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죽으신 이유
나의 자랑, 십자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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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오늘 생명의 빛교회에 방문하여 설교하게 하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오면서 어떤 말씀을 전할까? 기도하면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잔칫집에 초대 받아 가서 특별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곧 고기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설교를 영혼의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단단한 뼈가 붙어 있는 고기입니다.
꼭꼭 씹어 잘 소화시키셔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나의 자랑, 십자가를 주제로 교리설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무지와 반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저 고리타분한 옛 것으로 여기고, 실제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는 탁상공론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그리하여 교리보다는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교회를 10년 20년씩 다녀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지 핵심조차도 모르는 교인들이 허다하게 되었다.
교리에 대한 이런 무지와 무관심은 교인들로 하여금 이단에 쉽게 빠지게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을 마치 뼈가 없는 연체 동물처럼 만들어 기독교인의 고유한 골대가 없는 신자들을 양산하였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십자가의 중심성을 다시 살펴 다시 생각하면서 구원의 교리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 곧 이신칭의에 대해 감동적으로 설파했다.
그리고는 12장부터 15장 사이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 순종하는 삶의 기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주 되심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II.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
II.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
본문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쟁점은 구원받은 신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이다.
그들 중에는 믿음이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어서 절기를 지키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음식을 먹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서로 갈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로마서 14장 7절
그들이 모두 이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된다.
죄 없이 이 세상에 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본문은 세 가지 교리적 사실을 가르쳐준다.
A. 속죄를 위한 죽음
A. 속죄를 위한 죽음
[속죄의 정의]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속죄를 위함이었다.
국어 사전적으로 "속죄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물건이나 다른 공로로 비겨 없애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만약 죄가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면 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전달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무한히 커서 인간이 무엇으로도 도저히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의 정의]
그러면 우리 인간이 지은 죄가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큰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원죄이고, 또 하나는 실행 죄이다.
전자는 인간이 날 때부터 물려받은 죄이고, 후자는 살아가면서 행위와 마음으로 스스로 짓는 죄이다.
식물에 비유하자면 원죄는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고 실행죄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 그리고 잎과 열매들에 해당합니다.
[원죄의 유래]
원죄는 인간이 물려받은 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첫 조상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생명을 영혼과 육체 모두가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선악과 명령]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장 16-17절
그 나무는 특별하고 신비한 나무가 아니었다. 평범한 과실 나무였으나 단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나무였다.
[문제 제기와 답01_죄의 직접적 원인은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 나무를 거기에 두셔서 아담으로 하여금 유혹을 받게 하셨을까?”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은 그 나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선악과 나무는 얼마나 좋은 용도로 사용되었을지를 생각해 보라.
에덴 동산 모든 곳을 돌아다닐 때, 거기에 있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아담과 하와에게 복종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온 동산이 자기들의 소유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 있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아담과 하와는 생각했을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죽음의 경고를 말이다.
그때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이 선악과는 오직 하나님만 간섭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지으신 바 피조물일 뿐이며, 우리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그런 마음이었다면, 그들은 선악과 나무를 볼 때마다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비록 에덴 동산 전부를 주인이 된 것처럼 누리고 있었지만, 자신들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아주 낮은 자들이며 그분께 순종하고 섬기도록 태어난 존재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문제 제기와 답02_형벌의 정당성]
또 혹자는 형벌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한다.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으니까 벌을 받지만, 우리는 그 열매를 보지도 못했는데, 왜 그들의 죄 때문에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나?”
또 후자에 관해 답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명령,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일시적인 명령이었다.
만약 첫 조상들이 그 명령의 일정 기간 순종했더라면, 조상 자신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우리까지도 영원하고 불멸하는 육체와 영혼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우리와 모든 인류는 죽음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질문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영원 불사의 복을 누리게 되었을까"
이것을 신학에서는 언약적 연대(Covenant solidarity)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담은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이후에 자연적 생식을 통해 태어날 모든 후손들을 포함하는 무리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 모두는 아담이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때 거기에 함께 있었다”
이렇게 얻게 된 죄를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것을 "물려받은 죄(Inherited Sin)”라고도 한다.
[죄의 종류]
이 원죄는 죄에 대한 책임 곧 죄책과 오염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모든 인간이 부패성(corruption)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사실은 인간에게 선은 반드시 학습되어야 습득되고 발전할 수 있지만, 악은 학습하지 않아도 익혀지고 발전하는 것을 볼 때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원죄와 함께 또 하나의 죄가 있으니 그것은 실행 죄(Actual sin)다.
이것은 자범죄 혹은 고범죄라고도 부르는데,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짓는 죄들이다.
[지위의 원리]
인간의 죄는 그것이 원죄이든지 실행죄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크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다고 해도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끼친 손해를 결코 갚을 수가 없다.
*도덕 철학에서 지위의 원리* 들어보세요.
똑같은 행위라도 그 행위를 당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죄의 크기는 사뭇 달라지는 거예요.
그게 이제 도덕 철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를 들어서 내가 친구에게 물 한 잔을 건네다가 무릎에 쏟아서 대단히 잘못된 일이겠지 그지 막 옷을 털고 그러겠지 그러면은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다. 그러면서 이제 수건을 갖다 주고 깨끗이 닦으면 어쨌든지 간에 그걸로 끝나잖아.
근데 만약에 물을 쏟은 그 대상이 황제일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황제가 있는데 황제한테 이걸 갖다 드리다가 실수를 해서 넘어지면서 황제의 옷 위에다가 확 쏟았어.
그 사람의 죄는 어떻게 돼?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좀 널리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넘어갈 수 있어 없어요. 안 되지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것은 부주의(carelessness)이었어요.
케어가 뭐야? 주의 조심이지 리스 그게 없는 거야. 니스는 명사형이잖아. 케어리스니스는 그게 뭐냐 하면 리스펙트를 반대해.
리스펙트 리스펙트의 반대라 이거야. 존경심의 반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리스펙트의 반대란 말이에요. 근데 그 사람은 정상적인 상태라면 사형이죠.
또 예를 들어 황제의 목에 칼을 겨누었어.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돼? 그것도 사형이지.
그러면 실수로 물을 엎지르는 거하고 목에다가 칼을 댄 거 하고는 도덕성에 있어서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나잖아.
근데 왜 그게 똑같이 사형에 처해져야 되냐 이거야.
그게 이제 지위의 원리예요. 지위, 황제의 지위가 무한히 높기 때문에 그런 물을 엎지른 거나 칼을 겨눈 거나 거의 마찬가지거든요.
근데 그거를 하나님은 황제 곱하기 무한대야. 하나님은 무한대라 이거예요.
그래서 김남준 목사는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에다가 침을 뱉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황제의 얼굴에다 침을 뱉었어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황제가 느끼는 그 느낌은 칼을 목에 댈 때보다 더 기분이 나쁠 거야.
아마 뭐야 그러면 형벌은 뭐야? 똑같이 사형 뭐든지 사형이야 뭐든지 황제에 대해서는 뭐든지 죄를 지으면 그냥 그건 사형이야.
이게 도덕 철학에서 지위의 원리예요.
[죄의 문제를 푸는 열쇠_속죄]
풀 수 없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속죄라는 방편을 사용하셨다.
기독교에서 속죄란 "원죄와 실행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자들의 죄를 없애주시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둘째로는 인간들에게 참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셋째로는 인간들에게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무한히 컸기 때문에 속죄를 위해서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희생이 필요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체를 가지셨기에 죽으실 수 있었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 희생은 무한한 가치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성경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당신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습니까?”이다.
당신이 성경 어디를 폈든지 이 질문이 제기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러나 두 부류의 인간으로 존재한다.
한 부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고, 또 한 부류는 용서받은 죄인들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비참, 그리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이다.
[*예화 바이러스와 감기 증후군(가장 성도들이 이해하기 가장 쉬운 설명)]
우리 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요.
열이 나고 그다음에 콧물이 쏟아지고 목이 부어 그리고 기침을 해. 그리고 뼈마디가 막 쑤셔요. 그럼 지금 지금 뭐가 뭐가 걸린 거야?
감기, 감기 몸살에 걸린 거야. 그래서 어떻게 보냐면 감기와 몸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죄와 다.
그다음에 기침하고 콧물 나고 토하고 그다음에 춥고 쑤시는 것은 그게 인간의 불행과 고통이야.
우리는 그게 이제 이제 인간의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숙제가 뭐냐 하면은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서 고통과 불행을 제거하고 그리고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느냐”가 숙제잖아.
이거는 누구에게나 숙제잖아. 근데 그 치료법 자체가 결국은 그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인 죄를 다루지 않고는 치료가 될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자기 몸을 치료하지 않고 콧물만 멎게 하고 열만 안 나게 하고 이런 식으로 아무리 처방을 해도 감기 바이러스 자체를 죽이지 않으면은 그 고통과 불행은 종식될 수가 없는 거.
역사적으로 인간들은 인생의 이런 불행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이나 종교, 문화와 예술의 발전은 바로 이런 운명적인 인간 비참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 불행의 근원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B.C. 5-3세기 사이 그리스에서는 걸출한 철학자들이 폭발적으로 많이 등장한 시기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특히 스토아 학파와 견유학파 철학자들이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속죄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다.
이는 구원받을 인류가 과거에 지어온 모든 죄와 지금 현재 짓고 있는 죄, 그리고 미래에 짓게 될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구원받을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의 십자가 죽음이 자신을 용서해 주시기 위함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무한한 공로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적용시켜 용서받게 해 주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거리로 삼아야 하는 이유이다.
[적용]
십자가를 자랑하면 믿음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이 비판하기보다 서로 사랑한다.
십자가라는 본질적인 것을 붙들기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비본질적인 것(먹는 문제, 절기 문제 등)을 놓을 수 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B. 부활을 위한 죽음
B. 부활을 위한 죽음
둘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위함이었다.
[부활에 대한 문제 제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의 죽으심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결코 죽음에 처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평범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죽으실 분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을 수가 없지 않은가?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 “예수가 부활했다.” 는 소식을 허무맹랑한 거짓으로 여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모순 해결]
그러나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이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죄 때문이었다면 그 두 개의 모순된 명제는 양립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리적 속죄의 죽음이었다면 그 다음 두 가지 사실은 양립이 가능했다.
곧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라는 두 가지 사실은 양립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그렇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속죄의 죽음을 기꺼이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었기 때문이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마서 1장 4절”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심판이었다면 하나님은 그를 부활하게 하셨을 리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활의 네 가지 의미 ]
여기서부터 신학적으로 이제 진짜 중요한 거예요.
부활은 크게 네 가지 지평으로 구분되며 우주적으로 서로 연결된다.
첫째로는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다.
이는 성결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영적 생명의 역사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마귀의 죽음을 이긴 것이다.
죽음은 마귀가 인간을 위협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카드인 동시에 마지막 카드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귀에게 복종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어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 히브리서 2장 15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분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사단이 제시하는 죽음의 카드가 무효화될 수 있는 첫 선례를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러니까 사단이(자기가) 죽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막 살아나는 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이제 사단이 무장 해제된 걸 보여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브리서 2장 14절
둘째로는 신자의 영혼의 부활이다.
이것은 구원의 부활이다.
예수를 믿기 직전까지 우리의 영혼은 사실상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
영혼은 불멸할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비록 타락했어도 영혼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따라서 불신자였을 때 우리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성경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종의 비유이다(에베소 2장 1절).
육체와 영혼은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의 의미 또한 다르다.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기능이 끊어지고 물질적으로 소멸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영혼이 영혼으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영혼의 저급한 기능(Lower function)은 육체의 생존과 관련된 것인데,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 같은 것들을 느끼는 기능들이다.
불신자들에게도 이런 기능은 살아있다. 그러나 영혼의 고급한 기능(Higher function) 곧 하나님을 알고 천상의 세계를 이해하는 기능이 거의 망가져버린 상태를 영혼이 죽은 상태라고 부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를 구주로 영접할 때 그의 영혼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진다.
이때 우리의 죽었던 영혼은 우리 안에서 부활하게 된다.
이렇게 예수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런 성품을 가리켜 우리의 “새로운 속 사람",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새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거듭난 새 생명의 본성"를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늘 생명을 누리며 사랑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 전까지 우리는 오직 세상 자원으로만 살아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은혜, 사랑, 생명과 같은 천상의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로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경험하는 부활이다.
이것은 성화의 부활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용서를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잔존하는 죄가 있어서 부패한 본성이 우리를 죄 가운데로 데려간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사단은 허리가 부러졌고, 그는 영원히 필패의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과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지 않으면 사단은 지금도 넉넉히 신자를 죄 가운데로 데려갈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들에게 말한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장 10-11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으로써 성령 안에서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러나 하나님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 내재하는 죄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은혜가 신자인 우리 안에 함께 있어 서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자 한다.
우리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으나 세상은 여전히 불안정하여 마귀의 역사와 죄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우리가 매 순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시도때도 없이 실망과 낙심, 고독과 패배감 같은 것들이 엄습한다.
이때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며 마음을 낮추어 기도한다.
그때 우리 심정은 겸비한 마음이 되어 우리의 죄 있음과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뉘우친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간절해지고 성령께서 도우신다.
그리하여 간절한 기도가 열렬함으로 뜨거워질 때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죽이신다.
그때 힘과 활기를 잃었던 영혼은 다시 활력과 기운을 받아서 하늘의 충만한 생명력을 다시 얻게 된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세상 사랑에서 예수 사랑으로, 땅의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하늘의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이 신자인 우리 안에서 경험되는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이다.
[*예화_회개와 사랑, 그리고 생명력의 경험.]
우리가 기도하면서 경험하는데 일상적으로 하는 기도에서는 이런 잘 경험이 안 돼요.
특별한 기도를 해야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도록 만들어주죠.
그리고 더 이상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스러웠던 마음이 조그만한 희망의 마음으로 바뀌게 된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져요.
넷째로는 마지막 날의 부활이다.
이는 우주적인 부활이다.
이것은 심판 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있게 될 온 인류의 부활을 가리킨다.
그때 신자는 육체와 영혼이 완전하게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리기에 적합하게 된다.
그리고 불신자는 육체와 영혼이 부활하여 영원한 형벌을 감당하기에 적합하게 된다.
이로써 마귀는 영원한 지옥에 던져진 채 갇히게 되고, 세상에는 죄와 비참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부활의 마지막 지평이다.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의 속죄의 죽음이 우리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았지만 죄와 불순종으로 우리 안에 주신 예수의 충만한 생명이 약화되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은혜받기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팎에 있는 죄와 유혹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넉넉히 이기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이를 위하여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남은 죄를 죽이고(mortify), 또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은혜를 더욱 살아나게(vivify)하여야 한다.
이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
C. 주가 되시기 위한 죽음
C. 주가 되시기 위한 죽음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을 주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주 되심의 의미]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만유의 주가 되셨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곧 구원받을 인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었다.
그리고 그 상급의 정점은 바로 모든 만물이 무릎을 꿇어 경배드리는 주가 되시는 것이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이루어진 구속사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곧 그분이 온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 곧 여호와가 되심을 의미한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장 8-11절
[복음의 정수_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을 섬기셨다.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마침내 온 우주와 만물, 인류의 주가 되셨다.
예수님의 승천이 없었다면 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고, 부활이 없었다면 승천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 결코 부활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 없었더라면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로 살아나셨고 만유의 통치주가 되셨다.
[주 되심의 의미]
하늘에서는 성부와 함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 하늘 생명을 우리 심령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게 하신다.
이렇듯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충만한 천상 자원으로서 세상과 죄를 이기며 살게 해 준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승천하심으로써 만유의 주가 되셨고, 이는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누리던 지위다.
그 지위를 계승하여 온 우주와 세계를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신다.
우리는 지금 비록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렇게 예수님께 만유의 주가 되심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이 세상에 충만하게 펼쳐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우리의 손으로 이룰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적용]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으며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나라에 속한 백성들과 어떻게 놀랍도록 다른 사람들이며 또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다.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선하고 인자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의지하며 매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현재적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매일매일의 일상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따라서 끊임없이 전도하며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우주의 주 되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게끔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
III. 적용과 결론
III. 적용과 결론
때는 1740년 스코틀랜드 캠버스랭에서는 놀라운 영적 각성과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회심을 경험했다.
한 교회에서 이름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설교자가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었다.
그때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회중석에서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울며 십자가 설교를 듣고 있었다.
그는 그 지방에 있는 신학교에서 교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노교수였다.
예배가 끝난 후 그는 고백했다.
"나는 이제껏 속죄의 교리를 알고 가르치기는 했지만 속죄하시는 주님을 만나지는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전에는 십자가에 대해 단지 알았으나 이제 내가 가르치던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이 없다면 오늘이야말로 당신이 십자가 아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절호의 기회다.
만약 당신이 이미 주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현재적 부활을 경험할 시간이다.
세상 염려와 근심, 죄와 불순종으로 죽은 자처럼 곤고하게 된 영혼이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절호의 기회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려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영원히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주님을 오늘 마음속에 영접하고 십자가의 감격 속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삶, 성령충만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