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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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7:1-13절
사사기 17:1-13절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불러 주님의 전에 나오게 하시고, 예배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바쁘고 힘든 일상 가운데에도 주님을 예배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여전히 말씀보다 내 욕심과 편리함을 앞세우며 살았습니다.
주님의 뜻보다는 내 안위와 필요를 먼저 생각했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하셔서,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성도들의 가정을 붙들어 주옵소서.
부부가 서로 사랑과 존중으로 하나 되게 하시고, 자녀들이 말씀 안에서 지혜롭게 자라나게 하옵소서.
세상 유혹 가운데서도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다음세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성도들의 일터와 직장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경제가 어렵고 미래가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말씀에 따라 정직과 성실로 일하게 하옵소서.
성도들이 일터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그곳에서 주님의 향기를 나타내는 믿음의 증인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육신이 연약하여 병상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치유의 손길로 만져 주시고, 마음이 지치고 낙심한 이들에게는 성령의 위로와 평강을 더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지체들이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정의를 주셔서 공의로운 나라를 세우게 하시고, 분열과 갈등이 아닌 말씀 안에서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 땅의 교회들이 먼저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며, 빛과 소금으로 이 나라를 변화시키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후원하는 선교사님들과 기관들을 기억해 주옵소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선교지마다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고, 필요한 물질과 인력을 채워 주옵소서.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가정을 지켜 주시며, 그들의 눈물과 헌신이 열매 맺어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후원하는 모든 기관에도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셔서, 지역과 세계 가운데 복음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주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가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상숭배’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한번 인사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읍시다.’ 나의 생각이나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믿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생각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의 내용에 근거해 행동하는 것이죠. 간단한 예이지만, 토끼나 설치류나 작은동물들은요, 갑작스러운 빛이나, 포식자들이 다가왔을 때, 눈을 감고 몸을 가만히 웅크립니다. 물론 갑작스러운 상황에 겁이나서 하는 행동인데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포식자가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는 반응입니다. 사실 거의 그런 경우는 없는데 말이지요. 이 상황을 회피해 보고 싶은거죠. 유찬이도 가만히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부끄럽거나 숨고싶으면요, 자기 눈을 가려버려요. 근데 실제로 그 상황이 없어지는거에요? 아니죠. 있는데, 내 눈을 가려서 없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믿고 싶은거에요.
이런 모습들은 간단한 예이지만, 사람은 결국 자기가 생각하고 믿는 대로 살아가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돌아보아도요, 내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두고 사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고, 삶의 모습이 결정되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느와르 영화를 하나 봤는데요, 거기에 보면, 참 조폭들은 돈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보면요, 자기 사업장이나 이권을 위해서요, 30년지기 친구도 배신하고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처럼 돈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은요, 거기에 그 어떤 것을 내놓아도요 내어놓습니다. 친구도, 사랑도, 양심도 내어놓는 것이죠. 성공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라고 믿는 사람은,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은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요, 얼마를 준다고 해도, 불의 앞에 타협하지 않 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믿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요 결국 그 믿음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갑니다.
문제는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는거에요.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따라 신앙을 꾸며가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정작 그 하나님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만들어낸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이름을 빌리지만 사실은 자기 욕심을 섬기는 우상숭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 마음의 욕심을 채워주는 신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사업이 잘되기만을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얻으면 하나님이 복 주셨다고 말하고,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이 외면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건강과 장수만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되어버리면
하나님은 ‘건강을 지켜주는 보장 수단’ 정도로 전락하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이미 정해놓고, 그 길을 지지해줄 말씀만 뽑아내어
“하나님도 내 선택을 응원하신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겉보기에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앙을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 내 욕망을 ‘덮어씌운’ 신앙은
아무리 종교적인 모양을 하고 있어도 결국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집안이 평안해진다”는 생각 말입니다.
믿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형통과 성공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일이 조금만 틀어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모습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을 ‘내 마음이 편안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오늘 말씀 듣고 마음이 위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집중합니다.
물론 위로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신앙의 목적이 된다면, 결국 나를 만족시키는 종교행위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내가 느끼기에 옳으면 그것이 신앙이다”라는 사고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FEEL 내 판단과 기준이 중요한거죠.
이제 많은 것들이 개인의 판단과 기준에 맞춰진 문화를 살아갑니다.
성경이 분명히 죄라고 말씀하는 것조차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다 괜찮을 거야” 하며 자기 기준으로 바꿔버립니다.
성경보다 내 감정을 더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 모든 모습은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따라 신앙을 꾸며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신앙은 결국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사사기 시대의 모습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자신들은 약속의 땅에,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들어왔고 살게 되었고 믿고 있노라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그저 국가적 신앙에 머물 뿐 하나님의 통치는 그들의 삶에 없었습니다.
이제 사사기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는데요. 후반부에 들어섰습니다. 16장까지의 내용은 12명의 사사에 대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제 17장에 들어서면 다른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 내용들은 사사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삶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게 시간순서가 아니라, 앞에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사를 통해 구원하셨는지 보여준다면, 뒤에 부분은, 하나님이 어떠한 영적 상태에서 그들을 구원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내용들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입에 담기 어려운 폭력적이고 잔혹한 내용들이 등장해서 잘 설교되지 않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 중 첫번째 이야기는 바로, 미가의 집과 단 지파에 대한 내용이 바로 17-18장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사기 후반 부에는, 사사기의 대표구절인,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을 실제적인 사건으로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을 말하고 믿음을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 욕망을 따르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가득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오늘 미가의 집 이야기를 통하여,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이 어떻게 우상숭배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은 1,100세겔을 잃어버립니다. 이 돈 어디서 봤죠. 삼손의 비밀을 팔았던 들릴라가 블레셋 족장들에게 받았던 금액과 같습니다. 엄청나게 큰 돈을 잃어버린거죠. 그 돈을 잃어버려서, 그 미가의 어머니는 저주합니다. 돈 훔쳐간놈이 누구든 저주했던거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들 미가가, 엄마 사실 제가 훔쳤어요 하고 자백을 하고 돈을 돌려줍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태도가 싹 바뀝니다. 저주가 아니라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
3절에 보면, 돈을 엄마에게 돌려주고요, 엄마가 그래요, 내가 내 아들을 위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어야 겠다.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린다. 그리고 은 200들여서 세공업자에게 한 신상을 부어 맡깁니다. 그리고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었더라, 라는 내용이 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미가와 그의 엄마의 모습입니다. 미가는 엄마 돈을 훔쳤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거금을 훔쳤어요. 엄마는 당연히 이 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주 기분이 나빠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행했다는 것을 알고, 갑자기 복을 빌어줍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요, 여호와를 위하여, 신상까지 은 200을 들여서 만듭니다.
우리는 미가의 집안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겉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적인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있었지만,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가족을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아들을 위하여”라는 핑계로 말씀을 무너뜨리고 욕망을 따라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에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가족을 위해서니까 괜찮다”라며 말씀을 뒤로 미룰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정의 평안을 위한다는 이유로 잘못을 훈계하지 않고 덮어버리기도 하고,
자녀의 성공을 위한다는 이유로 말씀의 기준들을 양보하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말씀보다 내 욕망과 내 가정의 안위를 우선하는 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그 중심에 말씀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 내 욕망을 향한 제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내 신앙의 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가정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가족만 잘되면 된다, 별일 없으면 되지, 우리 애들만 잘되면 된다”라는 욕망에 붙들려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우선으로 삼고, 말씀으로 가정을 세우며,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참된 믿음이 될 줄 믿습니다.
두번째 모습 역시 비슷합니다. 5절 말씀부터 보면요, 이제 미가의 집에 신당이 생깁니다. 미가는 거기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놓고요, 이제 미가의 한 아들을 거기에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여러분 겉으로보면요 참 미가가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신앙에 열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을 위한 예배 공간도 지어놓고요, 거기에 필요한 에봇도, 드라빔도 둡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위한 종교적인 체계가 잘 갖추어진 것 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요 미가의 집은 믿음이 대단한 집안인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거기에는 뭐가 없어요? 신앙의 형식을 갖추었을지는 몰라도요, 그것을 갖춘 근거나 하나도 말씀에 맞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공간에 우상이 있고요, 대제사장이 입어야 되어야 되는 에봇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서 그 집에 있고요, 심지어는 당시에, 중앙 성막에서 함께 제사를 해야 하는데, 그는 따로 개인적인 제사의 공간을 두었고요, 레위 사람이 아닌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냐, 미가는 자기가 예배하기 편리한 하나님을 만들었던거에요. 내가 믿기 쉬운 하나님, 내가 믿기에 편리한 하나님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누히 자신의 백성들에게 강조하셨습니다. “너희가 원하는대로 예배하지 말고, 내가 지시한대로, 내가 계시한대로 믿고 예배하라라고 가르치셨어요”
십계명을 보면요, 1계명 2계명이 이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데요, 1계명은 뭐에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말은, 예배의 대상이 분명히 누구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대상은, 하나님과 다른 신일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예배해야 된다를 가르치지요. 두번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 말은 뭐냐면, 예배의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예배하고 사랑해야 되는데, 그 방법이, 너희가 좋케 여기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거에요.
미가는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따른 신앙이 아니라, 나의 생각, 나의 취향을 따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내가 편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 모습은 쉽고 신나는 신앙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복이나 구원을 주는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편리함을 앞세우고 싶은 죄악된 마음이 있습니다.
예배가 내 생활에 불편을 주면, 우리는 예배보다 내 편안함을 선택하려 합니다.
주일 예배보다 휴식을 더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께 드릴 시간을 내 취미나 다른 것에 빼앗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죄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이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들면 말씀을 외면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붙잡고, 듣기 싫은 말씀은 흘려보냅니다. 결국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기분과 내 상황을 기준으로 신앙을 꾸미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예배와 봉사조차 말씀의 기준이 아니라 내 유익을 따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만큼 하면 내가 마음이 편하다”라는 수준에서만 멈추고, 말씀 앞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나를 위한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무시한 채 편리함만 따라가는 신앙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편리함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내가 불편해도, 내 욕심에 맞지 않아도, 말씀 앞에 순종할 때 그 예배가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부분은요, 7절부터 보면요,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 사람은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었고 그 사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레위인 청년은 미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상황을 이야기하죠. 레위인 청년은 마치 거주할 곳을 찾고 있었고요, 미가는 마치 자기 집에 신전도 있고, 다 준비되었는데, 레위인 제사장이 필요한거죠. 그래서 서로 약속을 합니다. 미가가 내가 매년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도 다 책임져 주겠다. 그러니깐 우리 집에 와서 제사장좀 해달라고 요청을 한거죠.
둘의 조건이 맞았던 거에요. 둘은 오케이 하고, 레위인 청년은 미가의 집에 제사장이 되고요, 미가는 그 레위인을 잘 대접하고 약속한대로 잘 챙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13절에 그래요, 같이 읽어볼까요. 사사기 17: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미가는 레위인이 제사장이 되야되는 것을 알고 있었나봐요, 이제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했으니깐 뭐하겠다. 하나님이 내게 복주시지 않겠냐, 이렇게 생각했다는거에요. 여기서 우리는 미가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동기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가의 동기는 뭐에요? 모든 하나님을 위해 하는 행위의 동기는 바로 복이에요. 내가 복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조건을 갖추는거에요.
이게 바로 흔히 말하는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이게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신앙의 저변에 깔려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는것, 그것을 이루기 위한게 믿음이 아니에요. 이건 정확히 우상을 섬기는 욕망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비극은 뭐냐면, 하나님을 항상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축소시키고요, 내가 하나님을 다스리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야 되요.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치하고 있는가? 사실 여기에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하는데요. 자꾸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다스리고 싶어해요.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줬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줬으면 하는 나를 위한 수단처럼 여겨버리는 것이죠. 그럼 거기에는 뭐만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 욕망만 남아있는거죠.
미가나 레위 청년 둘다 마찬가지입니다. 둘다 겉은 신앙적 형식을 보이지만, 그 속에는, 내 욕망이에요. 미가는 내가 복 더받고 싶어서, 레위인 제사장을 두고 싶고, 레위인 청년은, 내 생계와 안위 때문에 미가의 집에 들어가고 싶고, 이 두 가지 모두 내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한 것뿐이지요.
여러분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필요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이미 베풀어주신, 무엇으로도 갚지 못한 큰 사랑과 은혜 때문에요. 그분이 정말로 나의 주님 되식 때문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 이후에 복을 더 받든 못 받든 하나님은 여전히 예배받기 합당하신 분이세요.
우리의 예배가 나의 필요와 안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에서 드려지는 참된 예배와 신앙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속 미가와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의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모든 신앙은 욕망에서 출발했고, 말씀 없는 편리함으로 채워졌으며, 결국 세상적 필요와 안위를 위한 우상숭배로 드러났습니다.
신앙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섬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시대였고, 동시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말씀을 기준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욕망을 따르는 신앙, 편리함을 따르는 신앙, 안위를 위한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입니까, 내 삶이 편해지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입니까?
참된 신앙은 내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편리함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편해도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내 안위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정과 교회의 신앙이 사사기 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에 붙잡히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시고, 우리의 가정을 붙드시며, 우리의 교회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1. 욕망을 따라 사는 신앙을 회개하고,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 되게 하소서
1. 욕망을 따라 사는 신앙을 회개하고,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 되게 하소서
“주님, 미가는 어머니의 돈을 훔쳤습니다. 여덟 번째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어겼습니다.
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훈계하기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을 빌며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두 번째 계명을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있었지만, 말씀은 그들의 삶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신앙을 말하면서도 말씀은 무시하고, 내 욕망을 따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욕심과 내 생각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이 시간 회개하오니, 욕망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등불로 삼게 하시고, 매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 되게 하여 주옵소서.”
2. 말씀보다 편리함을 앞세운 신앙을 버리고, 불편해도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2. 말씀보다 편리함을 앞세운 신앙을 버리고, 불편해도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 미가는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말씀은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 지파여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는데, 그는 자기에게 편리한 길을 택했습니다.
말씀보다 편리함을 앞세운 것입니다.
주님,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말씀을 읽고도, ‘이건 내 상황과 맞지 않는다’며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들면, 말씀보다 내 편리함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것은 하나님 없는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자기 소견대로 사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불편해도 순종하며, 손해가 있어도 말씀을 붙드는 신앙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말씀을 기준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3. 국가와 교회, 그리고 후원하는 기관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3. 국가와 교회, 그리고 후원하는 기관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 이 나라와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지도자들이 말씀을 두려워하며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세우게 하시고, 이 땅이 말씀 위에 다시 서게 하소서.
우리 교회를 붙드시고, 말씀과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후원하는 선교사님들과 기관들을 기억해 주옵소서.
그들이 말씀을 전파할 때 성령의 능력을 더해 주시고, 물질과 인력의 필요도 채워 주옵소서.
주의 말씀이 땅끝까지 흘러가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