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생활 : 사랑 안에서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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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사랑
신자의 사랑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 위격의 아름다움 때문에 어떠한 다른 목적 없이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신자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사랑, 곧 지순의 사랑을 갖게 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은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만, 그것은 여전히 고통 받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악 됨을 깨닫고, 그로 인해 한없이 절망합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자기와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때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사랑을 까리따스(caritas), ‘지순의 사랑(agape)’이라고 합니다(요일 4:7-10).
지순의 사랑은 하나님을 목표로 정하고 그분을 끊임없이 즐거워하며 그분께 자신을 합치하려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릇된 자기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대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가 교회와 신자는 물론 교회 밖의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사항을 숙고할 때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근데 이게 볼 때는 이렇게 간단하게 돼 있어도 이게 이제 설명을 하면 아주 길어져요. 그래서 한번 들어봐야 돼.
여기 어떤 사람이 이렇게 서 있어 이제 근데 예전에는 하나님도 몰랐고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을 모르니까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도 합당한 견해를 가질 수가 없죠. 그렇죠 하나님이 진리시니까 이렇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이제 도저히 못 살겠는 거예요. 이제 도저히 못 살겠어요.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근데 뒤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그러면은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생기는 거야. 왜 동기가 뭐였어요? 동기가 뭐였다고 자신 혼자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러면 이 사랑이 그러면 이렇게 해서 이제 이 사람이 예수를 예수를 믿게 된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이게 이게 이제 어떻게 되냐 하면은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이렇게 예수를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다. 그리고 여기 당연히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나타나잖아. 근데 이 사람의 이 동기 모티브에 모티브 이거 너무 똑똑해가지고 이거 모티브가 뭐냐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모티브가 뭐냐 이게 보면 결국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에요. 그래서 이거를 이제 사랑으로 그리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으로 이것을 이제 이야기하자면은 이거는 에로스의 사랑이라는 거야.
에로스의 사랑이라는 건 흔히 우리들이 알기로 이제 사랑의 몇 가지가 있잖아. 그렇지 그리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제일 이제 네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필리아 스톨겐 그다음에 에로스 그다음에 아가페 네 가지 필리아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고 스톨겐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고 그다음에 이제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 그랬지. 근데 이제 이거 에로스를 더 넓은 뜻으로 사용하면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모든 사랑을 다 넓은 의미에서 에로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근데 사랑이야 이것 때문에 이것도 사랑은 사랑이잖아.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를 왜 믿었는지 생각을 해보라고 예수를 왜 믿었냐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예수 믿었다 그러는데 그 새빨간 거짓말이야. 그 누가 처음 예수 믿을 때 그런 어마어마한 믿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 행복해 보려고 믿는 거야.
나중에 믿고 나서 이제 다 배우고 보니까 그렇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지만 인간이 참 행복한 거구나 하기 때문에 거기서 이제 하나의 타협점을 찾은 거죠. 이게 에로스의 사랑으로 이렇게 이제 결론 근데 그런 자기를 향한 사랑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못 살겠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겠다라고 결심하는 것에 이거를 하나님은 이런 사랑의 발로를 믿음이라고 여겨주시는 거예요.
믿음을 그래서 이제 이 성경 전체가 어떤 구도로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대한 하나님만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끔 구도가 짜여져 있는 것이 이게 성경의 가르침이에요. 그래서 매 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하나님과 합일된 삶을 사는 거죠.
근데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믿었더니 그다음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이 새로운 사랑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 사랑이 뭐냐 하면은 왜 아가페 사랑이 그거는 에로스의 사랑이 하는 거고 당연히 이게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 아가페의 사랑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사랑이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이제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에로스의 사랑에서 출발해서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대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시는데 아가페의 사랑으로 응답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아 구원을 받고 나면 이 사람 안에 에로스도 아니고 아가페도 아닌 제3의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다름이 아닌 이게 까리타스의 사랑, 여기에서 영어에 체리티라는 말이 온 거예요. 근데 이제 그러면은 이게 에로스하고 이제 카리타스가 어떻게 다르고 그다음에 에로스하고 아가페가 어떻게 다른 건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렇죠. 근데 카리타스는 그러면 에로스하고는 어떻게 다르고 아가페하고는 어떻게 다른가 그게 뭐냐 하면은 이 카리타스는 이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이렇게 오는 사랑이고 카리타스의 사랑은 이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에요. 반응인데 이것은 하나님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했네.
많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사랑들. 그래서 쉽게 말하면은 에로스의 사랑에서 출발한 믿음은 하나님의 아가페를 발견하게 만들어주고 그 아가페를 받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이제 자기 자신을 위에서 살아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되겠다라는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카리타스의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그러니까 이제 본질적으로 놓고 보면은 아가페의 사랑 카리타스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 없이 존재할 수가 없는 근데 이거를 이제 신약에서 신약에서는 이 성경에서는 이거를 다 이 카리타스의 사랑을 다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그냥 같이 불러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여 뭐 그럴 때 그때 그걸 뭐라고 부르냐면 아가페토스라 그러거든 그러니까 피동 분사란 말이야. 그러니까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자 이렇게 돼요. 그래서 이제 학자들은 이거를 뭐라고 얘기를 하냐 하면은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의 지평 융합이다. 지평 융합이다. 이렇게
그러니까 카리타스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까지 포함을 하니 그러면 그 안에 자기 자신은 들어 있을까 안 들어 있을까 자기 자신은 들어 있어 안 들어 있어 들어 있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안 들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당연히 카리타스의 사랑 안에 들어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자아는 이 사랑에서 제외되는 제외되어야 한다. 이거야. 근데 그걸 끝까지 사랑하려고 하면 그게 바로 죄다 그렇게 가 죄가 오염되면 그다음에 카리타스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무슨 사랑이 오게 되느냐 여기에는 안 나왔는데 또 다른 사랑이 이렇게 있는데 이 사랑을 가리켜서 뭐라고 부르냐면은
꾸피디다스의 사랑이라 꾸비드는 여기 여기서는 큐피트에서 온 거예요. 큐피트 다스는 이게 명사 명사형 어미고 꾸삐띠 다스 꾸삐띠 다스는 뭐냐 하면은 유교계 유교계 6개월이 6개월 이런 거는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요거 욕자가 있잖아. 요 욕자 밑에 마음 심이 들어 있잖아. 근데 이게 욕자가 두 가지예요. 이렇게 이렇게 쓰기도 하고 이렇게 쓰기도 해. 차이가 뭔지 알아 마음심이 붙어 있으면 이거는 죄와 관련이 있는 거야.마음심이 붙어 있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인간의 발로야. 그래서 식욕할 때는 이걸 써. 근데 성욕할 때는 밑에 걸 쓴다고 이 위에 걸 안 써요.
그게 이제 사람들이 잘 안 가르쳐주는 내용이에요. 코비디다스라는 사랑이 생겨나게 돼. 그러면 이제 잘 들어봐요. 여기서 이제 이 신자가 이렇게 에로스의 사랑에서 출발해서 도저히 못 살겠다 해가지고 하나님을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아가페의 사랑을 받게 돼. 그리고 나서 그 사랑 때문에 카리타스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모든 것을 자기가 사랑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그런데 이 꾸피디다스. 이 카리타스의 사랑은 고정적인 게 아니라 이게 사랑이 끊임없이 변하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남녀 간에도 그렇잖아. 남녀 간에도 맨 처음에 만나가지고 그냥 뿅 갔을 때 그 사랑은 오래 가지가 않는단 말이야. 그래서 이성을 여러분들은 이미 다 결혼하고 아이들도 다 낳았지만은 그래서 아름다움이나 육체의 아름다움이나 감정에 너무 치우쳐서 사랑하는 거는 끝이 별로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일본 여자들이 20대 일본 여자들이 최근에 여자애들이 한국의 40대들하고 결혼을 많이 해요. 근데 왜 그러냐 그랬더니 감정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안전감이 있는 남자를 그거를 일본 여자들은 멋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40대 되면은 경제적인 여유도 있잖아. 20대하고 결혼하려고 하니까 경제적인 여유도 좀 있을 거 같네요. 그런 것들이 일본 여자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러니까 그냥 한 20살 나이 차이 나도 그냥 더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근데 그 살아가면 이제 그런 걸 다 해도 계속 사랑이 변하잖아요.
이게 이 카르타스의 사랑으로 충만해졌는데 이게 이제 매일매일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돼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 위해서는 무슨 조건이 필요하냐 하면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새롭게 새롭게 발견해야 되는 무얼 통해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면은 카리테스의 사랑이 유지되는데 그렇게 전심으로 기울이지를 않잖아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냐 하면은 여기에서 이게 여기에서 이 호피티다스의 사랑이 다리타스의 사랑 속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스며드는 정도가 아니라 이게 스며들어서 마지막에 이 목표는 뭐냐 하면은 이 카리타스의 사랑을 꽃삐띠 다스로 완전히 대체하는 겁니다. 그런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속해서 이렇게 생겨나게 됩니다.
이 그림 하나가 그거를 다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걸 말해주고 그러니까 이제 목회라는 것이 이제 어려운 이유가 뭐냐 하면은 목회의 목표가 뭐라 그랬어요? 왜 대답이 없어 하지 않고 공부를 해야 되는구나 목격한 목표가 뭐라 그랬어 심심 회심이 목회의 목표라는 거요.
그거보다도 그렇지 이제 우리가 이거 4명이서 시작하면서 맨 처음에 빌립보서 1장 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너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 그러더라고 그게 이제 너희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 마크 페리쇼에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우물 같은 데 물이 많아가지고 막 이렇게 철철철철 넘치는 모양을 보여주는 거네요.
거기서 이야기하는 아카페가 바로 이 카르타라스라에요.
이게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하는 그게 이제 목회의 목표예요.
그래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부고 그다음에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점점 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끔 만들어주는 게 목회다 이거예요.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이제 물으시기를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이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다.
그래서 근데 이제 사람들 보면 잘 들어요. 목회자들이 이러한 목회의 이거는 둘째도 아니고 첫 번째 목표야.
근데 이 첫 번째 목표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목회자들이 있어요.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말든지 크게 관심이 없는 목회자들이 있어요.
이유는 뭘까 이것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게 안타까워서 볼 수가 없다고 근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러니까 자기 지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하는 거야.
그래서 이제 이런 현실 여기에 나타나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살아갈 것이냐 이 쿠피디다스와 카리타스의 이 갈등 속에서 어떻게 이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이냐라는 거를 현미경으로 보듯이 쓴 책이 이 책(죄와 은혜의 지배)이에요. 이 책이 나왔을 때의 그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네티즌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게 이 책 전체가 바로 이제 그런 거를 이 갈등을 어떻게 그런 갈등이 시작이 되고 전개가 되고 그리고 어떻게 까르타스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느냐라고 하는 거를 이제 한 권에다가 담은 거야.
어떤 성도가 책을 예수 믿은 지 한 달도 안 되는 사람이 이 책을 읽었더라고요. 8일에 걸렸다 그러더라고 8일 8일 만에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스러운 회심을 했어요. 그래서 한 번 만났어요. 미국에 가서 미국에 있는 사람인데 책을 읽고 나서 그래서 어렵지 않더냐 그러니까 하나도 안 어렵더래요.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신기해. 그래서 뭐냐면 이걸 공부를 많이 그 영화 내에서 이렇게 무지한 박사라는 말이 있거든. 독토 이그노란스라는 말인데 무지한 박사님이 학문적으로는 굉장히 똑똑하고 아는 게 많아. 근데 뭐냐 하면 영적인 걸 너무 모르니까 이런 게 한없이 어렵게 느껴지는 지난번에 눌린 교회.
내가 있을 때 어린이 게으름이 나와가지고 키즈 콘서트를 했거든. 근데 거기에 6학년 아이가 나왔는데 아버지가 목사님이 그쪽 개척교회 목사님이고 6학년 아이가 책을 읽었는데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신학 공부가 나는 이렇게 해왔더라.
어렵지 않았냐 그랬더니까는 아니 어렵지 않았다고 너무 좋았다고 그런데 그러니까 그런 것도 뭐냐 하면은 세상에 대한 지혜는 아직 어리지만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극복하면서 읽어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지난번에 얘기했잖아. 내가 전하던 에드워즈 목사가 3시간씩 하는 설교를 그 아이가 본인 설교 듣고 싶다고 비켜 치세요. 그다음에 PD PD 바트라씨가 그다음에 로이트 존스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편지를 써서 초등학생이 목사님 빨리 돌아오셔서 설교하세요. 목사님이야말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하는 유일한 목회자라고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게 나의 사상에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 거야. 근데 설명을 하려면 이것들이 있냐 한 학기를 공부를 해야 돼요.
정도의 내용이에요. 이게 그렇게 해서 이제 79페이지에 이제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냐 하면은 지순의 사랑은 그리고 이제 카르타스의 사랑을 나는 이제 지순의 사랑이다 이렇게 표현하거든. 그래서 자신의 사랑은 하나님을 목표로 정하고 그분을 끊임없이 즐거워하며 그분께 자신을 합치시키려고 하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사랑의 정의죠. 그래서 그는 그릇된 자기 사랑 삐띠 다스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대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가 교회와 신자는 물론 교회 밖에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
A.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
신자는 교회 밖의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가 이웃을 사랑하는 근거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입니다. 바라보는 국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입니다.
박애애 때문에
박애애 때문에
첫째로, 신자는 박애적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목적적 사랑과 박애적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목적애로서 유용성이든 쾌락이든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있는 어떤 특성들이 자기에게 아름답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6:20). 후자는 박애애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대상이 가진 장점과는 상관없이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 때문에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행 4:32,롬5:5).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전자를 우정애 또는 욕망애라고 했으며, 후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카리타스라고 불렀습니다.
박애적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부어주신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근원과 목적이 하나인 사랑이니, 여러 개처럼 보이는 사랑은 하나에서 시작하여 만물을 휘돌지만 결국은 하나로 수렴됩니다. 사랑받는 모든 이로 하여금 자기를 사랑해 준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대상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교회라는 몸에 함께 지체가 된 신자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이웃에게까지 미칩니다.
아름다움 때문에
아름다움 때문에
둘째로, 신자는 이웃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동기는 언제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부어진 사랑의 성향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박애애도 아름다움을 동기로 삼습니다. 그러나 박애애가 아름다움을 사랑의 동기로 삼는 방식은 목적애가 그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목적애는 자기의 이익이나 욕망을 기준으로 아름다움의 여부를 결정하지만, 박애애는 사랑받는 대상 안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그를 사랑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고, 본성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개혁 신학자인 버미글리는 ‘본성적 연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불신 상태의 인간에게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의 근거가 됩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해 사랑을 부여받은 신자는 지체와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다(시 65:4, 135:3).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올바르고 충만하다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당신의 인성과 연합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거기에 우리의 형제들말고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탁월하게 반영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마음과 정신, 육체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신비하도록 아름답습니다(욥 33:28, 시 42:2-5). 이러한 복잡한 작용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 의지가 만나 스스로 도덕적 결정을 내려 행동하게 한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 영혼의 작용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탁월함입니다(시 31:7-8, 35:9). 그래서 창조된 것 중 가장 하나님을 닮은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가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소유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삼위일체 논할 때 결국은 인간의 이제 영혼을 유비로 해서 삼위일체를 사회학적 모델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거죠.어떻게 좁은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소유한 불신자까지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또한 사랑은 아름답게 보게 합니다. 사랑은 해석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려는 성향입니다(고전 13:5). 그래서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은 아주 흉악하고 추한 인간에게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영혼을 보게 합니다(눅 23:34). 신자가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마 15:32, 엡 4:32).
이것도 이제 좀 이제 어려움이 이제
어려운 이야기인데 79페이지의 각주를 보면은 사랑에 대해서 그거를 이제 구별해요. 구별하는데 첫째는 유익 때문에 성립하는 사랑 사랑이다. 그냥 상대방에서 어떤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한에서 사랑하는 거다. 예를 들면 젊음 때문에 아름다움 때문에 돈 때문에 뭐 등등등 이렇죠.
둘째는 쾌락 때문에 성립하는 사랑 어떤 즐거움이 돌아오는 한도 내에서 사랑하는 것이죠.
셋째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신의 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여자 그래서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 3개의 사랑으로 나눠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8권에서 세 종류의 우정을 이야기하는데 필리아를 얘기하는데 거기서는 이제 첫째가 유용함 때문에 그래서 디어토 크레시룸 이게 요용해요. 요용의 요용의 그다음에 두 번째 건 이제 쾌락의 쾌락에 이건 뭐냐면 디아
헤도니 헤도니 해도는 뭐예요? 즐거움이에요 즐거움 크리스천 헤도니즘 할 때 희락주의라고 그러잖아.
기독교 희락주의 희랍이 희락 혹은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건데 근데 또 다른 제3의 우정을 이야기하는데 요 4 3의 우정만이 참다운 우정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돈 아라돈 안가 돈 아까 동 카이 카타 아래 펜 그다음에 꼬모 이온 이 꼬오이오는 뭐냐 하면 같아 같다 그런 뜻이에요.
호머 호머 얘기하는 거야 같나 그래서 이 아가돈 아가도는 이제 선남이잖아 선 선과 그리고 아랫된 호모이든 같은 덕을 따르는 사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스스로 잠시 수 보고 야
언어에 보면은 유명한 구절이잖아요.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협 열호아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벗이 먼 곳에서 자원 스스로 레 찾아왔으니 불력 여로와 어찌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이제 우리의 눈을 끄는 두 단어가 있는데 그게 바로 붕이라고 하는 단어와 열이라고 하는 이 단어야. 우선 이제 여기서 이야기하는 열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기쁨인데 돼지고기를 먹거나 아니면은 소고기를 먹으면서 느끼는 그런 기쁨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영어에 이게 세 단어가 있어. 이게 다 급이 다 달라. 이 중에서 가장 고상한 고상한 행복이 어떤 거게 왜 이게 이제 다 오래 이제 공부한 지 오래되니까 다 감각을 다 잃어버렸지. 그래도 박대현 전도사는 좀 젊잖아. 우리가 좀 좀 남아 있지 않아.
뭐야 이게 세 가지가 어떻게 달라 어떻게 다르냐고요 응 위에 거는 이제 행복 마음의 행복 그다음에 중간 거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간 거는 약간 퓨어한 느낌 순수한 피오한 느낌스 엔조이는 애초에는 저거는 이제 쾌락적 즐거움
그게 아니고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이게 가장 탁월한 거고 이게 두 번째로 탁월하고 세 번째가 가장 푸신 거야.
그래서 우리들이 쓰는 거하고는 굉장히 다르지 그지.
그래서 웨스트민스트 신앙 고백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할 때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할 때 그 즐거워하고가 바로 이거란 말이야. 엔조에.
그래서 이제 외국에 가서 설교를 하고 나면은 이제 외국 사람들이 이제 덕담을 해요.
리얼리 엔조이 서먼 당신의 설교를 정말 즐겁게 들었습니다.
우리 말로 말하자면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뜻이죠.
해피니스는 그냥 기분 정신적인 상태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거죠.
플레저는 이제 육체의 어떤 그런 기쁨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이렇게 이제 외국 사람 만나서도 사용하는 단어에 따라 가지고 이제 그 사람의 이제 지적인 급수가 달라지는 거지.
근데 이제 여기에서 열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여기 n종류에 해당되는 이 얘기를 중국 애들한테 해주는데도 다 대학 나오고 대학원 나오는 애들인데도 못 알아듣더라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건 이제 이 붕이야. 붕 붕인데 이게 이거하고는 달라요. 이게 이거하고 그러면 유 유붕도 비가 오는 유봉도 이제 이게 해석을 놓고 말이 되게 많아요.이게 유분이 뭐냐 그래서 이제 몇 가지 해석이 있는데 있는 벗이 있는 벗이 또 별 의미가 없다.별로 의미가 없고 그냥 친구가 친구가 있기 때문에 친구일 수 있는 거지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이 붕하고 우는 달라요. 우는 그냥 친구야 친구가 무슨 뜻이에요? 오래 사귀어 정든 벗 그게 친구예요. 오래 사귀어 정든 벗 그게 친구야. 근데 붕이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이거는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같은 진리를 소유하고 같은 선을 소유하고 아까 얘기했듯이 같은 덕을 소유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유공의 자원 박래안이 불역여로화라고 하면 이게 뭐냐 하면 뭘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냐 하면은 친구가 와서 오래간만에 만났으니까 참 기분이 좋다. 그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나 혼자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이러저러한 사상을 가지고 내가 살았는데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념의 동지가 오는 거야. 그러니까 그와 만나서 뭐 당연히 밥도 먹고 고기도 먹겠지만 그게 즐거운 게 아니라 그와 나눌 이 신념과 진리와 선과 덕에 대한 대화 때문에 즐거운 거예요.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이 결국은 진정으로 하나 되는 비결이 뭐냐 하면은 한 말씀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 그래서 같은 신념과 진리 선과 덕을 소유하게 될 때 그때 진정한 선교의 교제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뭐야 저희를 진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이야 여러분들 인생에 붕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봐요.
이 붕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이 말이 또 우리나라에 와가지고는 붕당이라는 말로 나타났죠.
그렇죠 붕당 붕당은 언제 일어난 거야? 제시 조선시대 때 무슨 노론 소론 그러면서 이제 파벌이 나뉘잖아.
그래서 그들이 몰려다니면서 하는 정치를 붕당 정치라고 부르잖아.
그거는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지. 그러니까 붕은 붕인데 붕이 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뭉친 것은 그런 거는 이제 나쁜 거지.
그렇게 보면 하나회 같은 것도 옛날에 붕당 아니야 그거 붕당 그런 것들도 다 문제가 되는 거지.
이게 이제 이런 의미들이 이제 막 변하면서 이렇게 사용되는 중국 가서 이 얘기를 했는데 하나도 몰라 너무 새롭게 새로운 인상으로 그거를 듣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이고 큰일 났다. 중국도 이제는 저렇게 생각 없는 젊은이들만 생산해내고 있으니 참 큰일이다. 내가 그랬어. 그래서 이제 세 가지를 얘기한 거를 지금 이제 내가 얘기를 했죠. 그죠?
이것도 굉장히 이제 복잡해요. 되게 복잡하고 그래서 이제 이제 토마스 토마스 아케나스의 경우에는 그 뒤 페이지에 이제 나오려면
목적애와 박애애인데 그 목적의 자체를 우정애와 욕망으로 구분을 해요.
노정혜라고 아모르 아민찌 띠아 아민찌는 친구거든 친구 아모르는 사랑이고 그러니까 친구의 사랑 우정이죠.
우정 우정의 아모르 콘큐피스캔티아 곤큐피스캔티아는 이건 정욕이에요.
정욕 정욕 이것도 역시 똑같이 아까 코는 함께 큐피스는 큐피트에서 온 거고요.
스캔띠아는 이거는 알다 지식에서 온 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욕망의 정욕이라고 불러요.
이런 것들은 이제 목적이라 이거죠. 사랑의 어떤 목적이 개입이 되면 그것은 순수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이제 바게라는 것이 있어요. 이제 이 바에는 베네볼렌티아 베네볼렌티아라고 불러요.
베네볼렌티아 그러니까 아모르 베네볼렌티아 모를 얘네 올n PI 이렇게 베네볼런스라고 영어에서 쓰는데 이 베네볼런스는 뭐냐 하면은 바괴예요.
바괴 바괴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 때 그냥 깊을 박자에다가 사랑 했지 않습니까?
깊게 사랑하자 뭐 그런 뜻이지만은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목적에가 사랑의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는 데 비해서 이 박애에는 사랑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대표적인 게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박애란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은 하나님 자신의 하나님 자신의 자신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성품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태 그게 바로 이제 하나님의 박애예요.
아가페의 사랑의 특성이라 얘기.
근데 이제 이 박애애는 그냥 딱 무 자르듯이 딱 잘라서 박에에는 사랑하는 사람 자신에게서 출발하고 그다음에 목적에는 사랑받는 사람의 어떤 좋은 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자르기가 어려운 것이 두 개가 결합이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뭐냐 하면은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카리타스의 사랑이 이렇게 카리타스의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 그때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근데 이 카르타스의 사랑은 가장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이제 인간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인가 아니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라고 할 때 그거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것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은 영혼의 실체적인 것으로만 볼 것인가 여기에서 이제 루터파는 이거를 하나님과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 이제 실체적으로 완전히 부패했다 이렇게 보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제 어떤 어려움이 나오냐 하면은 그렇다면은 타락한 인간과 짐승 사이에는 별로 차별이 없는 거야.
그런 어려운 해석의 문제가 나오는 그래서 이제 개혁 교회에서는 이거를 어떻게 보냐면 실체적인 것과 관계적인 것이 함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몰카 같은 사람 신학자가 이제 그것을 이제 꽤 길게 논쟁을 해.
그래서 뭐냐 하면은 인간이 아무리 타락해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 형상이 어떻게 남아 있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는 이제 이거는 이제 어
유니오 쿵 크리스토라고 해요. 연합이고 이거는 함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에요.
근데 이걸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보는데 이제 피터 마터 버미 글리는 아주 유명한 이탈리 출신의 신학자고 칼빈이 엄청 존경했던 인물이었어요.
칼빈보다 나이가 좀 더 좀 더 많죠. 10살 정도 많은데 주석을 쓰면은 항상 버미글리에게 먼저 원고를 보내서 한번 좀 읽어봐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자기의 제네바의 자기 후임으로 6번을 초청을 해요.
결국은 이제 안 되죠.
네 그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제가 한 때 이 사람 책을 한 10권 정도 가지고 있는데 참 읽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네슬롱 이제 연합을 어떻게 얘기했냐 하면은요. 첫째는 본성의 연합 그다음에 본성의 연합 그다음에 통화의 연합 그다음에 세 번째 의 행위의 연합 그다음에 영화의 연관이 이건 뭐냐 하면은 이거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거죠.
그래서 교회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이 성화의 연합은 뭐냐 하면은 이제 이렇게 덧붙여진 사람이 아까 얘기한 대로 이렇게 죄의 영향을 받잖아.
그러면 이제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죄를 죽이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 가는 거야.
이 성화의 연합이라고 이것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부활의 날에 이제 어떠한 죄도 없이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는 건데 그걸 모두 다 합쳐서 이를 성화의 연합이라고 부르는 이 본성의 연합은 뭐냐 하면 이거는 모든 인간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인간의 인간의 영혼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연합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어떤 결론에 도달하냐 하면은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짐승과는 다르다.
그래서 당연히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런 거는 법학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논의에요.
왜냐하면은 인간이 왜 존엄한가라고 물을 때 사람들은 대답을 못해요.
인간은 존엄하다. 왜 왜 왜 존엄하냐 왜 인간이 왜 인간이 왜 존엄하냐 이거 결국은 뭐냐면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존엄한다고 그러는 건데 근데 근거가 부족하잖아요.
근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본성의 연합에서 찾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의 영혼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고유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이제 더 넓은 의미에서는 그것을 여전히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인간이 그렇게 존엄한 존재다라는 것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되냐 하면은 이렇게 까르타스의 사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이 사람 이 사람 때문에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죄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이제 칼빈이 이거를 아주 유능하게 논쟁을 해요.
뭐냐 하면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통일이 될 수 있는가 문제를 거기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에서 답을 찾아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82페이지를 보면
81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 보세요. 그래서 불신 상태의 인간에게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의 근거가 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중생과 회심을 통해 사랑을 부여받은 신자는 지체와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올바르고 충만하다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거에 줄치세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올바르고 충만하다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당신의 인성과 연합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왜 왜 그러겠어요?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잖아요.
연합 더욱이 희미한 형상이 아니라 뚜렷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연합이잖아요.
왜 그 형상을 하나님이 다시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서 다시 부여받게 하셨으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거기에 우리들의 형제 말고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거는 삼위일체에 나오는 얘기예요. 각주 6번 보세요.
각주 6번 쿠비도 에르고 딜리기 카리타스, 니시쿠보드 까리다테 딜리기무스 이게 뭐냐 하면은 에르고 그러므로 그러므로 까리따떼 뒤에 까리따떼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딜리기 무스 우리가 사랑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 말고 까리따스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그것을 제외한다면 제외한다면 까리따스는 코비드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되는 거야. 이게 이드 아웃템 우 폭시모 프로 프로 우에 하무르 프라테르 에스트는 그런데 뭐라고 그러냐 하면은 이들은 대시고 아우템은 버신다.
퍼퍼 셰퍼 그러나 그러나 에즈 클로즈 에즈 파스프 그러니까 가능한 한 최대로 가까이에 있는 그런 뜻이야.
가까이에 있는 그런 뜻인데 프로 우에 바모로는 뭐냐 하면은 사랑을 받는 그러면은 그렇다면 가장 가능한 한 가장 가깝게 사랑 받는 것은 프라테르 에스트 형제이다.
이렇게 되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다른 곳에서는 또 어떻게 얘기하냐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다음에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얘기를 해.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라 이거죠. 근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기 하나님 형제 말고 누가 있겠으며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기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이게 이게 이거는 이 삼위일체는 대단한 작품이에요.
이리 언제 공부할 기회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두 번을 읽는데 책 전체를 두 번 읽는 데 두 달 걸렸어요.
근데 다행히 한 줄도 이해 안 되는 구절이 없었어요.
근데 어느 대학원에서 이 책을 읽으라고 그랬더니 학생들이 이게 기호집이지 책이냐 그러더라고.
첫 시작부터 그 문장의 뜻이 이해가 안 되니까 정말 아름다운 글이에요.
나중에 한번 공부하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 책에 선문에다가 써요.
하나님이시 젊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늙어서야 출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30년 40년 정도 걸려요.
참 굉장한 역이 아마 인류 역사에서 누구도 그만큼 쓸 수 없을 정도로 그것도 선배들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근데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그래도 좀 유리했지 삼권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워낙 많이 남겨놨으니까.
근데 이제 어거스틴스트에는 그런 선배들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순수하게 사유로서 그것들을 풀어나가니까 굉장한 거죠.
B. 신자를 더욱 사랑하는 신자
B. 신자를 더욱 사랑하는 신자
신자는 또한 다른 신자를 더욱 사랑합니다. 색맹인 사람들의 눈에는 가을철 단풍이 때묻은 빨래처럼 지저분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색깔과 빛깔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도 한때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생과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혼의 심미안을 뜨게 해 주신 이후에는 성경과 구원의 역사, 인간의 영혼과 교회 세계와 자연만물 속에서 질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엡 1:18).
그러니까 이제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그런 미적 감각을 주시는 거예요. 새로운 감각을 에드워즈는 뉴센스라고 그랬어요. 뉴센스, 새로운 감각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그다음에 천상의 세계에 대한 영원한 것들에 대한 감각들이 주어지게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중생과 회심을 통해 신자의 마음에 사랑을 심으십니다. 그 사랑으로 신자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특별히 신자는 지체의 연합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욱 분명히 봅니다. 그래서 서로를 더욱 사랑합니다. 신자가 특별히 다른 신자를 더욱 사랑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구속을 통해 연합되었기에
구속을 통해 연합되었기에
첫째로 신자는 구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으신 자가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참된 보편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참으로 중생하여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신자의 연합인 이 교회를 보편 교회 또는 우주적 교회라고 부릅니다(요 17:21-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각 교회와 단체들의 머리가 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유기체로서 하나인 보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신자는 구원받는 즉시 보편 교회 안에 접붙여져(롬 6:5, 골 2:19)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신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구속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 죄에 빠져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 연합은 법이나 제도로 강요된 외적 연합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내적 연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교회 같은 교파에 속한 사람들과만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고,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서로 다른 교파가 있습니다. 신앙의 조항에는 근본적인 조항과 비근본적인 조항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저항이 다를 때 그것을 뒤따르는 무리를 이단이라고 부르고, 비근본적인 저항이 서로 다를 때는 교파라고 부릅니다. 두 조항의 차이는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신앙의 근본적인 조항이냐 그 정도는 아닌 비근본적인 조항이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가 신앙의 모든 조항에서 완벽하게 일치된 고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입장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어야 하지만,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증명된 교리를 견제한다고 믿을지라도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고 사랑해야 됩니다.
보이는 교회는 보편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무대입니다. 물론 개별적인 사람들을 보아서는 사랑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 팔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고 해서 팔을 자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 교회를 또는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입니다. 그 사람과 나는 영적으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떼어내면 나에게도 고통이 전달될 것이고, 그 고통은 몸 전체가 겪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입니다. 그때 우리는 몸을 아프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고통스러운 쪽을 택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에게 죄 지은 지체를 용서합니다.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대상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합니다. 신자 안에 있는 지순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말은 다 좋은데 실제로 이렇게 못하잖아. 근데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은 어떻게 해야 돼? 카르타스의 사랑이 충만해야 된다는 거지. 그때 이제 사랑하게 된다면 원수도 사랑하게 되는 거야.
신자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신자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둘째로 신자는 자신과 교제하신 하나님 때문에 다른 신자를 더욱 사랑합니다. 불신자에게도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좁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론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실제로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고 그 의를 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법정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심으로 깨어진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분과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니 더욱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는 다른 신자 안에서도 동일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기에 그들을 더욱 사랑합니다.
거기서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제 마르틴 루터는 이제 실재론적으로 보았고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렇게 보거든요.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잊는 데 있다 이렇게 했는데 이제 이게 이제 아까 뒤집으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불신자는 그러면은 짐승과 다름이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야.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이제 잔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제 어떻게 봐야 될 것이냐 그래서 그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다 파괴되었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나마 그래도 양심과 도덕, 그다음에 학문, 진리 이런 것들을 추구해 갈 수 있는 거지 그러나 이제 그것만으로 그것만으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C. 사랑의 목적 : 존재의 목적을 공유하게 하심
C. 사랑의 목적 : 존재의 목적을 공유하게 하심
모든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이 나누는 사회적 사랑이나 친자가 하나님 과 이웃을 향한 가진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본뜬 것입니다. 인간 이외의 피조물을 향한 선의조차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본뜬 것입니다. 심지어 이기적인 자기 사랑까지도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본뜬 것입니다. 사치는 하나님의 무한이 풍족하심을 잘못 보던 것이며, 교만은 하나님의 영원히 높으심을 잘못 본뜬 것입니다.
이 사랑은 원래 삼위 하나님 안에 있던 것으로 교통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이외의 존재들을 사랑함으로써 온 우주를 감싸시며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두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것이라면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또한 자연 사물을 향한 선의를 베풀게 합니다.
근데 거기서 이제 설명하자면 이런 게 뭐냐 하나님의 사랑은 원래 하나님이시잖아. 근데 어떤 문제가 나오냐면은 사랑이 성립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사랑하는 자도 있어야 되지만 뭐가 또 있어야 돼요?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랑하는 자도 있어야 되고 사랑도 있어야 되고 사랑받는 자도 있어야 된단 말이야. 사랑받는 자도 있어야 된단 말이야. 그런데 사랑은 관계적인 거잖아. 근데 하나님이 아직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는 그거는 이제 시간을 초월하는 거잖아. 그러면은 천지 창조 되고 나서야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은 뭐가 있어야 된다고 그랬어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랑 사랑 자체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된다 그랬잖아요. 근데 그 영원 전에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는 거예요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가는 거죠. 성부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 그다음에 성령 하나님은 사랑 자체 그다음에 성자 하나님은 사랑받는 분 그래서 하나님 홀로 계실 때조차도 하나님은 사랑이셨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성경에 보면은 이런 특이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안 나와 왜 대답을 못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안 나와 나오지 그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안 나와 나와 안 나와 나와요.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와 안 나와요.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성령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을 사랑하라는 말이 되는 거예요. 이게 투톨로지가 되는 거야. 동어 반복이 되는 거야. 타우톨로지 타오톨로기라고 그러지 저기 독일어로 타오톨로기 영어로는 투톨로지가 되지. 그게 이제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나오는 거예요. 성령을 사랑하라는 얘기가 안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근데 요즘에 이제 요즘 좀 지나갔는데 언제 서점에서 책 나온 거 보니까 여태껏 우리가 성부 성자는 많이 사랑했으니까 성령께서 소외감을 느끼실 테니 이제 우리는 이제부터 성령도 좀 사랑합시다. 그런 내용으로 글을 썼더라고 책을 썼더라고. 근데 그거는 이제 너무 몰라서 그런 책을 쓰는 거죠.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때 그때 그 사랑 안에 성령이 계시는 거예요. 재작년엔가 영국에 가서 여기에 선교사들 모아놓고 한 200명이 모여서 세미나를 했는데 이거를 영어로 발표를 했는데 맞아 그 강의를 듣고 나서 이제 거기에 있는 누구를 뭐라 이사회 이사장이지 그 선교회 이사장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나한테 와서 손을 붙들고 그게 나도 평소에 왜 성부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있는데 왜 성령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없는지 그게 그게 궁금했는데 답을 못 찾았는데 오늘 답을 찾았다고 그러면서 너무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더라고요. 알고 보면 가장 초보적인 데 그다음에 그다음 사람 이거 보세요.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그리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맡기신 직무와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사물들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자 안에 있는 지순의 사랑은 하나님 이외의 그 무엇도 궁극적인 사랑의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지순의 사랑의 중심점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일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지순의 사랑 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창조의 목적이 재물과 명예, 높은 평판을 추구하며 사는 것보다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피조물 된 자의 영광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임을 이해합니다(사 43:7).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이 세상을 만들고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치시킵니다.
이러한 신자들이 많을 때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합니다. 이는 은사와 재능이 서로 다른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김을 뜻합니다. 이처럼 교회의 존재 목적과 신자 인생의 목적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엡 2:10).
다양한 지역의 여러 교회가 하나님의 한 사랑 안에서 한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교회는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 가는 데 힘 있게 기여할 것입니다. 신자는 그 일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빌 1:11). 그리하여 자신들이 마땅히 구현해야 할 존재의 목적을 교회와 함께 공동체적으로 이루어 가게 됩니다.
맺는 말
맺는 말
인간과 세계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땅 위에 동일하게 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위에 더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아들에게 부을, 그 사랑을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 부으십니다.
그 첫 번째 일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고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십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성령 안에서 한몸이 되어 하나님이 기대하였던 사랑스러운 연합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만납니다. 신자의 삶은 이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의 지체뿐 아니라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고국이 없기 때문입니다(골 1:23).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신학 지식에는 ‘자기 나라’가 없습니다(요 18:36, 롬 1:14). 만약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세상에 특정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발견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모든 인류가 함께 누리기를 원하시는 지식입니다(합 2:14, 딤후 4:17).
그러니까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면 그 지식은 공공재가 되어야 된다는 거야. 공공재 모든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그러한 지적 재산이 되어야 된다는 거지. 근데 모든 사람이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전도를 해야지 전도를 해야지 그게 활용이 되지 그러니까 그런 진리의 빛이 비추면은 놀랍게 변화될 인간들이 그런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은 그게 이제 안타까운 거죠.
이 지식이 있기에 신자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때 그는 그 사람이 수단이 아니라 목표 자체인 것처럼 사랑합니다. 사람을 향한 참 사랑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 안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3:10, 14, 4:21).
신자의 연합인 교회는 이 사랑이 완성될 때를 바라봅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모든 인류가 서로를 자기 몸의 일부인 것처럼 여기며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현재 투쟁 중인 지상 교회는 미래에 이루어질 그 사랑의 나라를 자신 안에서 이루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지체는 서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이 세상에 보여줍니다(창 2:23, 벧전 1:22, 계 1:5-6).
이 사랑이 무엇인지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올바르게 배웁니다. 신자는 이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온 인류를 사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은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입니다.
뒤에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마쳤는데, 근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그 삶이 바로 그렇게 당신과의 좁은 의미에서 이제 당신을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연합은 사실은 이제 오순절 성령 강령 사건 이후로 구체화되는 것이고,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셔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조차도 병 고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셨던 것은 결국은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그 모든 죄인들이 보였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매다는 로마의 병장들을 위해서조차 기도하셨던 거예요.
그렇게 놓고 보면 이제 우리들이 불신자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너무나 잘 나타나는 거죠. 그러니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믿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보다도 안 믿는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더 많이 보여주셨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제 오순절 성령 감염 사건이 있고 나서는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의 한 지체로 접붙인 바 되고, 그리고 그다음에 그렇게 접붙인바된 사람이 이제 오순절에 부어주신 그 성령 세례 속으로 이제 적용이 되어서 들어가서 그래서 이제 성령을 소유하게 된 거죠.
자신 안에 성령을 소유하게 된 것인데 그렇게 하심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아주 진한 교훈들을 오히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더 잘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는 천국에 오르셨으나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그 하시던 일을 뒤이음으로써 오히려 신자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그 아름다운 모범을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교회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거예요.
그냥 항상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다. 온 우주적 보편 교회 딱 하나다. 그리고 거기에 이제 다양한 교파와 그다음에 신교 구교 등등의 갈등이 다 있겠지만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연합이다.
다양한 생각들과 견해를 가지고 있게 되는 거죠. 그런 것들 중에서 근본 조항과 비근본적인 조항에 대해서 근본적인 조항은 이제 그것을 부인하면 교회가 될 수 없는 정도의 그런 커다란 조항들 그런 것들이고 그런 것들을 이제 넘어서면 우리를 이단으로 부르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는 그 아름다운 연합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거예요. 한 몸을
우리는 그 몸에 한 일부분이 지나지 않는 거죠.
그 연합 안에 지금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교회들 그다음에 현재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교회들까지도 다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래서 하나의 장엄한 하나의 교회가 우주의 우주를 이루는 한 몸으로서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가 거기에 덧붙여진 그런 아주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질문 있으면 하세요.
Q.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적으로 이제 발견해 나가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지식들이 부어져야 그 사랑이 점점 더 커진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간혹 지식이 많은 분들 중에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렇게 보이지 않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것들은 저의 측면에서 그분의 지식이 커 보이지만 그분들의 지식이 고정돼 있어서 더 새로운 지식들이 부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혹은 그런 것들을 좀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그러니까 이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지식이라는 개념은 경험과 떨어질 수 없는 지식이에요. 그래서 이제 야다라고 하는 그 단어 자체도 경험적인 지식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나 이제 경험과 상관없이 신학이라는 학문도 결국은 어떻게 보면 이성의 토대 위에서 세워져 가는 부분이 절반은 되니까 그러니까 머리 좋은 사람이 신학도 잘하겠죠.
그러나 이제 깊은 그 안에 있는 영적인 비밀들을 깨닫는 것은 결코 세상적인 지식의 능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지난번 설교할 때도 나왔던 건데 1740년에 이제 스코틀랜드 캔버스를 내면서 큰 부흥이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 너는 시골 교회에서 한 설교자가 십자가 설교를 하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랬잖아요. 알고 보니까 그 지방 신학교의 교리학 교수였어요.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내가 평생토록 평생토록 속죄의 교리를 가르쳤으나 속죄하신 주님은 만나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오늘에야 내가 속죄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게 이제 경험적인 지식의 그런 커다란 사회를 보여주는 거죠.
사도 바울이 탁월한 그런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잖아. 근데 이제 백그라운드가 이제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다음에 이제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근데 결국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니까 그 지식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이 되고 연동이 되어야 되는지를 잘 모르는 거죠. 그러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나면서 그 지식들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런 비유를 많이 쓰는데 이제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어요. 1110볼트 들어오는 전열 기구에 220 이게 쓰는 전기 전구를 이렇게 꽂으면 불이 들어올까 안 들어올까 희미하게 들어와 들어오는데 한 11,100와트짜리를 꼽으면은 한 5와트 정도 들어와 그런 거를 한 예를 들어 한 천 개쯤 이제 예배당에 깔아놨다고 쳐 3개 깔아놔도 5와트밖에 안 되니까 5와트씩 해가지고 천 개면 5천 와트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천 개를 깔아놓을 그 예배당에 5천 마트면은 희미해서 글자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그거를 갑자기 그냥 승합기를 달아가지고 110볼트짜리를 220볼트 탁 전기를 올렸을 때 10만 초광이 내려지는 거예요. 10만 초광 눈부시겠죠 그러 변화가 사도 바울 속에 일어난 거야.
그러고 나니까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다 짝을 맞춰지기 시작하는 거지 그래서 이제 이 공부라는 것이 신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되게 무시를 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주님을 딱 만났을 때 이렇게 확 하고 그 찬란한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그 지식을 지식이 사도 바울은 있었기 때문에 로마서 같은 책을 쓸 수가 있었던 거예요.에베소서나 골로새서나 같은 이런 책들을 쓸 수 있어 쓸 수 있었던 거죠. 그러나 이제 베드로나 나머지 사도들은 그런 책을 쓸 수가 없었던 거죠.
지식은 지식대로 중요해요. 근데 한계는 뭐냐 하면 그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얻은 지식만으로는 신령한 세계를 알 수가 없는 신령한 세계는 반드시 신령한 지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총명이 필요한 거예요. 총명이 아이스 다노마일 아이스테시스가 필요한 거죠.
또 다른 질문 있으면 하세요.
Q. 꼭 이 내용만의 그거는 아닌데 제가 어떤 걸 디스 하는 이런 부분은 아니고 모 교단의 총장님은 늘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하는데 그게 제가 들으면서도 그 강조점이 뭔지는 알겠지만 그건 좀 이렇게 오해가 크게 있을 만한 말이다라는 그런 계속 그런 좀 마음들이 있었는데 목사님께 한번 여쭤
A. 그 말은 이제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지 어떤 의미에서 이제 신학이 학문이 아니냐 하면은 학문의 토대가 인간의 이성의 탐색 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 탐색된 것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제 신학이 학문이 아니죠. 학문이 아니죠.
그래서 그렇지만 그 학문이 아닌데 그런데 또 반대 또 한 면에서는 비록 학문의 원재료는 인간 이성에 의해 탐색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일단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계시를 받아들일 때 그 지식은 유래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믿음으로써 지식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일반 학문의 접근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렇지만 일단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부터 그다음에 그것들을 발전시켜 나아갈 때는 똑같이 똑같이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야 된다는 점에서는 학문이라는 거지 그런 식으로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그 의도는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딱 잘라서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걸 이제 누구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걸 어디서 잘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응 여기 있다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_김남준 그래서 여기 하나씩 이동해
왜 저래 못 받을 사람 다 있죠 거기서 어디를 보시냐 하면은 24페이지를 보세요. 24페이지 아주 그냥 딱 거기에 질문에 맞는 답이 여기 딱 나옵니다. 23페이지를 보세요. 23페이지 질문한 사람 읽어봐 이거 이거 이거 마이크 가지고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함. 둘째로 신학과 기타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연 신학이 학문일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면에서 신학은 학문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이성적으로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신학은 신앙적으로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학이 때로는 개별적인 사항들 예를 들어서 성경의 인물들, 행적 등을 다루면서 믿음의 규칙이나 생활의 교훈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학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내가 논한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한 지식은 오직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식, 곧 구원하는 믿음을 낳고 양육하며 보호하고 강하게 하는 지식뿐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신학이 믿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이러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문을 자연 이성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과 더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으로 분류하면서 신학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가르침 신학은 학문이다. 그런데 학문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로 어떤 학문은 지성의 자연적인 빛으로 인식하게 된 원리로부터 시작하는데, 예를 들자면 산수학, 기하학 등과 같은 종류의 학문이 그것이다. 둘째로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인식하게 된 원리로부터 출발하는 학문인데, 예를 들자면 광학은 기하학에 의해 세워진 원리에서 출발하며, 음악은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로부터 시작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제 거룩한 아니 그런데 이제 잘 들어봐. 이게 이제 어떻게 학문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이제 이해되지 그러니까 순수하게 지상의 자연적인 지상의 빛으로 하게 되는 학문이 산수학이나 기하학 같은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광학 같은 거는 기하학에서 이미 다 발견한 원리들을 받아들여서 그다음에 빛의 성질을 설명하는 게 광학이란 말이야. 음악은 어떻게 되냐 하면은 산수학에서 산수학에서 수혈 수열로 표시된 것들을 그것들을 규칙이라고 받아들이면서 거기에서 화성과 대위법이 나오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화성은 위 아래, 위아래 도우미 솔 이렇게 이렇게 나오는 거고 도우미 솔, 이런 여기 어디 그런 게 있는데 왜 도미솔 이러면 시간의 순서에 의면 도미 솔 나오잖아. 근데 이 세 개를 동시에 딱 치면은 도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솔도 아닌 소리가 화음으로 나온단 말이야. 그런 것들은 이미 수학에서 발견된 원리를 따라서 하는 거라 이거야. 그게 화성이고 대위는 이제 하나의 하나의 커다란 곡조의 마디가 그다음 마디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가르쳐서 대위라고 그래요. 그래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성법과 그다음에 대위법 두 가지란 말이야. 그런 것들은 수학에서 나온 걸 이미 기초로 하고 있다라는 거야.
그런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어떻게 그 원래의 원 자료를 어떻게 어디에 기초한다고 계시에 기초하는 거고 그리고 계시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에 의해서 그 재료들이 마련이 되고 그 마련된 재료들을 가지고 이성에 의해서 그것들을 조립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당연히 학문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그분이 말하는 것처럼 신학이 학문이 아니다. 그러려면 광학도 학문이 아니고 음악도 학문이 아니어야 되는 겁니다. 한 줄만 읽어봤어도 그런 소리는 안 하지. 그러면 이제 맨날 맨날 그 사람 하는 얘기야. 그냥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게 하는 이야기야.
이게 왜냐하면 이제 고리타분하게 앉아가지고 맨날 전도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고 그런 거 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거야.
그래서 거기 이제 내 결론을 내가 읽어줄게. 신학은 두 번째 학문의 방식인데 상위 학문의 빛 이른바 하나님과 지복자들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알게 된 원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게 어디에 있다는 거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거지. 여기서 지복자는 뭐냐 하면은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야.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제복자들의 신학이고 우리는 순례자의 신학이야. 순례자의 신학은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해. 그 당시에는 아직까지도 이런 도그마 거울이 아니라 동경이나 석경을 사용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희미하게 보이는데 지복자들은 그때는 우리가 밝히 알게 되리라. 그러니까 우리 순례자들의 신학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탁월한 그런 걸 가지고 있지.
그것도 니네 어디 있는데 전어에는 신나 하나의 복잡한 도표로 크게 나와 있는데 나중에 나중에 기억이 또 말이지 마치 음악이라는 학문이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를 믿는 것 같이 신학은 하나님께로부터 개시된 원리들을 믿는 것이다. 이 신학의 원리가 내적 원리와 외적 원리가 있는데 외적인 원리는 계시고 그다음에 내적인 원리는 신앙이에요. 혹은 성령이라고도 말하죠. 명쾌하지 명쾌하지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이걸 딱 보여줘요. 편지를 쓰든지 그렇게 말하면 음악도 학문이 아니고 광학도 학문이 아닙니다. 말해야지
Q. 신학을 하고 성가대 대장으로 하다가 사업이 너무 잘 돼 가지고 사업을 계속 이렇게 하면서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면 어떻게 해야 되죠?
A. 전도해서 교회에 헌금 많이 하게 하세요. 성경 뭐 이렇게 접근할 수 있는 이렇게 성경이나 고민할 수 있는 부분들을 그 사람이 신학교까지 나왔는데 왜 교회를 안 다닌다고 아직 거듭나지 못했나 보지. 전달을 해야지 안 믿는 사람 전도하는 거하고 똑같지.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냐 진짜 당신이 오늘 죽으면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느냐 그렇게 돈 번다고 미쳐서 정신 빠져서 살아도 한순간에 불면 다 날아가 버리는 건데 인생이 허무하지 않냐 그리고 그런 설교를 들려줘.
그러면 되겠네. 그거 저기 다다음 주에 교회 꼭 오라고 그래가지고 그런 설교를 들려주라고 십자가 설교를 기해 준다.
또 질문 있으면 하세요. 없으면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원래의 모임으로 모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과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