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다시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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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
주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기억할 때, 우리의 경외심이 회복되고, 감사가 살아나며, 일상이 새롭게 보입니다.”
[서론]
제가 아는 연예인중에 박혜숙 권사님이 계십니다.
같은 교회를 다닐때 권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주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났지만 겉으로는 일상이 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 속에서 바뀐게 있었습니다.
매일 걷던 길인데 꽃의 향기가 나더랍니다.
새가 막 지저귀며 노래하듯이 들렸답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조폭출신 분중에 ‘용팔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필리핀에 있을때 우리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셨던 분입니다.
이 분도 주님을 만난 후 삶이 변한 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변했느냐?
자신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이전과 똑같은 일상인데 세상이 달라보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여서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자신 안의 메말랐던 경외심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경외심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심어놓으신 마음의 나침반입니다.
깊은 존경심, 놀라움, 감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나침반이 잘 작동하면 우리 삶 속에 감사와 기쁨이 샘솟고,
매일의 일상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런데 이 나침반이 고장나거나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면,
마음에 교만과 오만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 결과 자아숭배나 영적 빈곤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세상에 찌든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격이 너무 퍽퍽하고, 마음에 전혀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사실은 경외심이 고장난 가진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고장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울감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의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하루빨리 회복해야할 마음이 바로 이 경외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경외심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시길 축복합니다.
[본론1]
오늘 시편은 예배때 사용하는 찬송시입니다.
이 시편의 가장 큰 특징은 반복입니다.
반복을 통해 주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반복은 ‘감사하라’는 명령입니다.
1-3절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3절까지 ‘감사하라’는 명령이 3번 등장합니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에는 3절 이후에도 계속해서 ‘감사하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4절부터 ‘감사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완전수 3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26절에도 감사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마치는 시편입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마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는 왜 매주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바로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바쁘고 각박한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쉽게 감사를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감사 대신 불평과 불만만 마음에 쌓아둘 때가 많습니다.
예배는 이런 메마른 마음에 감사의 샘을 다시 터트리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고장난 마음의 나침반을 다시 경외로 되돌리는 자리입니다.
만약 예배를 드렸는데도 내 안에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136편은 어떤 상황에서 쓰였을까요?
이스러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시대에 쓰여졌습니다.
우리는 스가랴서를 통해 그 시대가 어땠는지 알고 있습니다.
기대와 달리 현실은 너무 냉혹했고,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멀게만 느껴지던 때입니다.
모든게 감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불평, 불만만 쌓였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감사를 외칩니다.
왜일까요?
감사는 기분에 따라 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상황과 조건이 좋을 때만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감사는 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능력을 제대로 경험할수 있습니다.
마음이 감기가 들었을 때 특효약이 바로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의 비밀을 알고 있던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전 5장 18 “범사에 감사하라”
바울은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이 말은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나쁜 일도 정신승리하며 감사하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의미입니다.
상황이 아닌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교회차를 몰다가 졸아서 앞차를 박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교회에 25만원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심방하다가 일어난 일이라서 정말 억울하고 짜증났습니다.
돈도 없는데 그냥 쌩돈 나간다며 투덜댔습니다.
그러다가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사고를 통해 졸음운전의 위험을 깨달았으니 25만원은 값싼 수업료구나”
만약 그 수업료가 제 팔 하나 다리 하나였다면 어땠을까요?
끔찍하기만 합니다.
저는 그제서야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본론2]
그럼 무엇이 우리 마음에 감사를 회복시킬까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다시 살아나게 할까요?
바로 주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들은 무려 26번, 모든 구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편의 핵심주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란 히브리어 ‘헤세드’입니다.
‘주님의 은혜, 은총, 자비, 사랑’, 그 어떤 말로도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이런 주님의 인자가 영원하다는 말은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변치 않음을 의미합니다.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은 세가지 측면에서 드러납니다.
첫째, 창조 세계입니다.
5-9절입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 별, 하늘과 바다, 땅을 질서 있게 만드셨습니다.
지구는 적당히 기울어져 돌고, 해와 달은 역사상 자신의 자리를 이탈한 적이 없습니다.
바다는 땅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창조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움 안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증언하는 무언의 설교자입니다.
우리는 그 자연을 바라보며 경외심을 회복하게 됩니다.
장엄한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누구나 작아집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광대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느끼며 겸손해 집니다.
믿는 우리는 그 경외심의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게 됩니다.
저도 최근에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경주로 교회 수련회를 갔을 때 첫째날 그 아름다운 자연을 기억하신가요?
노을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무수한 모양으로 자라난 소나무들은 그림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솜씨가 이처럼 놀라울수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내 안의 경외심이 되살아 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주 마음의 나침반을 잃어 버립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무뎌질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안에 무뎌진 경외심을 일깨우는 영적 촉진제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 속에 숨어있는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경외심을 찾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인자하심은 단지 자연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10-15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수백년 동안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홍해를 건너갈수 있도록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시인에게 출애굽 사건은 먼 과거의 일입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십자가는 여전히 유효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종,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로마서 5장 8 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배는 이런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기억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이런 구원의 감격이 되살아날 때 우리 안의 경외심이 회복됩니다.
셋째,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16-26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적들은 강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은 연약했고, 불평했고, 자주 넘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먹이시고, 지키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뭐가 잘났다고 그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신 것일까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신실하신 사랑, 변함없으신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 길도 광야입니다.
때로는 혼자있는 것같은 처절한 외로움에 몸부림을 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영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의 비천한 때도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과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넘어지고 흔들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오히려 그 광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편 136편은 한 가지 진리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인자하심은 창조 세계를 통해, 구원을 통해, 삶의 인도하심을 통해 나타납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혹시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이 무료하고 지치고 피곤하지는 않습니까?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감사의 눈, 경외의 눈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해와 달, 하늘을 한번씩 쳐다보십시오.
주변의 꽃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맛보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경외심이 되살아 날 것입니다.
일상 속에 숨어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내 책상 모서리에도, 바닥에도 십자가는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외심이 되살아 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광야입니다.
때로는 외로움과 고난, 불확실함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감사는 경외심의 표현이고, 경외심은 예배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나침반이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입술과 삶에서 주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감사의 고백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