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에 서지 마십시오 2025 0820 창12:10-20

창세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0 views
Notes
Transcript
설교참조 : 2022 0625 샤밧예배 – 선택의 기로에 서지 마십시오. 창12:10-20
Genesis 12:10–20 NKRV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오늘 우리 본문은 창세기 12장 1-3절 에 나오는 “레크-레카”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주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히브리서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가 그를 설명하는 것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나선 믿음의 조상입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땅으로 길을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하나만 붙잡고 주의 명령을 따라서 나아간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 행보가 그의 위대한 믿음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믿음을 따라온 약속의 땅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본문에는 심한 기근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생존에 대한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버리고 이집트 땅으로 내려갑니다. 또 그는 이방 땅에서 객사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까지 벌이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람의 이 행보는 12장 전반 부분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100% 순종하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불신앙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앞뒤 재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도착한 모습기근이라는 현실의 문제 앞에 자신의 지혜와 선택으로 이집트 땅으로 내려가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이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본문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과 설교가들의 이해를 보면 대체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도 끝까지 그것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의 길로 나아갔다.
기근이 발생하자 마자 아브람은 곧바로 이집트 땅을 생각해내고 약속의 땅을 버렸습니다. 또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거죠? 그로 인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망칠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내려가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던 아브람의 믿음 없는 모습을 보며, 현실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 앞에 믿음 없는 선택을 하는 우리의 모습 또한 반성해야 한다는 교훈까지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있었어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도 있었어요! 그런데 현실의 문제를 마주할 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는 거예요. 구분을 하는 거예요. 믿음을 지키냐 아니냐의 문제로 해석을 하고 있는거예요.
또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를 바로가 데려가면서 온갖 선물을 받게 됩니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를 두고 아브람의 세속주의적 욕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사래가 다시 아브람에게 돌아오면서, 바로는 아브람을 책망합니다. 아브람은 바로의 책망에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 또한 아브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를 따른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받고도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선택을 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편집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그의 선택 현실의 문제에 맞닥뜨려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인 선택을 동시에 12장 한 장에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의 초창기 신앙의 성장 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22장에 가서는 아브람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까지 하는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람의 이 모습을 통해서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고민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 때 어떠한 선택이 믿음의 선택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인지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성경 본문의 뒷편으로 들어가보길 원합니다. 거룩한 상상력으로 성경 본문이 말하는 그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과연 아브람은 심한 기근이 찾아와 굶어 죽게 생긴 상황에서 어떤 고민도 없이 곧바로 불신앙처럼 보이는 선택을 내렸을까요? 사래는 자신을 누이라고 말하게 하는 아브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바로가 아내를 데리고 가는 와중에 아브람은 자신이 살게 되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요? 잘못은 아브람이 했는데, 하나님은 왜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 믿음 없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단순히 아브람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 이런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이러했다는 식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알게 된 “선택의 기로”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의 선택이 정말 믿음 없는 현실적인 선택일 뿐이었는지, 나아가 우리의 지금 신앙생활 속에서 동일하게 만나게 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이 믿음의 선택이고 불신앙의 선택인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든 분들에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깨달음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에서 공부하면서 관심 있는 분야는 “하나님의 숨어계심”에 대한 이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침묵” 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소망을 잃게 합니다. 이러한 감정을 잘 느낄 수 있는 성경이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자신이 처한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울부짖습니다. 이것은 성경시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고민과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엎드립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바로 응답해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때론 우리는 기한 없는 하나님의 침묵을 맞닥뜨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속 시원하게 하나님이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해주시면 좋겠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니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 지 골머리를 앓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정착하려고 보니 기근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심한 기근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목민족의 전통으로 볼 때, 아브람은 단신으로 가나안 땅으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자신의 가신들, 재산 그리고 조카 롯까지, 대단위로 함께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위기에서 아브람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할까요? (일밤-인생극장 “그래! 결심했어!” A,B 루트)
굶어 죽더라도 기근이 든 가나안 땅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하나님이 굶어 죽기 전에 출애굽 시대 때처럼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보내주셨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죽지 않아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기근이 들지 않은 땅, 하나님이 만드신 나일강의 축복으로 곡식이 풍부한 이집트로 잠시 내려가는 것 또한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의 최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그 외 다른 지역이 절대로 가면 안 되는 불경한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게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큰 오해입니다. 유대교인들도 오직 자신들만이 선민이고, 나머지 이방인들이야 구원을 받든 말든, 지옥의 불쏘시개처럼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이죠. 온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집중으로 구원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간 이유가 비신앙적인 것을 선택하기 위해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다른 신들에게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져버리지 않으면서, 가장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의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고 해서 믿음 없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굶어죽지 않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고민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집트가 당대에 어떠한 권력과 위세를 지닌 나라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가는 와중에 이집트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예상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아름다운 아내를 뺏어 갈 위험이 분명히 있다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래가 65세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 때문에 살인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1947년에 처음 발견된 사해사본 중에서 Genesis Apocryphon, 창세기 외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노아, 아브라함, 롯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000년전 신앙인들의 창세기 주석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사래의 아름다움을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머리, 눈, 코, 입, 팔, 손, 다리, 가슴, 몸매 등 모든 것이 아름다움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바로가 강제로 아브람에게서 데려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 때 아브람이 죽임을 당할 뻔하자 사래가 아브람이 자신의 오빠라고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 아브람은 조카 롯과 함께 하나님께 통곡하며 울부짖습니다. 위대한 하나님, 세상 만물의 창조주, 온 열방의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사래를 지켜 주옵소서, 바로와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소서! 아브람은 비록 자신과 사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긴 했지만, 그것이 결코 자신만 살자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이렇게 일이 벌어질 것에 대한 예상을 하면서 살기 위해 고육지책을 짜 낸 아브람에게 과연 믿음 없다고 감히 판단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몸부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신뢰를 잃지 않는 아브람의 믿음이, 어쩌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만 바라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지 않을까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 뭐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그 답을 얻고자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그들이 겪었던 고난. 세 친구는 이방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불 속에 들어 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풀무불 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실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실 지라도 이방 신상에 절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선포합니다. 단 3:14-18
Daniel 3:14–18 NKRV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런 믿음을 보였던 세 친구. 믿음으로 죽으면 죽겠다는 각오. 우리가 글로만 읽어도 이렇게 감동적이다. 그러면 하나님도 감동 받고 좀, 풀무불 불에 들어가기 전에 풀무불이 꺼져 버린다던지, 아니면 그 불이 튀어나와서 느부갓네살 왕이랑 거기 있는 모든 자들을 다 불태워버린다던지, 그런 기적 보여 주시면 안될까?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이 불에 던져지기 전에 그들을 건지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의 천사가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기 전에 그를 막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현실적인 고난은 반드시 찾아오며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 들어가야 구원을 경험합니다. 사자굴에 들어가야 구원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너를 구원해보라고 조롱했지만, 구원의 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작동방식을 바꿔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다는 것에 믿음을 거십시오.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한다. 불에 던져져도 주님이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도 믿음이며, 그렇지 않고 불에 타 죽더라도 주님을 향한 내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도 믿음이다.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니까 그곳에서 굶어 죽을 것 같은 경험을 하는 선택도 믿음이고, 주변 국가에 의지해 굶주림을 면하고 자신의 씨를 지키기 위한 것도 믿음입니다. 우리가 섣불리 믿음 없음의 순간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판단은 내 스스로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될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기근을 없애주지 않으셨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선택과 그 와중에도 아브람과 사래를 책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아브람이 정말 믿음 없는 선택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복을 주관하시고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선택이 때로는 무모해 보이고, 불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절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이 스스로 지켜나가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에 약속을 붙잡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갈 바는 알지 못하지만, 수많은 현실적인 선택이 다가올테지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 그 말씀만을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불신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고 해서 믿음 없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겪어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져가는 우리 신앙의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떻게 지켜지는지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은 때로는 침묵하며 숨어계시는 듯 보입니다. 주님의 부재를 느끼는 가운데 행하는 우리의 선택들은 때로 믿음이 없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들 때문에 내 믿음없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재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신뢰하며,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향한 나의 신뢰를 내 스스로 폐기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내가 선택한 모든 행동들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택의 기로에 서지 마십시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 속에서 만나는 고민과 어려움의 터널을 지날 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갈5:16-17
Galatians 5:16–17 NKRV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여기서 행하라는 원어 단어가 “페리파테오” 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걷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신약번역본도 “할라크”라고 걷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걸어라. 우리의 삶은 주와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해야할 기도는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걷고 계심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