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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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 모세 대용
금송아지 = 모세 대용
오늘 본문말씀은 아마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인 금송아지를 만드는 백성의 내용입니다. 지난 31장까지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동안 하나님의 율법과 성막을 짓는 법 등을 계시로 받는 내용이 등장했죠.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게 말씀을 받고 하는데, 밑에 있는 백성들은 모세가 홀연히 시내산으로 사라져버리고 등장하질 않으니까 많이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1절에 보시면 모세가 내려옴이 더뎌서 백성들이 아론을 찾아갑니다. 그리고서는 “이보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모세라는 이가 산에 올라가서 저렇게 내려오질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소. 그러니 그의 형인 당신이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주시오!”라고 아론에게 간청하게 됩니다.
아론은 또 그 백성들 말을 들어서 “그럼 그대들의 아내와 자녀의 금 귀고리들을 빼어서 가져오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고서는 아론이 그 금붙이들을 모아서 녹여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아! 이 금송아지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다!” 라고 하면서 그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여호와의 절기를 지킵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서는 다음날에 이 백성들이 일어나서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는 내용이 6절에 등장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교회학교에서 들었을 때, 참 이해가 잘 안됐어요. 어린 마음에 그랬지만 “아니 앞에서 그렇게 바다도 갈라지고 구름기둥 불기둥도 봐놓고서는 왜 저러지?”싶었죠.
그런데 출애굽기를 이렇게 차근차근 한장씩 읽어보면서, 백성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면, 백성들이 모세가 사라졌다고 야단법석을 떠는게 이해가 됩니다.
이집트에서 백성들이 종살이를 하고 있어요. 하루종일 고된 노동을 해도 제대로된 밥벌이는 못하고, 감독관은 조금만 잘못해도 매질합니다. 심지어 숫자가 너무 많다고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려요. “제발 신이 계시다면 저희를 구원해주십시오!” 외쳐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세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여호와라는 신이 계신데, 너희를 구원해주신대.”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진짜로 보니까 모세가 말한대로 이집트에 여러 재앙이 나타나서 파라오가 자신들을 내보내줬어요. 그리고 광야로 향하는데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딱 드니까” 바다가 갈라지고, 애굽 군대를 휩쓸어 버렸죠.
광야로 갔더니 배가 너무 고파서 모세한테 따지고 드니까 갑자기 만나라는게 생기고 메추라기가 등장하고, 목이 말라서 모세한테 따지니까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더니 막 쏟아져 나오고, 모세가 나뭇가지 하나 던졌다고 쓴물이 막 단 물로 바뀌고, 아말렉하고 전쟁할 때는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지는걸 본겁니다.
따지고 보면, 백성들 입장에서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모세가 자기들을 인도해낸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지어서 축제를 벌이니까 7젏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모세야 어서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너의 백성”이 부패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우상으로 섬긴 것은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5절에도 보시면 아론이 금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절일이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백성들이 섬긴것은 먼저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주는” 모세였고, 모세가 안보이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줄” 금송아지로 대체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겼고, 그 다음에는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데, 그 모습을 보면 말로는,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환난이 닥치게 되면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떠나게 됩니다. 만약에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사람과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흔들리지 않아야하는데, 사람과 건물을 보게되면 모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백성들처럼, 모세를 섬기다가 대체품으로 금송아지를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칠 때 “대체품”을 찾습니다.
모세를 봤던 백성들은 모세가 사라지면 금송아지를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세가 사라진게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가 사라져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죠. 오늘 함께 기도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순종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순종
그렇게 금송아지를 세운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십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싹 진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를 세우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아주 크게 노하시는데, 모세가 하나님을 말리죠.
“아이고 하나님. 어째서 당신의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신 주님의 백성에게 그렇게 진노하십니까? 애굽사람들이 ‘야야, 쟤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죽이려고 인도했나보다’하고 조롱하게 만드십니까? 부디 화를 내지 마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이화를 내지 말아주시옵소서. 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약속하신게 있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말씀하신 화를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셨다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얼핏보면 하나님께서 삐지셔가지고 “어? 내가 저놈들을 기껏 구해냈더니 이제는 무슨 소를 갔다가 세워놓고 섬기고 앉았네. 모세야, 응? 내가 그냥 싹 날려버리고 내가 참 좋아하는 너한테서 큰 나라를 세워야겠어”라고 말씀하시는데 모세가 “아이고 왜이러십니까”하고 말리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을 잘보면 아까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야, 네가 인도해낸 네 백성이 부패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모세는 “주님께서 인도하신 주님의 백성”이라는 말로 응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진노하신 것도 있지만, 동시에 모세도 시험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모세야, 너도 너가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구했다고 생각하니?”
그러나 모세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바로 모세가 백성들처럼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14절에 “뜻을 돌이키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대답하는 장면은 단순히 하나님을 만류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세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만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뽑으라고 하면 뽑는 대통령이 있죠.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라고 하는 대통령인데요,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미국을 하나의 연방국가로 만들었다는 큰 업적이 있습니다. 이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를 폐지하려고 하자 미국 남부에 있던 백인들이 크게 반발해서 내전을 일으켰는데요,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게 되고 정말로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게 됩니다.
링컨의 비서가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있었군요. 정말 감사하네요.” 그러자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시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느냐는 것일세.” 링컨의 이 말이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의 그 말과 행동으로 미국에서 끔찍한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흑인들이 해방되었습니다. 사람의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내편으로 만드려고 내 입맛에 맞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내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저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모세처럼,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산 자 vs 죽은 자
산 자 vs 죽은 자
본문말씀 후반부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26절 말씀부터 보시면 모세가 백성들을 향해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서는 자들은 내게로 오라”라고 하니까 레위 자손들이 나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칼을 가지고 이문에서 저문까지 오가면서 자기 친족과 친구와 이웃을 닥치는대로 죽여라”라고 합니다.
28절에 보시면 그렇게 삼천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요, 모세가 그 다음날에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부디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하지 않으시면 저를 생명책에서 지워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데,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그 사람을 내 책에서 지우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 읽을 때마다 저희를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 친족과 친구와 이웃을 죽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죠. 더군다나 십계명에도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놓으셔놓고 왜 여기서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사건을 두고서 고린도 전서에 쓴 말이 있는데요,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이 우상숭배하는 내용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라고 알려준다고 하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래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상숭배하면 가족, 친구, 이웃이라고 할 지라도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상숭배가 무시무시한 벌을 초래하는지 깨닫게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저희가 이렇게 레위인들처럼 문자 그대로 칼을 들고 나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죠?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죽이는 율법이 아니라 살리는 영”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율법의 시대, 모세의 시대에는 “우상숭배 했어? 너 죽어!”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우상숭배 했어? 너 그러다 죽어! 어서 믿음으로 살아야지!”로 바뀌었다는 것이죠.
오늘날의 저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고 있습니다. 어제 주일 말씀에서도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있고, 오늘 본문에도 생명책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요, 비록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믿음은 살리는 것이라고 예수님을 믿는 저희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부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저희들로 하여금 “가족 친지 이웃을 죽여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어서 가족 친지 이웃을 살려라!”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기도하실 때에,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아니라 먼저는 모세를 바라보고 이후에 금송아지를 대체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내 입맛에 맞는 금송아지가 아니라 모세처럼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만큼의 큰 힘을 지닌 순종하는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또한 “내 가족 친지 이웃”에게 복음이 심겨져서 살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