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29. 금요리더모임. 성경이 말하는 교회 ① - 말씀을 배우는데 힘쓰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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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서론
서론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여름 방학이 끝나고 다시 금요모임으로 모였습니다. 날짜를 세어보니 꼬박 두 달만에 만났는데요, 아무리 기간이 길어도 방학은 언제나 짧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누워 있자” 하길 즐기는 우리의 죄성에서부터 비롯된 마음이기에 돌아서서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당한 휴식의 시간을 허락하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다시금 힘을 내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향해 달려가봅시다.
이 시간 우리 각자 하나님 앞에 다짐하는 의미로, 또한 서로 격려하는 의미로 옆사람과 이렇게 인사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리더로 부르셨습니다.” 앞뒤로도 이렇게 인사를 나눕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난 두 달의 시간동안 저는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로 묻고, 또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교회”와 “부흥”이라는 주제였는데요, 먼저 맛보게 하신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부디 이 시간 성령께서 저를 지혜롭게 하셔서 주신 은혜를 하나도 흘리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전할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부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무엇이 “부흥”일까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부흥이라는 단어의 뜻은 이렇습니다.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그렇게 되게 함.”
그렇다면 모임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부흥일까요? 단순히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재정이 가득해지고 멋진 건물을 세워가는 것이 부흥일까요? 이것도 조금 어색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 부흥일까요? 이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앞서 제시한 세 가지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매출이 줄어들고 있는 식당이 마케팅 전략을 잘 세워 리뉴얼에 성공하면, 금새 손님이 가득해져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까지 찾는 맛집으로 성장하는 것을 우리는 꽤 자주 봅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교회도 얼마든지 세상의 지혜와 능력으로 찾는 사람을 늘릴 수 있겠지요. 교회의 재정이 가득해지고 멋진 건물을 세워가는 것도 이런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요인으로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자기를 꾸며내서 나타나고 놀라워 보이는 일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니 사이비 종교들의 집회에서 일어난 요상한 기적들에 대해 너무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들 또한 사탄에게 자기 영혼을 팔아넘긴다면 이 자리에서 그런 종류의 기적들을 나타내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숫자가 늘어나고, 재정과 사역의 규모가 확장되며, 기적이 나타나는 것. 분명 부흥의 현상일 수 있지만, 부흥의 본질은 아닙니다. 부흥의 현상만을 좇다 보면 우리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닌데도 그것이 옳다 하며 달려가게 될 위험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한다고 할 때 이 부흥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교회에 대해서 강의하는 교수님들 중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몇몇 분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빌레키지안 박사(Gilbert Bilezikian)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은 교회가 성경에 기록된 본래의 건강한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얼 케언즈 박사(Earle Cairns)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더욱 힘있는 영적인 삶과 증거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부흥은 분명히 회복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각각 본질과 현상이라는 것으로 구분해서 따져보아야 하는데요, 이렇게 한 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늘 허약했던 사람이 체질이 개선되어 건강해지면 여러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체중이 늘고, 근육이 붙고, 힘이 세지고,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운동들을 해낼 수 있게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증거이자 현상입니다. 이런 증거와 현상이 나타난 것에는 언제나 몸이 근본적으로 건강해지며 체질이 바뀌었다는 원인 곧, 본질이 앞서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근본적으로 건강해지며 체질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숫자가 늘어나고, 재정이 풍성해지고, 기적의 역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현상이지, 부흥의 본질은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습대로 회복되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만을 좇다가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반드시 본질을 먼저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본질이 회복될 때, 현상은 자연스레 따라 오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자연스레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열매만을 위해 아무 나무에나 붙으면 무엇인가 진짜와 비슷해 보이는 것이 맺히긴 하겠지만, 비슷한 것일 뿐 진짜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먼저 본질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간에 걸쳐,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서 성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맡고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본질을 회복하며 우리 공동체가 정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대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각자의 소그룹이, 그리고 우리 전체 공동체가 부흥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함께 귀기울여 봅시다.
본론 1
본론 1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지, 또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사도행전만큼 적절한 성경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27권 중에서도 참 특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신약성경은 크게 네 종류로 분류를 할 수 있습니다. 각각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인데, 사도행전은 이 27권 중에서 유일한 역사서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교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책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교회가 무엇에 힘썼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의 본질과 부흥”을 생각할 때 반드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본래 “데오빌로”라는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지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 데오빌로는 누구일까요? 원래 사도행전 이전에 동일한 사람에게 써서 보냈던 것임에 분명한 누가복음의 첫 부분을 펼쳐보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는 데오빌로를 각하라고 부릅니다. 이 “각하”라는 호칭은 당시 총독과 같은 아주 고위급 관료에게만 붙이는 존칭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사시던 시절 유대 지역의 총독으로 재임했었지요.
누가가 처음 복음서를 써서 보낼때만 해도 총독이라고 존칭을 붙였던 것을 보면, 아직 데오빌로가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존칭을 빼고 그냥 “데오빌로여”하고 부릅니다. 이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데오빌로에게 보낸 초대교회의 역사에 관한 기록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는 이 데오빌로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요? 로마 황실과 연결된 인물이었던 데오빌로에게, 누가는 사랑하는 교회를 변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통치를 반대하는 반정부 집단으로 오해받았고, 네로 황제 치하에서는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몰려 혹독한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는 교회가 위험한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이며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가 절대 거짓을 꾸며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미화된 버전의 교회의 역사를 전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데오빌로가 믿게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 그분이 교회의 시대를 여시고 이끌어 오신 눈부신 역사를 사실대로 전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약 40-50년 간에 걸친 역사를, 이 단편 소설 하나보다 작은 분량에다가 녹여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을까요?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얼마나 한 문장 한 문장을 고심하면서 적어 내려갔을까요?
그런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반드시 전하고 싶었던 교회의 본질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세워진 초대교회는, 놀랍도록 본질에 집중한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저는 분명 세 가지라고 말했는데, 42절을 보니 ‘사도의 가르침, 교제, 떡을 떼는 것, 기도’ 이렇게 네 가지처럼 보이지 않으시나요? 개역개정의 번역에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원문의 구조와 뉘앙스를 살려서 다시 번역한 것을 보여드려보겠습니다. “그들은 계속 전념하고 있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그리고 떡을 떼며 교제하는 것에, 그리고 기도들에.”
누가는 이 세 가지가 교회가 추구해야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힘쓰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προσκαρτερέω(proskartereō)”라고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열심히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힘과 능력을 다해서 아주 고집스럽게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가는 것을 뜻합니다. 누가는 이 단어를 사용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세 가지 본질을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공유하고 있던 아주 기본적인 정서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고등부를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학생들에게 “힘쓴다”라는게 무엇인지, “전념한다”라는게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싶어서, 하루 날을 잡아서 우르르 데리고 신촌을 방문했습니다. 일단 맛있는 것을 사먹이고, 연대 근처에 있는 한 카페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학생들 눈이 똥그래지며 충격을 받더라구요. 카페에 있는 모두가 자기 공부에 힘쓰고 전념하는 모습에 압도가 된 모양이었습니다. 나름 공부 좀 열심히 한다 자부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학생들이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전도사님 진짜 공부에 전념한다는게 뭔지 이제야 알겠어요. 저 정도는 해야 연세대 들어갈 수 있나봐요.”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제가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이,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싶었던 교회의 모습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우리는 이런 것들에 힘쓰고 전념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세 가지가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기도’입니다.
본론 2
본론 2
오늘은 가장 교회의 본질로 제시된 세 가지 중의 첫 번째,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부분에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양 문명의 전통에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이 대개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킵니다. 누가가 교회의 본질을 말하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맨 처음에 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 가운데 언제나 가장 우선해야 하고 가장 중요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가르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사도행전 17장 2절을 봅시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당시에 바울이 가지고 있던 성경은 구약성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가르침은 언제나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무엇이 쓰여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고, 공의와 사랑으로, 권능과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신 것이 기록되어 있지요.
또 성경에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쓰여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들 중에 가장 귀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나,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이런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 쓰여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자녀들을 택하시고,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계획하셨으며,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통해 구속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시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실제 삶에서의 지침과 교훈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령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 간에,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혹은 직장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교회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등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 말씀 속에 구원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확신의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여러분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하는 자’입니까? 여러분은 작은 공동체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속한 공동체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지, 그들과 함께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여러분은 무엇을 통해 확인하고 점검하고 배워가고 있습니까? 그냥 여러분의 생각과 느낌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을 영어로 Bible이라고 부릅니다. “Bible”은 헬라어 “βίβλος(Biblos)”에서 온 단어로 우리가 아는 파피루스의 그리스식 명칭입니다. 그러니 결국 “Bible”은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책”을 뜻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또 다른 말로는 Canon이라고 부릅니다. “Canon”은 헬라어 “κανών(kanōn)”에서 온 단어로 원래는 갈대를 뜻했습니다. 갈대는 원래 아주 부들부들하지만 잘 말리면 아주 단단해집니다. 이 잘 말린 갈대를 손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의 길이로 잘라서 길이를 재는 자로 쓰곤 했지요. 그래서 “Canon”이라는 단어는 점점 “척도, 기준, 규범”이라는 의미로 발전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66권으로 딱 정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성경의 목록이 정리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책들이 들어왔다가 빠지기도 하며, 교회 역사 속에서 검증을 거쳐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66권이 진정한 성경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참된 성경으로 받아들인 책들을 우리는 정경 곧, Canon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정경은 아니지만 당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져 읽히던 책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책들을 외경(Apocrypha, 숨겨진 책)이라고 부릅니다.
또 이 외경보다도 더 늦게 쓰였고, 내용이나 신학적 일관성이 부족해서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은 책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책들을 흔히 위경(Pseudepigrapha, 거짓 이름으로 된 책)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이 66권의 책을 참된 성경으로 판결을 내렸을 때, 교회는 도대체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앞으로 이 책들을 이것이라고 칭하자” 하고 고른 단어가 바로 “Canon”입니다. 이 책들이야말로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척도요, 기준이요, 규범이 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을 삶의 유일한 척도요, 기준이요, 규범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다른 가르침을 여러분의 척도요, 기준이요, 규범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는 이 표현도 되게 좋아하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나침반이요 우리의 울타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내키는 대로 걸어가며, 울타리를 벗어나 살아가고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한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본론 3
본론 3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 곧 성경에 전념해야 할 이유를 한 가지만 더 제시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목표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윤리 교훈이 아닙니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단순히 말씀을 전하신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렇듯 성경과 예수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성경입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리더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사실은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많이 들여다보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정말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성경을 사랑하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결론
결론
여러분들에게 도전이 될 만한 이야기를 두어가지 나누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본질을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놀라운 일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4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교회가 본질을 붙들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이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무서워 떨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원문을 참고해서 다시 옮겨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생겨났다”
초대교회를 통해 나타난 가장 놀라운 표적은 먼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마저도 모든 마음 깊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조선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선교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은혜를 받은 민족입니다. 다른 나라들에는 먼저 선교사가 들어가 교회를 세우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성경 번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선교사와 함께 성경이 동시에 전해진 최초의 민족이었습니다. 복음이 들어올 때 이미 말씀 번역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고, 말씀과 함께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초기 성도들은 그 어떤 것보다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먼저 성경을 사 모으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밤새워 모여 말씀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소 한 마리 값을 주고라도 성경 한 권을 사서 공동체와 나누어 읽었고, 문맹이던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기 위해 글을 익혔습니다.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고, 말씀을 읽다가 주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부흥회는 “사경회”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사경회란, 글자 그대로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농한기가 되면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배우고 토론하고 암송하며 삶에 적용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사경회를 위해 사흘나흘, 심지어는 한달씩 걸어서 걸어오는 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이런 사경회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월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동계남성사경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방불케 하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회개 기도로부터 시작된 놀라운 회개의 불길이 삽시간에 번져 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하며 죄를 자백했고, 죄의 빚을 진 자에게 달려가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블레어 선교사가 그날의 기록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내어 간절히 함께 기도하였다. 그 정황은 실로 글로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런 혼란도 없었고 도리어 성령과 성령이 호응하는 화음이 서렸고 기도를 울리고 싶은 충격을 억제할 수 없던 마음과 마음이 사귀는 마음의 교통이었다.
기도 소리는 마치 폭포수 소리와 같아서 기도의 대해(大海)가 하나님의 보좌로 밀려 올라가는 듯했다. 성령께서 그 밤에 평양에 오셔서 모두 울도록 역사하셨다. 어떤 이는 뒤로 물러가서 울기도 했다. 또한 한 순간에 온 청중이 울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무엇이 일어났는가 깨닫기 전에 청중 가운데서 죄의 고백이 시작됐다.”
그리고 현장에 있던 다른 선교사들도 각자 교단 본부에 이런 편지를 띄웠습니다.
“어떤 말로도 어제 있었던 그 집회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결코 목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의 현시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찬양을 올리며 이제 그들이 집에 돌아가서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도우시고 각장의 교회에서 이들을 놀랍게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이길함 선교사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 조지 매큔 선교사
이 불길이 삽시간에 번져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교회 밖에까지 임하여서, 수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게 되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특히 당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마다 놀라운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합니다.
“수업 중에 가진 기도회를 통해 성령님이 임재하시어 교실은 통회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죄악식에 압도되어 전율하면서 수업을 중단할 정도였습니다. 정직치 못한 죄악을 토설하는 사람들이 발가벗겨져 비틀대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울부짖었습니다.” - 아더 배커 선교사
하나님은 이렇게 놀랍도록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본질로부터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흥이 다시 한 번 이 땅에 찾아오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지금까지 다시 한 번 부흥을 주옵소서 하며 눈물로 기도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한 가지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의 간절한 갈망은 마치 자석처럼 이 땅에 하늘을 끌어온다”
기도
기도
말씀 앞에서
셀원들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