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 2025 0831 신4:7-9

신명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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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eronomy 4:7–9 NKRV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서론: "살아있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살아있네~"라는 말 아십니까? 한 영화 대사로 유명해진 경상도 사투리인데요, 아주 멋진 것을 보거나 대단한 것을 경험했을 때 터져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단순히 '숨 쉬고 있다'는 뜻이 아니죠. '생동감이 넘친다', '정말 진짜 같다', '최고다'라는 극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유행어 같은 질문을 우리 영혼에 한번 던져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을 보실 때, 과연 "오, 내 아들, 내 딸, 너 정말 살아있네!" 하고 감탄하실까요? 아니면 그저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 맞춰 사느라 지쳐서, 하루하루 겨우 버티는 '생존'에 가까운 모습일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좋은 집, 안정된 노후, 자녀의 성공이 진짜 '사는 것'이라고 쉴 새 없이 속삭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모습일까요? 성경은 “살아있는”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우리가 성경의 위대함을 알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고대 세계가 어떤 곳이었는지 잠시 여행을 떠나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들의 창조 이야기인 ‘에누마 엘리시’를 들어보면, 세상의 시작은 끔찍한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젊은 신 마르둑이 반역을 일으킨 거대한 여신 티아마트와 싸워 이깁니다. 그리고는 티아마트의 시체를 칼로 둘로 갈라, 그 반쪽으로는 하늘을 만들고 나머지 반쪽으로는 땅을 만듭니다. 세상이 신의 시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전쟁이 끝나자 신들은 자신들을 위해 일할 노예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티아마트의 부하였던 킹구라는 신을 죽여, 그 피를 흙과 섞어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인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는 더 기가 막힙니다. 태초에 하급 신들이 땅 파고 물길 내는 노역이 너무 힘들어 파업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신들은 회의 끝에, 그 노역을 대신할 존재로 인간을 만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인간이 너무 많아지자, 시끄러워서 신들의 왕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대홍수를 일으켜 쓸어버리기로 합니다. 겨우 살아남은 인간이 제사를 드리자, 굶주렸던 신들이 제물 냄새를 맡고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이 믿었던 세상의 모습입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만들어진 세상, 신들의 노예로 태어난 인간, 신의 잠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멸망당할 수 있는 존재. 그곳엔 사랑도, 존엄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세상 한가운데,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은 폭력이 아닌 선하신 ‘말씀’으로 세상을 질서정연하게 창조하셨고, 인간을 노예가 아니라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 사랑을 나누는 ‘언약의 파트너’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말씀은, 바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파트너인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살아있네!" 하는 삶, 즉 ‘생명의 길’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이 규례와 법도는 우리를 옭아매는 쇠사슬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가장 복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삭임입니다. 오늘 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원리를 함께 발견하며, 참된 생명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본론

신4:1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의 첫 번째 명령은 아주 명확하고 단호합니다.
Deuteronomy 4:1 NKRV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생명의 시작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2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신4:2
Deuteronomy 4:2 NKRV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말씀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내 생각과 세상의 성공 방식을 말씀에 더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반대로, 순종하기 어려운 부담스러운 말씀을 내 삶에서 빼버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며,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뼈아픈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3절의 ‘바알브올의 사건’입니다. 신4:3
Deuteronomy 4:3 NKRV
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이 바알브올의 일이 무엇이었냐. 가나안 입성을 코앞에 두고 일어난 끔찍한 배교였습니다. 적의 칼과 창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으로 찾아온 시험이었습니다.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빠진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들의 우상 제사에 참여하고, 결국 '브올의 바알'에게 절했습니다.
Numbers 25:1–2 NKRV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Numbers 25:3 NKRV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성경은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가담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가담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마드(צָמַד)'는 '멍에를 메다', '짝을 짓다'는 뜻입니다. 마치 소 두 마리가 하나의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한 멍에를 멘 '영적 간음'을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풍요와 쾌락을 약속하는 바알 우상을 따랐을 때, 그 결과는 끔찍한 ‘멸망’이었습니다. 이 바알브올의 일로 이스라엘 진영에 염병이 돌았고, 사망자가 2만 4천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순종은 생명을 낳고, 불순종은 죽음을 낳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살기 위함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규칙을 잘 지키는 ‘모범생’의 삶이 아닙니다. 4절 말씀이 우리를 더 깊은 생명의 차원으로 초대합니다. 신4:4
Deuteronomy 4:4 NKRV
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여기서 ‘붙어 떠나지 않았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다바크(דָּבַק)’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강력한 접착제처럼 착 달라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아주 특별한 곳에 쓰였습니다. 바로 창세기 2장에서, 남자가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을 설명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창2:24
Genesis 2:24 NKRV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렇습니다. 순종이란, 단순히 율법 조항을 지키는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연합하여, 마치 한 몸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이렇게 안 하면 벌 받을까 봐’라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있고 싶은 열망에서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음’의 희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이니까 예배하러 간다는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가는 예배. 예수를 만나고 싶어서 가는 예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다바크’하여 사는 삶 자체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지혜가 됩니다. 세상은 순종을 미련한 것이라 합니다. 순종하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에! 내가 죽는 그 때, 그 순종의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와 정말 가까이 계시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순종으로 얻어진 나의 생명,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어 세상을 감동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기억'하고 '전수'할 때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이 생명을 어떻게 유지하고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9절을 보십시오. 신4:9
Deuteronomy 4:9 NKRV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먼저, 모세는 ‘잊지 말라’고 간절히 명령합니다. 왜 ‘기억’이 이토록 중요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기억은, 과거를 단순히 회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나의 능력으로 다시 가져오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구원하신 그 은혜, 절망의 한가운데서 나를 붙드셨던 그 말씀, 내 삶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교만으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곧 내 마음과 영혼을 지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우리가 받은 이 구원과 생명은, 나 혼자 누리고 끝나는 ‘개인 소장품’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로 흘려보내야 할 ‘생명의 유산’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이 생명을 전수해야 할 ‘언약의 통로’로 부름받았습니다. 이 ‘전수’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할머니가 손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며 들려주는 기도 소리 속에 있습니다. 아빠가 잠자리에 드는 아이에게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서툰 솜씨로 공과를 준비하며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그 마음에 있습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정직과 성실을 보여주는 그 삶의 뒷모습 속에 있습니다.
내 자녀, 내 손주들에게 마지막으로 신앙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언제입니까? 우리 교회 다음 세대를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누군가는 하겠지’, ‘나는 자격이 없어’라는 생각은 사탄이 주는 가장 달콤한 거짓말입니다. 내가 받은 생명은 나에게서 멈추면 그대로 소멸됩니다. 그러나 내가 전수할 때, 그 생명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으며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삶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생명을 흘려보내 다른 이를 살리고, 다음 세대를 믿음의 용사로 일으켜 세우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시며 “너 정말 살아있네!” 하고 감탄하실 만한 진짜 생명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위대한 ‘언약의 통로’로 부름받았습니다.

결론: '살아있는 자'로 세상에 서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생명이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분께 사랑으로 착 달라붙어 연합하는 것(다바크)입니다.
셋째,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다음 세대에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말하는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있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의 생존을 넘어, 하나님과 깊이 연합하고 다음 세대를 살리는 이 위대한 부르심에 응답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살아있는 자’의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그 은혜를 기억하고 흘려보냄으로써, 참된 생명의 풍성함을 날마다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 가십시오.
선한 일에 용기를 가지시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주님께 봉사하고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어떤 일에도 어떤 어려움에도 소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을 항상 세상 끝날까지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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