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14.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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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다니엘 6장 10~16절(구약 1243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14. 다니엘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12 이에 그들이 나아가서 왕의 금령에 관하여 왕께
아뢰되 왕이여 왕이 이미 금령에 왕의 도장을
찍어서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는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니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확실하니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못하는 규례니라 하는지라
13 그들이 왕 앞에서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왕과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하니
14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
내려고 힘을 다하다가 해가 질 때에 이르렀더라
15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 하니
16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
하시리라 하니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솔로몬 왕에 관한 얘기를 나눴는데요. 그 이후의 역사는 이러합니다. 솔로몬 왕 이후에 그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받고서요. 이스라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 곧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이스라엘의 남쪽 왕국 곧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합하여 3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들의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통해 나누었으면 합니다.
오늘부터는 이스라엘의 왕국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의 포로기 시대의 인물들에 관해 나누려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책의 순서로는 다니엘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뒤에 있지만요. 역사 순서로 놓고 보면요.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순서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해서 오늘 다니엘을 시작으로 역사 순으로 이스라엘 포로기 또는 그 이후의 인물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다니엘의 얘기를 나누려 합니다. 다니엘이 살았던 시절은 이러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국인 남유다 출신으로 바벨론제국이 남유다를 침략할 때,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입니다. 이는 다니엘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벨론제국이 다니엘을 비롯하여 남유다 사람을 포로로 끌고간 것은요. 그들에게 식민지 백성의 정체성을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포로 끌려간 왕족 또는 귀족 출신의 이들을 왕궁에서 선발하여 직접 교육하였습니다.
우리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제가 식민지 교육을 했던 일들이 있는데요. 가령, 이름을 일본어로 바꾼다던지, 글자를 일본어로 사용해야 한다던지 그외 역사관 등을 왜곡해서 주입한다던지 하는 식으로요. 이렇게 하여서 식민지 백성을 통합하고 흡수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오래도록 어쩌면 현재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 바벨론제국도 미래의 권력자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흡수하고 오래도록 통치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죠.
이러는 와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제국의 강력한 도전장을 내밉니다. 그 발단은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벨론제국 식당의 밥이 맛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왕이 특별히 신경써서 키우는 미래의 인재들이었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기름지고 풍부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이를 거부한 까닭은 이는 종교적인 문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종류의 음식은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가 멸망당해서 포로로 끌려온 이들이 결코해서는 안 되고 주제 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자칫 목숨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주를 보내면서 한 권의 책을 매우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책의 제목은 ‘편안함의 습격’입니다. 이 책을 인상적으로 본 까닭은요. 이 책이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데요. 편안함이라는 것은 좋은 것 또는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데요. 오히려 그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를 불행한 삶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해야하고 편안함의 자리를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그와 같은 변화를 이룰 때, 우리는 육체적으로 튼튼해지고, 정신적으로 강인해고 영적으로 건강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책의 저자는 자신이 직업적 위선자였음을 고백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미국인은 그는 꽤 이름 있는 잡지사에서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쓰는 일을 했는데요. 자신이 전파한 건강의 지혜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건강과는 동떨어져 술에 잠식을 당해 있었는데요. 금요일 밤부터 이어지는 폭음은 매주 반복이 되었고 아침마다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는 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스물여덟살이던 어느 날 아침 토사물에을 뒤집어 쓴채로 맞이한 고통스러운 아침에서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직업을 잃고 건강을 잃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그는 자신의 편안한 이불이었던 알콜을 걷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익숙해졌던 것을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요. 몇 일 지나지 않아서 끔찍한 두통과 메스꺼움과 통증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을 통해 불편함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에서 살았던 삶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피게 되었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새롭게 세워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더 혹독한 불편함으로 자신을 내어 몹니다. 알래스카로 떠나서 순록 사냥에 참여한 것인데요. 난폭한 북극곰과 굶주린 늑대, 천지가 눈으로 덮인 백색이라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화이트 아웃의 위험과 매서운 눈보라와 영하의 추위를 온 몸으로 마주했습니다. 이 여정을 통과하면서 저자는 편안한 삶을 넘어선 불편함의 유익을 이야기 합니다.
한편,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목숨을 내건 음식투쟁의 저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혈색이 더 좋아지고 더 건강해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른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다른 어떤 이보다 뛰어나게 하셨고 가장 탁월한 존재로 평가받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했는데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이른바 출세를 하게 됩니다. 왕의 곁에 있는 고위관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죠. 이집트 왕의 꿈을 잘 해몽한 덕분에 감옥에 갇혔던 요셉이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관직인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또 다시 왕의 꿈을 잘 해몽한 다니엘은 고위관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대체 꿈해몽이 뭐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고대에서 꿈은 신의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왕이 꾼 꿈은 신이 왕을 통해 나라에게 주는 메시지였기 때문에 이를 잘 해석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꿈은 나라에 중대사와 관련되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왕의 꿈을 통해 7년의 풍년 이후에 7년의 흉년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왕의 꿈을 해석하는 것은 나라의 안녕과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출세하여 고관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계속된 죽음의 위기 앞에 서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에 의해서 계속되는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는데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철을 녹일 때 사용되는 풀무불에 던져져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요. 다니엘도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자굴에 던져져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에서는 자연을 무대로한 육체적 통과의례가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호주 원주민의 젊은 남자는 사람이 살기 거의 불가능한 오지로 들어가 최대 6개월 동안 홀로 지냈습니다. 이 지역은 한 여름 최고 기온이 40도를 넘나들고 치명적인 독을 가진 생물들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또 알래스카의 이누이트 족은 약 12세쯤 되는 아이들에게 천막, 창 등의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을 주고 북극 지방으로 데리고 가서 몇 주간 스스로 사냥해서 그것으로 생존하도록 합니다. 이는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이뤄집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에 사는 마사이 부족은요. 젊은 남성 혼자서 창 하나를 들고 사바나로 들어가서 사자를 사냥하게 합니다. 이러한 통과의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세계 곳곳에서 이뤄진 것은요. 이와 같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성숙을 이루어 강인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러한 방식의 양육을 생각조차할 수 없으며, 정반대의 접근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뉴욕대학교 학자들은 1990년대를 ‘헬리곱터 양육’의 시작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부모가 자녀의 주변을 멤돌면서 밀착감시하고 간섭하고 통제하는 방식의 양육인데요. 이것이 더 나아가서는 제설기 양육으로 발전해서 자녀의 앞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불행하게도 헬리곱터 양육의 시대의 대학생들이 그 이전 시대의 학생들에 비해 불안과 우울증이 80퍼센트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한편,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계속 되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갔을까요? 당시 바벨론의 왕 또는 그 이후에 페르시아와 왕까지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아꼈습니다. 바벨론의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는 다른 사람처럼 공개적으로 말고 왕이 보는 앞에서만 신상에 한번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을 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라고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에서도 왕이 죽을 위기에 처한 다니엘의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니엘 6장 10절을 같이 읽습니다.
다니엘 6장 14절(구약 1243쪽)
14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
내려고 힘을 다하다가 해가 질 때에 이르렀더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말해줍니다. 죽을 위기에 처한 다니엘로 인해서요. 왕이 근심하고 해가 질때까지 다니엘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고요. 달리 말하면, 왕은 다니엘을 구원하는 것만 하루 종일 매달렸다는 것이 지요. 왕이 다니엘을 아낀 것은 그가 매우 훌륭한 인재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데로 꿈을 잘 해몽하는 것이 나라의 안녕과 미래에 엄청난 자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당시의 왕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살리고자 회유를 하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다니엘 또한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오늘 성경 구절에서 보여주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다니엘 6장 10절을 같이 읽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구약 1243쪽)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방금 읽은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는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말하는데요. 달리 말하자면, 다니엘은 왕보다 하나님을 더 높이고 더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창문을 열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기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요. ‘세상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목숨을 내걸고 행하는 것이지요.
앞서 소개한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에 따르면요. 인류가 지금과 같은 기술 곧 자동차, 컴퓨터, 냉난방기, 스마트폰 등등을 통해 편안한 생활을 이루게 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250만년이라고 알려진 인류의 역사 통해 보면, 고작 0.004퍼센트에 해당되는 시간인데요. 이 시간을 통해 인류를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이뤘지만, 달리 보자면, 지금과 같은 삶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매운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오랫동안 편안함을 염원해 왔고 추구해왔습니다. 그것인 오래 전부터 우리의 DNA 속에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거역하고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250만년이라는 인류가 소망한 일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안락함의 자리를 내 던지는 것은 그들의 신념을 넘어서서 인간이 가진 한계 너머를 도전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결코 보통의 사람에게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며, 새로운 존재에게서 가능한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은 그들이 훌륭한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 이상의 무엇가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통한 변화라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질서에 편입되어서 살아가는 삶에서는 그것을 경험하거나 이룰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것은 250만년의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새겨왔던 DNA를 거스르는 일이고요. 전혀 인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랜 인류의 염원과 소망을 저버린 인간의 삶은 괜찮을 것일까요? 사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죽음에 이르는 선택을 한 것인데요. 이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계속 소개하는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에서요. 오랜 세월 인류가 염원한 편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국인의 32퍼센트가 과체중이고 38퍼센트가 비만이며, 그중 8퍼센트는 초고도 비만인데요. 이를 다합치면 무려 미국인의 70퍼센트가 비만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닌데요. 2021년 기준으로 남성의 비만 유병률이 46퍼센트가 넘고요. 여성의 비만 유병율이 27퍼센트가 넘습니다. 합치면 무려 73퍼센트가 비만으로 인한 질병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육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도 일어나는데요. 우을증, 불안, 중독, 절망이 낳은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도 해마다 늘어가고요. 이와 같은 현상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근 100년 사이에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의 염원에 따른 편안함이라는 우리의 안녕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속성과 그 DNA를 넘어서 오히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르지 않고 그것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삶을 선택한 것은요. 참으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 고통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데요. 저의 경우를 예를 들면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꽤 험준한 산악지역을 훈련 때마다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대략 20kg 미만의 장비를 매고 산을 타는 것인데요. 그 과정을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몇 차례 거치다보니까요. 지금도 산을 오르는 것에 있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실은 제가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대체로 운동에 관련된 것은 자신도 없고 선호하지도 않는데요. 이상하게도 산을 오르는 것에 있어서 괜시리 자신감에 차 있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이요. 아마도 군시절의 경험 혹은 고난이 좋은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또 최근에는 한 동안 운동을 멀리했던 것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서요. 몇 주 전부터 황등면사무소에 있는 헬스장에 등록해서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나가서 런닝머신을 이용하는데요. 운동을 하도 안하다가 하니까 금방 힘들고 숨이 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데요. 놀랍게도 그렇게 몇 주를 반복하다 보니까요. 확실히 이전보다는 체력이 붙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지난 주 목요일부터 청년부 수련회가 어제까지 있었는데요. 이를 준비하려다보니 지난 주는 밤을 세워야 했거든요. 또 수련회에 가서도 늦은 시간까지 성경공부하고 기도회하고 했는데요. 이전 같았으면, 그렇게 무리를 하면, 다음 날은 거의 정신을 못차리는데요. 운동의 영향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이전보다는 덜 힘들게 버텨내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요. 이렇게 스스로를 단련함을 통해 이전보다 더 강인해진 나를 만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고통의 시간을 주신 것은 아닌가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 비하면 저의 사소한 고통이 저의 삶을 변화시켜 간 것처럼요.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