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36) 끝까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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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위한 계시
제자들을 위한 계시
요한복음 1~12장은 표적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인 계시였다.
이제 13장부터는 조금은 더 사적인 제자들을 위한 계시로 이어진다.
우리도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여름캠프를 계기로 조금은 더 사적인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이어져 나가기를 바란다.
끝까지 사랑
끝까지 사랑
끝까지 사랑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주제이고, 베드로에게 부인할 것을 예언하며(31절 이하) 이후에 21장15절 이하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이 끝까지 사랑에 대한 내용을 상기시키신다.
신앙생활에는 늘 주기가 있다. 여름캠프나 수련회를 기점으로 가장 상승하게 되고, 또 9~10월쯤 시들했다가 11~12월에 크리스마스 기점으로 상승하고, 또 연초에 바쁘게 보내다보면 시들해지다가 4월 부활점 기점으로 상승하고, 또 시들 상승 시들 상승의 반복이다.
먼저 성숙한 사람들은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기마다 사랑을 쏟아부어주며, 시들지 않게 실족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돕는다. 사랑을 주는 쪽이 고갈되면 다같이 시들어가고, 사랑을 받는 쪽이 잘 자라서 주는 사람이 되면 더 건강하게 성장하는 공동체가 된다.
캠프를 통하여 우리는 사랑을 퍼주는 사람들을 경험했다. 이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목포에 와서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통해 사랑을 쏟아 부어주고 갔다. 이곳에 심겨진 믿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잘 자라서 열매맺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잘 자라야 한다. 아직 자라지도 못한 우리가 섬길 것을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만사에 다 때가 있으니 우리는 때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싫은 마음, 제자들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 자신의 영광을 따라 살고싶은 마음 등을 잘 지키셨다. 마귀는 늘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 뱀이 하와에게 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거야 라고 속삭이듯이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
가룟 유다는 마귀의 유혹에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예수님은 너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해, 무능하고 무식하고 나약한 존재야. 너희 3년은 허송세월이었어.
이제라도 저 예수를 팔아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눈에 들도록 해. 그리고 너도 그들과 같은 무리에 속할 수 있게 되는거야!!’
유다는 마음의 이 속삭임에 넘어갔고, 마귀는 그 틈에 유다의 생각에 예수를 팔 것을 집어 넣었다.
베드로는 결코 세상이 다 버려도 자기는 예수님을 안버린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회개함으로 인해 다시 그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끝까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유다와 베드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했느냐입니다.
둘 다 똑같이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자책감으로 인해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후에 기회를 스스로 끊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괴로워했지만 이후에 예수님을 만나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좋을 때도 많이 있지만 싫을 때도 많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눈에 계속 보이고, 부족한 것들과 잘못된 것들이 계속 마음에 거슬립니다.
목회자가 무능하거나 윤리 도덕적으로 부족해보이기도 하고, 리더십에 부재로 인해 불편함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세족식은 우리가 모든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가끔 세족식을 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성경에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는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끝까지 사랑하는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하는 것을 지금은 알지 못하나
내가 하는 것을 지금은 알지 못하나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여기서 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자기가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판단함으로 인해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저도 낙원교회에서 성도로 신앙생활을 했을 때 지금 산정동 교회 목사님이신 김성진 목사님이 청년담당 목사님이셨어요. 참 많이 불편함을 표현도 하고, 요구사항도 많았습니다. 내 생각에 이렇게 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왜 이걸 못하시지?? 하며 어린아이처럼 떼쓰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교육자를 해보니까 김성진 목사님이 너무 이해가 되고, 그때 왜 그러셨는지 잘 알겠어요.
그래서 이제 김성진 목사님과 너무 공감이 되고 화살이 담임목사님께로 넘어갔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이렇게 좀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담임목회를 해보니까 이전에 담임목사님이 이해가 되고, 아쉬운 마음보다 그리운 마음이 훨씬 더 커졌습니다. 김성진 목사님은 자주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 장승민 목사님은 서울로 가셔서 통화하기도 쉽지 않아요. 옆에 있을 때 잘 지낼 걸 가까이 있으면 소중한 걸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보낸자를 영접하는 것은
내가 보낸자를 영접하는 것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이라는 말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집으로 초대해서 극진히 모신다라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에 초대해서 내 마음에 귀한 분으로 여긴다는 뜻이죠.
우리는 이렇게 영접하는 나와 그렇지 않는 나를 봅니다.
남자들이 밖에서는 그렇게 젠틀하고 스마트한데 집에 오면 완전 말이나 행동이 천하게 바뀌는 경우도 있고,
여자들은 전화받을 때와 일상이 목소리가 다른 경우도 많이 있죠.
그런데 나의 가장 좋은 모습으로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보낸 자를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가족이죠.
가족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입니다. 가족을 대할 때 막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족이야 말로 끝까지 사랑해야 할 섬김의 대상입니다.
두번째 교회와 목회자 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족이며, 목회자는 그 가정의 가장으로 보냄을 입은 자 입니다.
세번째 이웃들입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고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 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우리 모두 처음사랑했던 그 마음을 간직하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