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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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택받은 나그네, 흔들리지 않는 산 소망
본문: 베드로전서 1:1-9
(설교 시작)
서론: 세월 속에서 느끼는 낯섦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제가 늘 아이들이나 청년들과 함께 있다가, 이렇게 우리 교회의 기둥이시고 뿌리가 되어주시는 귀한 어르신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또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도 아직 한참 어리지만, 그럼에도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성도님들도 엊그제 청춘이셨을 것 같은데,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하시고, 어느새 자녀들 다 키워서 시집, 장가보내시고 이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주들 재롱을 보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요. 저도 이제야 아이 하나 키우면서 우리 어르신들이 걸어오신 그 길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된 길이었는지를 아주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생을 한결같이 교회를 지키고, 가정을 지켜오신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속에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감정이 하나 있으실 겁니다. 바로 ‘세상 속에서의 낯섦’입니다. 저희는 세상 속에서 구별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심지어 때로는 가족들이나 자녀들과도 아무리 친하고 가깝다고 하더라도 신앙이라는 지점에서 서로가 도저히 건너갈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기도 합니다.
이 신앙이라는 지점에서 지인들이나, 혹은 자녀들과 감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잘되라고 믿음으로 살라고 사랑으로 조언하다가 서로 얼굴 붉히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너무 별난가 싶기도 하고, 신앙 없이도 다들 잘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너무 믿음 믿음 하면서 유난 떠는가 싶기도 할 때가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 신앙인들이 없다면 외롭기까지 합니다.
신앙으로 인해 때로는 면박을 당하기도 하고,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세상과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극단적으로 세상을 배척하디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낯설기도 하고, 이질적이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요, 그 모든 감정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아니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론1: 흩어진 나그네, 그러나 선택받은 나그네 (1-2절)
베드로전서 1장 1절과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1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해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나그네가 무슨 뜻입니까? 자기 고향을 떠나 잠시 다른 곳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우리의 시민권, 우리의 진짜 본향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이 아닌,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이자, 주변인이며, 외국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통치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평화와 안정과 번영을 위해 정책적으로 통일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통일성을 위해 황제 숭배를 강요했죠.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 부적응자, 별종 취급을 받으며 대대적인 핍박을 받았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세상에 흩어져 핍박을 견디는 그 삶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의 삶도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또 어려웠던 시절과 보릿고개를 지나며, 신앙 하나 붙들고 살아오실 때, 먹고 살기 힘들어 주일 지키는 것조차 힘들었을 때가 많으셨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세속적이라서 더 잘 살고, 더 높아지는 걸 좇아갈 때, 말씀대로 순종하며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다가 손해 보고,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으신 적도 왜 없으셨겠습니까. 때로는 예수 믿는다고 가족들에게 지인들에게 배척당하고, 핍박당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홀로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 외롭고 고될 때가 참 많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다음에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흩어지고 배척받는 나그네인 우리가, 역설적이게도 실은 ‘선택받은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2절 선택받은 나그네
2절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나그네가 된 것은 그냥 팔자가 사나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성부 하나님을 통해 창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 안에서 저희는 선택받은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과 부르심이 삼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떠도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본향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보호와 축복을 누리는 특권적인 신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나그네가 되게 하신 목적은 그럼 무엇일까요?
2절 말씀에 이어서 나옵니다. 먼저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역사하고 인도하셔서, 죄악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되는 사역을 우리 안에서 이뤄가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도 저희의 순종은 불완전해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죄를 짓게 되고, 아직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해주십니다.
피를 뿌린다는 것은 구약의 희생제사나 정결의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와 피 뿌림을 통해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의 해결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연결되어, 다시 나그네의 소명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정리하자면, 성부 하나님께서 나그네된 성도들을 선택하시고, 삶을 인도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며, 순종케 하십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은 우리는 계속 실패하기에 성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우리의 죄를 씻겨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즉 ‘선택받은’ 나그네의 삶 속에서 계속적인 실패와 좌절, 어려움 속에서도 삼위 하나님이 연합하여 ‘선택하신’ 나그네들을 책임지고 이끌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베드로의 말처럼 은혜이자 평강의 근거가 됩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이미 삶으로 체험하고, 고백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비록 하나님 나라라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흩어진 나그네와 같지만, 본향으로 돌아가는 그 모든 여정을, 저희를 보내신 삼위 하나님께서 이렇게 함께 해주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본론2: 나그네의 유혹 – 정착민이 되기
그런데 이 선택받은 나그네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유혹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뿌리내리고 살려는 ‘정착민’이 되려는 유혹입니다.
물론 저희 어른들께서는 평생 땀 흘려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키우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오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귀하고 성실한 삶의 열매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일궈온 이 땅의 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요, 최종 목적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미 삶의 여정을 많이 지나오신 성도님들께 이 유혹은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보다는, 내가 평생 일궈온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식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내가 평생 고생해서 이 집을 마련했는데…”, “내가 우리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래도 내가 모은 것이 이만큼인데…” 하는 마음들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땅에서 모아 온 것들이 우리의 안전과 평안의 근거가 될 때, 우리는 나그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의 것들이 우리 영혼의 닻이 되어, 하늘 본향으로 떠나야 할 우리를 붙잡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과 하나님의 부르심은 나그네이며, 영적인 노숙자이며, 그 길은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 길인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힘든 여정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거처를 구하려고 노력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의 가치와 방식을 따라 성경의 순종과 거룩의 가치가 아닌 성공과 번영의 논리를 따라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유혹이 됩니다. 저희의 정체성은 분명히 말씀처럼 나그네인데, 나그네가 아니라, 거주민이 되고, 정착민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돈과, 더 큰 성공, 더 넓은 인맥, 더 건강한 육체, 더 나은 배우자, 더 좋은 집, 좋은 직장과 출세 등. 이 모든 것이 목적이 뭡니까? 이 땅에서 안정적인 정착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조들(히브리서 11장)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결코 이 나그네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예시가 히브리서 11장에 많이 나오는데, 먼저는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 9절과 10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히11:9 (아브라함)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육적으로도 나그네가 되었지만, 말씀에서 그는 믿음으로, 즉 영적인 의미에서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살았습니다. 영적인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가 된 것임을 계속해서 상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도, 일부러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얼마든지 돌로 집을 짓고 정착할 수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나그네임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10절의 표현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성이 아닌 진정한 본향이자, 영원한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11장 13~1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으면서도, 이 땅에서 약속을 받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하면서도, 멀리서 분명히 그 본향을 보고 환영하며, 나그네임을 자처했습니다. 이로써 본향 찾는 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정착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고향이나 그 어떤 곳도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성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모든 것을 내어주서라도, 그 밭을 사는 모습과 같이, 눈 앞의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하고 찬란한 더 나은 본향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이어서 이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 더 나오는데 모세입니다. 히11:24-26입니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당대 최강대국인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완벽한 정착민의 삶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왕자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노예 백성인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하늘의 상이 이 땅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영원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이미 가진 모든 것을 영원한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주님이 부르시면 두고 떠날 수 있는 ‘청지기’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크고 작음을 떠나서 우리가 평생 일군 이 모든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 앞에서 이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며, 언제든 훌훌 털고 하늘 본향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나그네의 마음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도? 신대원에 가고 종종 만나게 되는 목회자나 전도사님이나 지인분들께서 말씀하시고 조언하시기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큰 교회에 가서 배워야 한다, 큰 사역을 경험해야 한다 하십니다. 또 큰 교회에 가면 한 학기에 400, 500만원씩 하는 학비도 전액장학금을 준다고 추천하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들을 들으며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이 모든 이유들이 결국은 내가 잘 살고, 내가 잘 되기 위함일 뿐임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보내신 곳에서 순종하기 위해 이 사역의 길을 나아가는데, 말만 하나님의 종이라 말하며, 세상과 똑같은 기준으로 더 환경이 좋은 곳, 더 돈 많이 주는 곳을 찾아가면 그것은 나그네가 아니라 정착민의 선택일 뿐인 것이죠.
물론 하나님의 때가 차고,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보여주시도 하겠지만, 그전에 먼저 하나님께서는 충성하라 말씀하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되지 않은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나님의 부르신 곳에서 충성되이 사랑하고, 충성되이 순종하고, 충성되이 사역하고 섬기며, 더 나은 본향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중에 있습니다.
저와 경우는 다르더라도 저희의 삶 속에서 이러한 세상 속에서의 안락함과 정착에 대한 유혹은 끊임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나그네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군대에서 5분 대기조가 있듯이, 때가 되면 다 버리고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아갑시다.)
본론3: 우리의 소망 - 흔들리지 않는 보호와 기쁨 (1:3-9)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나그네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결심으로는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산 소망’ 때문에 가능합니다. 본문 3절에서 5절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3절의 ‘산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소망입니다. 이 산 소망은 우리의 본향과 구원과 부활에 대한 소망이자 기대이며,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셨기 때문에, 저희에게 너무나 현실적이고 믿을만한 소망이 됩니다.
이 산 소망의 목적은 4절에 보니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유업은 이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간직하신 영원한 예루살렘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계속해서 이 땅의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유업으로 여기고, 정착민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과는 반대로 땅에 있는 것은 반드시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땅은 로마에, 열강에 뺏기고, 유대인들은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유업은 물질적이지도, 유형적이지도, 지상적이지도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유업은 4절 말씀처럼 하늘에 하나님께서 고이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보상을 바라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못하게 되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좌절합니다. 이 땅에 우리의 유업과 보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의 물질적이고 유형적인 보상이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약속을 이 땅에서 눈으로 보지 못했음에도 믿음으로 나아간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본향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5절 말씀처럼 예비된 구원의 약속이 있었고, 이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원을 안팎으로 보호하시며 지키시기에, 저희는 하나님의 유업과 구원을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담대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기쁨과 시험의 목적(6-7)
이어서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우리의 나그네 인생길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이 찾아오고, 돈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며, 평생의 동반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자녀로 인해 속을 끓이고, 외로움이 깊어질 때가 있습니다.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서 다 필요하기 때문에 허락된 것입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7절에서처럼 우리 믿음의 불순물을 고난이라는 풀무불로 태워 없애고, 참된 믿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참된 믿음은 언젠가 없어질 금보다도 훨씬 귀하며,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라는 상급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최고의 기쁨: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교제 (8-9절)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미래에만 겨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8절과 9절 말씀에서는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고 의지할 때 경험하는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우리는 아직 가보지 못한 본향의 기쁨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미리” 이 땅에서도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맛보며 살아가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과 동행해오신 우리 성도님들은 이 기쁨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실 줄 믿습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세상이라는 낯선 땅을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고, 때로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 잃은 낙오자가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 있고, 성령의 보호하심을 받으며, 성자의 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선택받은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온 이 삶의 자리는 그저 생존의 터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나그네임을 증언하고, 보이지 않는 본향을 소망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거룩한 순례자의 길이었습니다.
이 땅에 쌓아둔 것들에 대한 미련이 마음을 흔들 때, 기억합시다. 우리의 진짜 유업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 있습니다. 지금 겪는 고난은 우리를 정금같이 만들어, 주님 앞에 설 때 가장 큰 칭찬과 영광으로 빛나게 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은 이 땅의 집문서나 통장이 아니라, 바로 이 ‘나그네라는 믿음의 유산’입니다. “당신들께서는 평생 이 땅에 소망 두지 않고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사셨습니다”라는 평가를 받는 그 믿음의 뒷모습이야말로 가장 값진 유산이 될 것입니다.
남은 저희의 하루하루가, 믿음으로 지나온 은혜를 기억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시선을 옮기며, 믿음으로 작은 순종을 드리는 복된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걸음마다 함께하시는 주님의 위로와,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