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원자 하나님
Notes
Transcript
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생애 중 가장 비극적인 한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었다.
다윗은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두었고, 성경에 나오는 자녀들의 이름만 해도 약 20명 정도가 됩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킨 압살롬은 마아가라는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으며, 그에게는 다말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압살롬의 반역은 불행한 가정사와 다윗의 리더십의 부재를 배경으로 하고, 다윗의 아내 아히노암에게는 첫째 아들 암논이라는 소생이 있었는데, 이복 여동생인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였다.
이 일로 압살롬은 분노하여 암논을 죽였고, 이 사건 후에 그는 외조부인 그술왕 달매의 영지로 도망을 갔다. 거기서 3년을 보냈다.
군대 장관 요압의 중재로 압살롬은 다윗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분노와 상처가 가시지 않아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도 2년 동안이나 만나 주지를 않았다.
압살롬은 아마도 자신의 여동생 다말이 형 암논에게 강간 당했을 때 아버지 다윗이 형을 엄정히 처벌하고 다말을 위로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웬일인지 다윗의 리더십은 간 곳이 없었고, 사건은 유야무야 해지고 있었다.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 대한 실망이 반감으로까지 변해갔고, 급기야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시기가 다윗에게는 영적으로 가장 어둡던 침체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총명도, 결단력도, 정의를 구현할 의지도 없었다.
II. 나의 구원자 하나님
II. 나의 구원자 하나님
압살롬은 5년 만에 아버지 다윗과 표면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4년에 걸쳐서 철저하게 반란을 준비했다.
자신을 호위할 많은 군인과 병거와 말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성문 앞에서 왕의 송사나 재판을 받으러 오는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훔쳤다(사무엘하 15장 2-3, 6).
압살롬은 다윗 왕을 속이고 헤브론으로 가서 계획하였던 거사를 도모하였다.
또한 다윗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던 아히도벨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이외에도 예루살렘의 유력 인사 200명을 속여서 마치 자기 편에 가담한 것처럼 과시하였다(사무엘하 15장 11절).
때가 되자 압살롬은 기습적으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선포했다(사무엘하 15장 10절).
다윗에게 이 반란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욱이 이때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는 슬픈 소식을 들어야 했다.
다윗은 황급히 예루살렘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길로 향했고, 여전히 다윗을 사랑하는 백성들은 눈물로 왕을 배웅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 왕궁을 떠난 다윗은 백성들과 함께 황급히 감람산길로 올라갔다.
이때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어서 올라갔다(사무엘하 15장 30절).
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통한 슬픔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겸비한 복종의 표시입니다.
이때가 다윗에게는 생애 최대의 위기였고, 인생의 벼랑 끝에 홀로 선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큰 시련과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윗의 영혼을 향한 은혜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다윗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고난받는 자신에게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저지른 밧세바와의 음란이라는 범죄와 그가 당한 압살롬의 반역이라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신령한 지식이었다.
본 시편 3편을 통해 다윗이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을 3절은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A. 나의 방패이신 하나님
A. 나의 방패이신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나의 방패이시다.
[성경 속 방패의 이해와 의미]
당시 이스라엘 병사들은 목적에 따라 다양한 방패들을 사용했는데, 크게 두 가지 종류가 대중적으로 사용됐다.
첫째로 ‘마겐’이라는 방패인데, 이는 높이 약 1m, 폭이 50에서 70cm쯤 되는 대형 방패였다.
방패의 소재는 단단한 나무와 가죽으로 이루어졌으며, 방패를 세우고 그 뒤에 엄폐를 하면 적의 화살이나 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셸레트’라는 방패인데, 지름이 30에서 60cm쯤 되는 원형 혹은 타원형의 소형 방패였다.
이 방패는 한 손에 끼워서 사용했으며, 적의 칼이나 창의 공격을 재빨리 막아내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언급된 방패는 첫 번째 것 곧 마겐이라는 방패였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는 환란 속에서 다윗이 받은 공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또 하나는 그런 공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윗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셨는지를 말해준다.
[시므이의 저주와 비난]
다윗에게 고통을 준 것은 압살롬을 비롯한 반란에 가담했던 무리들의 무력적 공격만이 아니었다.
다윗이 바후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지방 사람이자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인 시므이가 나타나서 모욕과 저주를 퍼부었다.
"...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의 가문을 멸망시켰다는 비난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언제 사울을 대적한 적이 있었던가?
사울은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에 의해 폐위되어 버림받지 않았던가?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반응]
다윗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던 비난은 바세바와의 간음 사건과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살해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윗은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나 그 징책으로 지금 망명 길에 오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시므이는 다윗에게 욕설과 함께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장군 아비새가 분노하여 당장 시무이를 죽이겠다고 하였지만, 다윗은 그를 만류하였다.
"...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벤자민 워필드의 시편 해설 인용]
지금 다윗을 때리는 질책인데, 하나님의 섭리적으로 보면은 이거는 어떤 거냐 하면은 그렇게 때리시는 과정을 통해서 이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회개했지만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고정되게 만들어주는 사건이었다는 거예요. 그 섭리 속에서 보면은 결국 다윗이 질책을 받는 이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깊은 심화된 신학을 터득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벤자민 워필드라는 학자가 있어요. 세계 20세기에 3대 칼빈주의자가 있는데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그다음에 벤자민 워필드 이렇게 세 사람이 근데 벤자민 워필드 천재였어요. 그분이 사모님이 아프셔서 4시간 이상 사모님 옆을 떠난 적이 없대요. 그랬는데도 남겨놓은 전집이 이걸로 한 칸, 두 칸, 세 칸 정도 될 정도로. 근데 로이드 존스가 워필드를 극찬하면서 이제 워필드가 영국과 유럽에서 널리 일으키게 돼요.
근데 그 시편을 해설하면서 그런 얘기를 해요.
다윗이 우리의 아내와 우리아의 아내 바세바와의 간음 사건이 없었더라면 절대 깨닫지 못했어요.
복음의 깊은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이제 설명을 해요.
[다윗의 고난을 통한 탁월한 신앙]
여전히 다윗을 사랑하던 백성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또 하나 이제 다윗의 훌륭한 점이 뭐냐 하면은 여기서 다루지 않았는데 법궤를 안 가져가요.
근데 가져갈 수 있었는데 안 가져가요. 법궤가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가지고 가야 마땅하다.
근데 이제 다윗이 뭐라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가 돌아와서 법궤를 다시 볼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은 이가봇의 일화가 생각이 나죠.
엘리가 제사장일 때 이제 블레셋과의 싸움에 법궤를 메고 가잖아.
하도 쫄리니까 그거 들고 나가면 이길 줄 알고. 근데 이제 된통 깨지고 법궤는 빼앗기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법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이제 다윗의 탁월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 것들을 이 고난을 통해서 터득하게 돼요.
[다윗의 신앙 고백-나의 방패]
시므이와 같은 자들의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모욕과 물리적인 위협만이 가득하였다.
도망가는 신세도 처량한데, 시므이의 모욕은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비참한 처지에 마음 둘 곳 없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가리켜 “나의 방패”라고 고백한다.
우리말 개역 개정 성경에는 이 부분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그리고 “야웨시여, 당신은 나를 둘러싼 방패이시며”가 된다.
이는 다윗을 보호하고 있는 방패가 당시 원수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그를 둘러싸서 보호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히 큰 방패였음을 보여준다.
그 비밀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나 다윗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일체의 침묵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왕국의 운명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다.
당시 다윗이 직면한 사태는 마치 전쟁터에서 홀로 남은 병사가 빗발치듯이 쏟아지는 적군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다윗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결코 도우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시편 3편 2절).
[나의 방패의 의미-화살받이 되신 하나님]
다윗은 오직 신앙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장 외로운 때에 하나님은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께로 피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큰 방패가 되어 주셔서 당신 뒤에 숨은 다윗을 대신해 모든 시련의 화살을 대신 막아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환란과 시련 속에서 고난을 겪었지만 결코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아주 쓰러지지는 아니하였다.
비록 그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징계였으나, 다윗이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또한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셔서 그를 대신하여 많은 화살을 맞아 주셨다.
다윗은 큰 환란에서 고통을 받을 때 “나의 하나님이여 지금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비난을 당하고 모욕을 받을 때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 주셔서 자신과 함께하시는 그 모든 화살을 자기 대신 맞아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아픔이 곧 하나님의 아픔]
사람이 사람을 징계하는 것과 하나님이 신자를 징계하는 것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가?
전자의 경우에는 징계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매질을 할 뿐이고, 징계 받는 자는 혼자서 고통을 감당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징계하시면서도 우리가 겪는 고통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참하신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큰 아픔을 더 많이 겪으신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 때문이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머니라면 잘못한 자식을 때릴 때 어머니 자신이 매 맞고 있는 자식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지 않겠는가.
육신의 부모도 그런 심정이라면 완전하신 하나님, 온전한 사랑의 하나님은 얼마나 더욱 그러하시겠는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방패가 되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전쟁터에 혼자 남았을 때도 하늘을 덮을 듯이 새까맣게 날아오는 그 수많은 화살을 당신의 온 몸으로 막아주신다.
그 큰 방패 뒤에서 어린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두려워 떨었으나 우리는 안전할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방패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존 오웬의 책, 성령을 통해 성화의 의미 강조]
그래서 17세기 영국 최고의 청교도 성학(학문과 목회를 겸하던 사람을 일컬음,Divine)이었던 존 오웬은 자신의 책 성령 제3권 2부 제5장에서 고난 받는 다윗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크고 끔찍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은 탁월하게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으며 그분을 향해 있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 중에 그래서 그 사람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고, 또 그 사람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포 낫 위드 스탠딩 낫 위드 스탠딩 디즈 그레이트 앤드 드레드 풀 폴스 예 워스 더 하트 오브 데이빗 에미는 틀리 앤드 싱글, 라릴리 픽스드 오픈 가 앤드 포 힘 세미콜론 앤드 에즈 데어 워스, 넌앤 히 컴마 오브 올드 디파인드 맨션 오브 인더 스크립처 ...”
존 오웬에 따르면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자신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어떤 사람들보다도 크게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해되죠. 큰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양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거죠.
시인 다윗은 분명히 죄를 지었고(1.범죄), 그래서 (2.징계), 그러나 그는 징계로부터 (3.회복)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통해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의 본보기가 되었다.
[적용]
하나님은 이처럼 징계를 받는 다윗을 위해서도 방패가 되어 주셨다.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시지 않겠는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때,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생각하면서 방패되시는 그분의 뒤로 피하여 숨는 것이 믿음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서 그 모든 화살을 대신 막아주시며, 당신의 생명 싸개 안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시련의 때를 견디고 우리의 방패되시는 주님을 깊이 만나는 계기로 삼으라.
B. 나의 영광이신 하나님
B. 나의 영광이신 하나님
둘째로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시다.
[다윗의 수치의 연속과 강화-아들, 시바, 아히도벨]
압살롬의 반역은 그의 생애에 있어 전대 미문의 커다란 시련이었고, 고통이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미워하여 천륜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비의 목숨을 노렸지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미워할 수 없었다.
[므비보셋을 모함함으로 다윗을 속이는 시바]
황급히 오른 망명길은 일찍이 다윗이 겪어본 적이 없는 수치의 연속이었다.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친구 요나단이 남긴 아들인 절름발이 므비보셋에게 종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였다.
시바는 다윗이 도피할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싣고 다윗을 환대했다.
그러나 그는 므비보셋이 다윗을 따라오지 않는 것이 “그가 남아서 이스라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라며 다윗에게 거짓말을 했다(삼하 16장 3절).
다윗은 어리석게도"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은 다 네 것이라"(사무엘하 16장 3절).라고 성급히 선언합니다.
다윗은 이로 인해 거듭된 배신의 고통을 느꼈으며, 또한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를 남겼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제껏 남달리 총명했던 다윗에게 이 사건은 치욕스러운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아히도벨의 이간질과 살해 위협]
장군 아히도벨은 다윗이 가장 아꼈던 참모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변심하여 배신자가 되었고, 주군이었던 다윗을 죽이고자 했다.
다윗은 그에게 선을 베풀었으나 아히도벨은 그 선을 악으로 갚았다.
그래서 다윗은 탄식했다.
“내가 신뢰하여 떡을 먹었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편 41편 9절).
다윗을 대적한 아히도벨의 사악한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압살롬을 설득하여 백주의 대낮에 그것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게 하였다(사무엘하12장 11-12절, 16장 21절).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과 압살롬 부자를 철천지원수가 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다윗은 이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느꼈고, 왕으로서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히도벨의 악행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니 그는 다윗을 추격하여 살해하고자 하였다. (사무엘하 17장 1-3)
[다윗의 수치에 대한 반응]
다윗은 시므이와 같은 자들의 공개적인 저주와 모욕, 시바와 같은 교활한 자들의 기회주의적인 배신을 당했다.
그리고 친구와 같았던 아히도벨의 치명적인 배신도,
또한 자신이 사랑하던 후궁들이 자신의 몸으로 낳은 아들에 의해 백주 대낮에 강간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는 영원히 땅바닥에 처박히는 것과 같은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다윗은 그러한 수치스러운 삶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믿음을 굳건히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순종과 죄를 철저히 회개하였다.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다윗은 더욱 겸비해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다윗에게 가장 비참하고 고독한 일이었다.
[영광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런데 이 뼈 아픈 시련을 통해 시인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히브리어의 영광 ‘카보드’는 무겁다 중요하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의 상태 카베드에서 왔다.
따라서 히브리어에서 카보드라는 단어는 “무게, 짐, 소유, 방휘, 위험, 영광스러운 표지, 권위, 커다란 빛이 나타남”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말 개정 성경에서 영광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존귀하게 하시는 분"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수치]
하나님은 우리를 이유 없이 수치스럽게 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악 그리고 과오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만큼 스스로 커다란 수치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수치 속에서 절망하여 죽음을 택하거나 자포자기하여 막 살지 아니하였다.
사실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의 생애에 다시 없을 수치를 온통 뒤집어 썼다.
[다윗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하나님의 영광]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게 하였다.
비록 죄를 범하였으나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다윗을 영원히 버림받은 자처럼 내버려 두셔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는 다윗에게는 영광이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존귀하고 고유한 것이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 없이 우리 자신의 탁월함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수치스러움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어거스틴 인용]
이에 대해서 이제 유명한 명문이 나와요.
이거는 평생 기억해 둬야 될 건데, 이에 대해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그의 책 "본성과 은혜에 관하여 ” De natura et gratia 제3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자랑하려고 합니까? ... 결국 우리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라고는 죄 밖에는 또 다른 아무것도 결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걸 아는 건 고유한 건 죄밖에 없다는 거예요. 나머지는 전부 다 선한 것이 있으면 그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거라는 거.
“보 에르고 체크, 하베 모스 콤마 우트 프로 프리에 노스트롬 시트 콤마 니시 백카 2 beccatum”
[다윗이 수치 속에서 발견한 영광의 출처]
시인은 이러한 큰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사람에게 속한 영광이 결코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인간이 스스로 자랑하는 영광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한때 시인은 많은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휘황찬란한 왕관과 화려한 왕궁의 영광, 그의 손에 들린 홀과 복종하는 만조 백관과 백성들로부터 받는 영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임금으로서 백성들에게 받던 인정과 사모함의 영광들이었다.
다윗은 그것들이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그 소중한 잃어버림의 경험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가 누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것”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압살롬 반란의 평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얼마나 너그러우신 분인지를 보라.
드디어 반란이 평정되고 왕권을 되찾게 되었다는 승전의 기쁜 소식은 압살롬의 사망 소식과 함께 전해졌다.
다윗은 죽은 아들 압살롬을 위해 통곡하였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아 "(삼하 18장 33절).
[다윗의 인간성과 요압의 권고]
그러나 요압의 권고에 정신을 차린 다윗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문으로 나갔다.
이 권고가 뭐였죠? “그렇게 압살롬을 슬퍼만 하고 있으면 모든 백성이 당신에게 등을 돌릴 겁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이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이스라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 마음까지도 잃어버린다.” 이런 참모가 있어야 돼.
이렇게 결정적인 때에 핵심을 찌르는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들을 둔 사람들은 복이 있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모였고, 다윗의 왕권은 회복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과 함께 전해진 다윗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시므이의 사과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이제 여기서 이제 이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이제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시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해줘요.
그토록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하였던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 천 명과 함께 내려와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다윗의 용서를 구하였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금 잃어버렸던 다윗의 영광을 되찾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와 허물로 잠시 수치를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끝인 것처럼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원수는 그렇게 주장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 이심을 굳게 믿고,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한다면 수치 속에서도 결국은 다시 우리의 영광이 되어 주신다.
[적용]
잠시 겪는 수치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는 자들은 다시 영화롭게 해주신다.
그리고 합당한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게 해 주신다.
다윗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때에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며 수치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시인 다윗의 영광을 회복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하자.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시다.
커다란 시험과 모진 고난 속에서도 오직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자.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를 낮추신 그분이 우리를 다시 높이시지 아니하겠는가.
C. 나의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
C. 나의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
셋째로 하나님은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신다.
[머리를 드는 상황 설명]
시인 다윗은 3절에서 마지막으로 고백한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다".
이는 왕궁에서 죄인 혹은 미천한 백성이 왕을 알현하는 과정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궁의 화려함과 보좌의 위험에 눌린 죄인 혹은 백성이 두려움으로 떨며 궁정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린다.
그때 왕의 마음은 친절함으로 가득하게 되고, 자신 앞에 엎드린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려다 본다.
그리고는 말한다. "그대는 고개를 들라.”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왕의 친절하고 위엄이 있는 목소리는 고요한 궁정을 울리며 엎드린 자의 가슴에 다가온다.
“고개를 들라”라는 이 말은 곧 엎드린 자에 대한 왕의 호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제부터 왕이 그의 마음에 있는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겠다는 의미이다.
구약 성경에서"왕 앞에서 머리를 든다.”는 것은 종종 왕을 만나거나 잃었던 직분을 다시 하사받아 직무에 복귀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창세기 41장 13절).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의 이야기예요.
[머리를 드는 상황의 신학적 설명]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신가?
죄 때문에 잠시 우리를 낮추시지만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를 다시 높여주신다.
하나님이 높아진 자를 낮추고자 하실 때, 그것을 막을 사람이 없듯이, 비천함으로 많이 낮아진 자를 다시 존귀하게 하고자 하실 때 또한 그를 막을 사람이 없다.
이에 대해 중세의 탁월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시편 주석 3편 3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데 재미있는 건 뭐냐 하면은 조사를 해보니까 이게 교부들은 이 시편 3편 3절을 기독론적으로 해석을 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을 하고 구속사적으로 해석을 했다라고 말.
근데 시편 주석이 익스포지 to 수페르 풋살 모스
"왜냐하면 인간의 머리 곧 이름하여 정신이라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굽어져 땅을 향하고 있으나(은총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죄로부터 떨어져 하늘로 들려 올려질 때 바로 그때 인간의 머리는 위로 들리워지게 됩니다.”
"입성 애인 카파트, 호미니스, 감마, 스킬링, 스틸리, 체트, 스칠리 체트, 맨스, 콤마, 프로프테을 페카톤, 에어로, 순, 이아 체트, 콜론, 세드, 꿈 led, 또라, 베카토, 컴마, 통크, 에리기, 뚜르카프트, 포밍니스”
[머리를 드심의 기독론적 해석]
주께서 우리의 머리를 드신다는 것은 곧 “죄와 수치로부터의 회복”이다.
동시에 영적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놀라운 “영적 계몽”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무지했던 죄인들을 시험 속에서도 진리로서 새롭게 깨닫게 하실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준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비록 죄와 불순종으로 잠시 미끄러졌다고 할지라도, 수치심으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영원히 살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하는 하나님께 대한 떨림, 끌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으로 다시금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자녀들의 머리를 들게 하신다.
[적용]
그러므로 죄와 불순종으로 잠시 떠났던 자리,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정하신 자리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명예와 영광을 되찾게 해 주시고, 영혼을 쇄신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지성은 천명을 회복하고, 마음은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보라 아버지는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여호와이시다.”
“그분께로 우리의 마음을 향하자 그분으로부터 소망을 발견하자.”
III. 적용및 결론
III. 적용및 결론
다윗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상황에서 대적들에게 에워싸였다.
대적자들은 시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였다(시편 3편 2절).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당신을 애처롭게 부르는 다윗을 다시 만나주셨다.
그리고는 비난하는 자들의 독화살과도 같은 구설의 다툼으로부터 방패가 되어 주셨다(시편 31편 30절).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다윗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를 주셨다.
모든 것이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었다.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은 다윗의 머리를 들게 해 주셨다.
이로써 그는 범죄와 회개 그리고 회복에 이르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 영혼의 변화와 심령의 쇄신을 경험하였다.
지금도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처지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우리를 도우시지 않겠는가?
다윗을 새롭게 하사 다시 살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당신 앞에 새롭게 살게 하시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