이다. 부모에게 말하지 않은 반면에 여인에게 말한 것을 보면 사자에게는 강하나 여자에게 약한 삼손의 모습이 처음부터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과 ‘옳은’이라는 단어의 반복을 통해 삼손이 ‘자기 소견(눈)에 옳은대로 행하는 전형적인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얼마 후 딤나의 여자를 데리고 오려고 가다가 자신이 찢었던 사자 사체를 본 것이다. 그 사체 속에 벌과 꿀이 있었다. 삼손이 사자의 사체에서 꿀을 떠서 먹고 자기 부모에게 가서 이것을 드려서 먹게 했지만, 죽은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나실인인 삼손이 사자를 찢어죽인 사체를 만지면 안되는 것도 모자라 나실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지켜야하는 사체에서 나온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꿀 앞에서는 나실인의 서약이고 맹세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삼손이 꿀 앞에서 정신을 못차리는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의 꿀은 단순히 자연산 벌꿀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꿀을 통해 볼 수 있는 삼손의 이야기를 통틀어서 첫 번째로 이방 여인을 가리키고, 두 번째로 이방의 문화, 이방의 삶의 방식을 좋아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삼손은 이방의 삶의 방식으로 살고 싶어 했던 사사 시대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형적인 대표 인물이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고린도후서 6:14 NKRV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첫 번째로 우리는 절대 믿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면 안 된다. 간혹 주변에 믿지 않은 사람과 결혼했는데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도 보게 된다. 대표적으로 베이직교회의 조정민 목사님의 이야기가 그렇다. 그러나 이 경우는 거의 희박하다. 오히려 신앙을 포기하기가 쉽지, 신앙을 붙잡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지 못했으나, 신약 시대가 들어와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믿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면 안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고, 사도 바울도 믿지 않는 자와 왜 결혼을 금하는가? 죄는 죄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 그래서 특히 역대기에 여러 족보가 등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에 고린도후서 말씀에도 바울이 의와 불법, 빛과 어둠으로 대조하며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 근로장학으로 같이 일하며 알고 지낸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는 교회를 안다니는데, 교회를 잘 다니는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뭔가 희망적인 회로를 돌려서 남자친구를 통해 교회를 다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누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남자친구를 교회에서 꺼내려고 만나는건데?” 그렇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이 연애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지만,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연애는 미래를 함께 그려가야할 목표로 하는 것이지, 전도 목적으로 한다면 서로의 관계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죄를 합리화하거나 신앙에 대해 타협하면 안된다. 무엇이든지 간에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거나 관리하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새벽기도 가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힘든 일이지만, 어떤 친구는 매주 이렇게 주일 예배에 나오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번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져서 현장 예배에 나오지 않는게 습관이 되어버리거나 여행 일정에 주일을 껴서 여행을 다녀오는게 한 번, 두 번이 되다가 나중에 아무렇지 않게 여겨 쉽게 타협해버린다. 한번 무너지면 그 이후에 쭉 늘어지기 쉽상이다. 삼손도 이방 여인에 대한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 가볍게 무시하다보니 찢어죽인 사자 사체도 만지고, 사체에서 나온 꿀에 정신팔려 먹은 것이다. 왜 죄를 합리화하게 되는가? 내가 기준이 되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쉽게 죄에 대해서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더욱 민감해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일예배 얼마나 잘 참석했는지 물어보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한다. 그러나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죄에 대해 둔감해지고 신앙에 대해 쉽게 타협해버린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은 선택한 백성을 절대 버리시지 않으신다. 성경에서 삼손을 봤을 때 그가 여호와의 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이든지 믿음이 연약하든지, 망나니 같은 자녀라고 할지라도 택하신 사람을 버리시지 않으신다. 삼손이 잘못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 그렇다고 우리의 죄악을 동정하거나 공감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여전히 일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분명하게 보이시기 위함이다. 후에 삼손이 이방 여자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눈이 뽑히고 머리가 잘렸지만,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정체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구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넘어질 수 있고, 어쩌면 삼손보다 더 제멋대로 살려고 하는 부끄러운 마음과 모습도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무엇을 기억하고 살아가야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가 어떠한 잘나서 그럴만해서 택하신 것이 아니다. 그럴만한 사람으로 만들어가시겠다는 오직 은혜 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려 죽으심으로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기를 소망한다. 자꾸만 타협하려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보다 편한 것,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따라가려는 마음을 십자가 앞에 모두 던져버리기 소망한다. 그리하여 오늘 나의 시선을 다른 어떠한 곳에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주님께 모든 초점과 시선을 맞추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