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in, or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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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
협력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이 무엇인가? ‘join, or Die’이다. 이 말을 해석하면 무엇인가?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이다. 이 말을 누가 했냐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었다. 당시 미국 아메리카의 땅이 13개의 식민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렇게 식민지를 나누고 미국의 독립을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영국이었다. 그리하여 벤자민 프랭클린이 13개의 식민지에게 연합하여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뤄내자고 내세웠던 슬로건이 ‘join, or die’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13개의 연합과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도 함께 연합군으로 뭉쳐서 1783년에 전쟁을 마치게 되어 미국은 독립국가로 수립되었다. 이 역사적인 배경으로 미국은 주마다 법도 다르고 운영방법이 다르지만, 각각의 주가 뭉쳐서 미합중국이라는 USA가 탄생하게 된다. 오늘 주제는 ‘협력’이다. 영어로는 ‘Cooperation’이다. 뜻은 이렇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행위”이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지 각자의 목표가 다르면 결코 하나될 수 없을 뿐더러, 결국에는 사라지게 된다. 대한민국도 IMF 때 국민과 정치인들이 하나로 뭉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협력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오늘 읽은 성경은 고린도전서이다. 이것은 편지로 쓰여진 것인데 수신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다. 당시 고린도 지역이 항구 도시여서 상업이 아주 발달한 곳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잘 사는 곳일까, 못 사는 지역일까? 마치 미국의 라스베가스처럼 화려하면서도 부와 방탕함이 가득했던 도시가 바로 고린도 지역이었다. 2000년 전에도 그렇고, 요즘 시대에도 공통된 점이 있다. 도시가 부유하고 잘 살면 점점 개인주의가 된다. 그래서 실제로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문제의 시작은 사람들이 서로 잘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러 파로 나뉘고 교회 안에서 소송을 걸고, 은사가 있냐 없냐를 따지고 결혼관이나 이혼에 대해서도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성만찬과 부활에 대한 논쟁이 많았던 교회가 고린도교회이다. 이러한 교회에 사도 바울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회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지도하는 이야기로 오늘날까지도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문제인 분파 문제를 오늘 사도바울이 지적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제발 헛짓거리 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교회 안에 4개의 분파로 나눠져 있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파와 현재 고린도교회 담임목사인 아볼로파와 게바라고 부르는 베드로파와 예수님이 최고라고 하는 그리스도파가 있다. 왜 이렇게 나누어졌는가 배경이 이렇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래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따르는게 맞지 않겠냐며 따르는 파가 생겼다. 아볼로는 성경지식도 뛰어나고 말을 논리적으로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썼던 편지와 글은 엄청나게 잘써서 사람들이 기대했는데, 실제 설교는 못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역시 설교를 잘하는 지금 담임목사인 아볼로가 최고하고 여기는 파가 생겼다. 게바파라고 불리는 베드로파는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음식을 제한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겠다고 모든 음식을 허용했으나 베드로는 3번이나 거절했다. 이러한 베드로를 보고 구약의 율법을 잘 지키는 베드로가 최고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의 인간들의 가르침에 따르기 보다는 성령을 통해서 직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서 강조점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된 기준과 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각자 의견이 쟁쟁한 상황 속에서 같은 마음을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일까? 바울은 자신이 자주 쓰는 표현법이 있는데, 이러한 표현법으로 성도들의 뼈를 때리는 말을 전한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생각해보라. 성경에서 교회를 누구의 몸이라고 표현하는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바울이 자주 비유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몸이 각자의 인격체를 가져서 손이 발을 비판하고, 눈이 팔을 비판하는 각자가 따로 나뉘어진 몸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그러니 하나가 되어야 할 몸이 어떻게 분리되겠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나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나요?”라고 성도들에게 정신차리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우리를 위해서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후에 세례에 대한 이야기가 쭉 언급된다. 당시에 교인들의 핫이슈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따졌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라고 하는 두 사람과 스데바나의 가정에 세례를 주었고 그 이외는 세례를 준 기억이 없다고 한다. 만약에 다수가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더라면 혹여나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착각할 사람이 있을까봐 세례를 적게 준 사실이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한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천주교에서 낙원교회로 온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전에 성당에서 세례받은 친구는 세례를 인정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부님에게 받았기 때문에 너는 목사님께 다시 세례를 받아야해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사도 바울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신부님이 세례를 주었든지 목사님이 주셨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더라면 그 세례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누가 주는 것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천주교에서 우리 교회로 올 때, 우리가 믿는 신앙의 고백을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 다시 교리교육을 받은 후에 세례를 다시 받는 것이 아닌 입교식을 진행해 정식교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만약에 다시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세례가 예수님의 이름이 기준이 아닌 사람이 기준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기준으로 두며 예수님을 진정으로 내 인생에 주인이라고 고백하며 사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하고 고백한다. 이 복음은 사람들의 귀에 좋게 하기 위해서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듣기 좋게 여러 좋은 말들로만 꾸며서 사랑의 하나님만 이야기하고 정작 중요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어쩌면 하나님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난 주에 어느 모임에 초대를 받았었다. 보통 세상에서 모임이나 파티라고 하면 술모임, 술파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초대받은 곳은 술을 안마셔도 되는 곳이라고 하여 승락하고 열심히 가서 고기도 먹고 제로콜라 마시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교제를 했다. 그 중에서 어떤 한 자매가 나에게 와서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 내 직업이 뭔 줄 아냐고 물어봤다. 트레이너 아니냐고 답을 하는 것을 보고 “아니다. 나는 교회 전도사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자매가 어쩐지 교회오빠 같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태신앙의 교회 고인물이었던 나는 청년 때 셀장도 오래 맡았던 경험으로 파티장의 분위기를 셀모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아냐고 물어봤다. 그 친구는 무교라서 4대 성인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근데 그거 알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말하니까 충격을 먹었다. 자신이 기독교 대학에서 4년이나 다녔는데 단 한번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희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가 그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고,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며 이야기를 마치고 그 친구가 주말에 시간되냐고 물어보았는데 출근해서 어렵다고 말했고, 주중에는 뭐하냐고 물어봐서 학교가야한다고 말하고 모임을 마무리했다. 사도 바울은 세례를 베풀러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다면, 나는 연애를 하러 파티에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우리 사람으로 하나되지 말고 예수님으로 하나되길 소망한다.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사람이 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계가 있고 누구나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변함없이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어쩌면 삶이 괴롭고 힘듦 중에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서 평안과 기쁨이 내 안에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힘든 순간을 이겨낼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실 수 이유는 예수님만이 참 사람이시면서 참 하나님이시기에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할 때, 하나님이 나를 왜 이 학교에 보내셨는지, 왜 이런 사람을 알게 되었는지, 내 주변에 왜 안 믿는 친구들이 많은 지를 몸소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을 실제로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의 느껴지는 삶의 공기가 다를 것이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있든지 예수님이 삶의 기준이 되어, 당당하게 예수님을 전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꿈사땅 모두가 되기를 축복한다. 용기가 안날 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 분명히 담대한 마음과 그 순간 주님이 여러분의 입술을 사용하실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