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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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최근에 재미있게 본 드라마나 영화가 있으신가요? 보통 우리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주인공이 아닌데도 유독 눈길이 가고, 마음을 사로잡는 배우가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배우를 '신 스틸러(Scene Steeler)', 즉 '장면을 훔치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는 않습니다. 분량도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 극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이야기는 훨씬 더 풍성해집니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충직한 친구, 때로는 퉁명스럽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주인공을 위로하는 이웃, 혹은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조력자 같은 역할들 말입니다. 사실 그런 '명품 조연'이 없다면 주인공의 이야기는 결코 빛날 수 없습니다. 주연 혼자서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헌신과 감초 같은 역할이 있기에 우리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더 깊이 몰입하고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유일한 주인공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주인공을 드러내시기 위해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쟁쟁한 주연급 인물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경이라는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잠시 등장하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한 명의 '명품 조연'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신실한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이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종, 엘리에셀 -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성경에서 단 두 곳, 창세기 15장과 24장에만 등장합니다. 심지어 24장에서는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의 종'이라는 이름으로만 소개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에셀의 신분은 종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는 평범한 종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한번 귀한 자손을 허락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이지만, 그때 아브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고, 다만 나의 재산을 상속받을 엘리에셀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종은 본래 소유 개념, 재산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향해 자신의 재산과 유업을 물려받을 자격을 주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그저 하나의 주인과 종의 관계를 뛰어넘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한 명의 가족이었고, 더 나아가 친아들이 없었던 자신에게는 친아들과 같은 존재였으며, 우리로 치면 정말 귀한 믿음의 동역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엘리에셀의 어떤 모습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엘리에셀을 붙들도록 하는 힘이었을까요? 이 질문을 붙들고 함께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봅시다.
## 이삭의 결혼을 위한 중요한 임무 - 우리가 선택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를 맡깁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의 결혼 문제입니다. 창세기 2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년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충격과 상실감을 줍니다. 이 감정이 고스란히 이삭에게도 주어진 것 같습니다. 창세기 24장 67절을 보면: >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삭이 결혼하며 어머니 장례 후에 위로를 얻었다는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동아들,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때 얻은 아들,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렇기에 어머니를 잃은 이삭의 상실감은 그 누구보다 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이삭의 상태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 외로움과 상실감,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뤄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평생 함께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남녀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가정과 가정이 만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일을 더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그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엘리에셀입니다. 이제 엘리에셀은 더욱 비장한 각오로 아브라함의 미션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떠나게 됩니다.
## 기도하는 사람, 엘리에셀 - 이제 본격적으로 엘리에셀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엘리에셀의 어떤 모습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런 신뢰를 갖게 하였을까요? 엘리에셀이 메소포타미아의 나홀 성에 이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서부터 약 800여 km가 떨어진 곳입니다. 꽤 많은 시간이 걸려 그곳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는 자신의 목적한 곳에 이르자마자 기도합니다. 엘리에셀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그는 분명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뤄가십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쓰시는 원칙 중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는 절박하다는 메시지일 수 있지만,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 시선이 고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4장 11절을 보면: >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엘리에셀은 먼 여행 끝에 우물 가에 앉아 쉬려고 하던 때, 하필 그때 그 지역의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엘리에셀은 예민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이곳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계획이 계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이 여인들을 만나게 하시는군요. 주님, 그렇다면 이 여인들 가운데 물을 달라는 요청을 받아주고, 나와 나의 낙타에게 물을 주는 여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의 배필로 정해주신 여자로 믿겠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15절: >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이 부분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라는 구절입니다. 그 말은 바로 엘리에셀이 하나님께 기도를 마치기도 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한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 기도한 대로 행동하는 믿음 - 이후 엘리에셀의 행동을 보십시오. 17절: >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엘리에셀은 자신이 기도한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 여인을 향하여 달려가고, 그리고 기도한 대로 물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영적 여정 속에서 나쁜 목사가 되는 제일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설교한 대로 살지 않으면 됩니다. 반대로 나쁜 성도가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나서 기도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성적 오르게 해달라는 것인데, 문제는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로워서 결혼하고 싶다고 기도하는데, 들어오는 소개팅 자리는 다 마다합니다. 살빼게 해달라고 하는데, 일주일에 3일을 야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오늘 엘리에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한 그대로 행동합니다. 엘리에셀이 아브라함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기도하는 사람, 그것도 행함이 있는 기도를 하고,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 경거망동하지 않는 신중함 - 그런데 엘리에셀의 탁월한 점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우물 가에 물동이를 메고 왔을 때 엘리에셀의 모습을 다시 한번 주목해서 보십시오. 18-19절: >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나에게 물을 주십시오." 그러자 이 여인이 말합니다. "내 주여 마시소서." 아주 예의가 바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십시오. "당신의 낙타를 위해서도 물을 길어서 마시게 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기도의 성취,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되는 것, 그것도 기도하자마자 응답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순간 펄펄 뛰지 않겠습니까? 너무 기뻐서 평소에 하지 않는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기쁘고 흥분하게 되면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됩니까? 온전한 판단을 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정확한 상황판단을 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수하게 될 때는 어려운 순간보다 오히려 잘 나갈 때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부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본문 21절:>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여'.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한 대로 다 응답받고 형통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흥분합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그 순간 결코 경거망동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리브가를 향해 당장 "우리 고향으로 갑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가에 대해 다시 알기를 원했습니다. 리브가라는 사람에 대해 쉽게 판단하지 않고 신중히 접근했습니다. ## 비전의 사람 - 무엇이 엘리에셀을 이렇게 이끌었을까요? 무엇이 엘리에셀을 경거망동하지 않게 만들었을까요? 잠언 29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해봅시다: >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합니다. 묵시가 무엇입니까? 바로 비전입니다. 이 비전은 엘리에셀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비전, 사명입니다. 엘리에셀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하게 보이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1차적으로는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그 명령을 준 아브라함과의 신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리에셀이 발견한 비전, 바로 아브라함을 이끌어주신 하나님을 향한 뜻을 엘리에셀은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결코 방자하게, 경거망동하게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경거망동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기 쉽게 만드는 시대입니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우리는 정제되지 않은 정보들을 쉽게 공유하고 퍼뜨립니다. 그리고 가짜뉴스들을 열심히 보고, 그것이 진실인 양 믿는 이들도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비전이 없으면 경거망동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인도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오늘 우리 삶에서 경험되는 은혜가 나의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즉시 우리는 경거망동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사명에 집중하는 삶 - 우리는 엘리에셀이 비전의 사람임을 발견할 수 있는 말씀을 또 보게 됩니다. 엘리에셀을 만난 리브가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오빠인 라반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들은 너무나 반갑게 하나님의 사람, 엘리에셀을 맞이합니다.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오랜 여행이 얼마나 사람을 고단하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쉬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33절을 통해 또 놀라운 엘리에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 그 사람이 이르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이르되 말하소서"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 그리고 모든 상황들을 라반과 리브가, 그의 가족들에게 합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던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본문 49절:>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엘리에셀은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내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마치기 전까지 나는 먹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후 "당신들이 나에게 하는 행동은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에게 하는 것임을 인식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비전의 사람은 결코 망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야망을 가진 자가 비전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비전의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시선을 고정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처음과 끝이 동일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늘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한결같이 살아가는 삶 - 이제 우리는 또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당연히 교회 안의 일로 한정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곳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도 허락해주셨고, 또한 이 안에서 섬길 수 있는 역할도 주셨습니다. 귀한 가정도 허락하셨고, 또 누군가에겐 없는 귀한 능력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무언가 틀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그 임무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많은 일을 감당함에도 기쁨으로 감당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목장 리더로, 교회학교 교사로, 식당, 그리고 차량 봉사로. 다양한 모양과 모습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감당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과 같은 모습을 계속해서 유지하며 나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꾸준하게, 묵묵히, 그리고 변함없이 한결같은 인생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처음엔 훌륭했다가 넘어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울은 출중한 외모와 더불어 겸손까지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 마음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왕의 자리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권력의 자리로 오해하고 착각하였습니다. 그 순간 사울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처음에는 아름다웠지만 끝이 허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믿었던 비전이 변절되고 본질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귀한 모습이며 은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엄청난 매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한결같이 그분을 바라보며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겸손 - 이제 오늘 우리가 처음 던졌던 질문의 해답을 다시 엘리에셀에게서 찾고자 합니다. 과연 무엇이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게 하였는지, 더 나아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계속 엘리에셀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사실을 아십니까?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함께 살펴본 24장에는 엘리에셀의 이름이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엘리에셀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들은 분명 등장합니다.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라고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엘리에셀을 향하여 지칭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엘리에셀이 자기 스스로를 지칭한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에셀이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하기 전까지 나는 이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한 이후 자신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시작이 34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하였습니다.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그는 바로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줄 아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그가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은 그저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명백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에셀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묵묵히 리브가를 주목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 바로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디 어느 곳에서도 스스로를 향해 "나는 성실하고 능력의 사람 엘리에셀입니다"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다." 이 문장 하나면 되었던 것입니다.
## 맺으며: 엘리에셀의 매력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엘리에셀의 모습을 보고 어떤 마음을 갖게 되십니까?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성경에서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꼭 언급하는 사람이 엘리에셀입니다. 이 사람의 모습이 너무 귀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인생, 그리고 묵묵하게 주어진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경험하는 자리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특별한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서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일상에서, 그것이 당장 하나님이 맡겨주셨다는 인식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저 맡겨진 것들을 하나하나 감당하게 될 때, 그냥 주어진 그 자리를 묵묵하게 걸어갈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심을 선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그분을 있게 하는 것, 그분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임을 기억하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엘리에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엘리에셀이 되면 좋겠고, 또한 엘리에셀과 같은 귀한 동역자들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저 역시 평생의 기도 제목입니다. 모두가 다 그럴 수 없을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나의 엘리에셀이었으면 좋겠고, 여러분들도 이런 엘리에셀을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엘리에셀과 같은 역할만 감당해도 그것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묵묵히 주목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과 계획,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들어가며 그분의 영광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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