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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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서론
서론
주기도문 마지막 부분에 대한 재밌는 예화
찬송가를 개정할 때 각 교단의 대표들이 학자들과 모여서 찬송가를 개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찬송가 중 주기도문 찬송가를 개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개정 전에 원래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였거든요.
개정이 진행되던 도중 한 무리의 목사님들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우리 대개를 뺍시다!”라고요.
이유는 하나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데 대충 드리면 되겠냐는거에요.
사실 이 ‘대개’라는 말은 헬라어의 ‘호티’라는 접속사를 번역할 때 넣은 것인데 그 대충이라는 대개가 아니고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 혹은 ‘’일의 원천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런 뜻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보면 갑자기 주기도문을 외우다보면 ‘대게’가 나와서 배고프다 이런 분도 계셨고.
‘댁에’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댁에, 집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본론
본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마지막 주기도문의 기도문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부분이죠.
1.삽입된 구절?
1.삽입된 구절?
성경을 잘 보시면 이 구절만 괄호 표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고급 성경을 보고 계신 분들은 난외주나 각주에 ‘고대 사본에 이 구절이 없음’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성경에 없는 내용인데 왜 성경에 써있는걸까?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원본이 없죠. 사본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본이 너무 많아서 사본을 비교, 대조해보는 것만으로도 원본의 99퍼센트 이상을 복원할 수 있죠.
남는 약 1% 내외의 본문 차이는 주로 철자, 어순, 중복 표현, 누락/추가와 같은 작은 차이이며, 대체로 신학적 교리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런데도 그 사본학을 통해서 봤을 때도 일부 사본들에는 있지만 고대의 권위있는 사본들에는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출처는 대체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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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초대교회부터 예배 때 이 주기도문을 사용하게 되면서 기도문 마지막에 추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송영(doxology)’라고 말합니다.
송영이라는 것은 특히 예배 때 사용되는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는 특정 문구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계속해서 역사적으로 이 송영 구절은 주기도문과 함께 불려왔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성경 사본에는 이 구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이죠.
역사적으로 이 송영 구절에 대한 신앙적, 공동체적 유익이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이 구절을 주기도문에 함께 고백하는 것은 큰 유익이 있습니다.
물론 원본에 이 구절이 없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주기도문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삽입된 송영 구절에 대해서 원칙을 세우고 보면 큰 유익을 누릴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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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1 이 구절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기도문 자체의 말씀으로써의 동일한 권위를 갖지는 못한다.
원칙 2 그러나 주기도문을 예배와 삶 속에서 활용할 때는 기도를 올리는 자로서 마지막을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구절로 사용하기에는 아주 유익하다.
말씀으로써의 권위와 동등하게 두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공동체와 우리의 삶 속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이 구절을 주기도문으로 기도드리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이죠.
2. 주기도문 전체의 구조와 송영 구절의 상관성
2. 주기도문 전체의 구조와 송영 구절의 상관성
여러분 인클루지오 구조에 대해서 아시나요?
시작 부분과 유사한 내용이 끝에 다시 나와서 내용을 강조하는 문학적 장치거든요.
주기도문의 송영 구절을 포함시키면 주기도문은 전체적으로 인클루지오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왜 초대교회는 주기도문을 인클루지오의 형식으로 만들었을까요?
과거에는 종이가 귀했고 성경 사본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가지고 있는 사본들이 있었을 뿐이죠.
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통로는 ‘구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으로 소통을 할 때는 큰 단점이 있죠. 그것은 기억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가 흔하지 않던 고대에는 이런 문학적 구조를 이용해서 강조할 것들을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했는데요.
초대교회는 인클루지오 기법을 사용해서 예배에 이 주기도문의 어떤 내용을 아주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기도문이 개인적인, 사적 기도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도’라는 점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초점이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개인적 기도들이 중간에 있지만 분명히 그 주체와 목적은 하나님이요, 하나님 나라인 것이죠.
주기도문의 처음 시작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영광을 올려드리고, 나라와 주권이 이 땅에도 임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구절은 어떻습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 전체가 어떤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오늘 송영 구절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기도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3.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
3.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송영으로 올려드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성경이 약속한 실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고.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의 화려함 속에서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권세는 대대에 미치리라”(단 7:14)고 선포했습니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의 권세 앞에서 떨고 있는 성도들에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라”(계 11:15)고 선포했습니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역사를 꿰뚫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꾸만 **“나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내 뜻, 내 꿈, 내 성취, 내 가정, 내 직장, 내 교회조차도 어느 순간 “내 나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깨뜨립니다. “나라가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내가 세운 계획이 무너져도, 아버지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가 꿈꾸던 길이 막혀도, 아버지의 나라는 여전히 전진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흔들려도, 아버지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흔들림 없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이렇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제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제자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단지 개인의 차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하는 집.
교회에서는, 목회자나 성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공동체.
사회에서는, 세상 권세가 지배하는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드러나는 역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화
1900년대 초만 해도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들이 있었습니다.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습니다. 로마 제국의 뒤를 이어 온 세상을 다스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제국은 역사책 속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통해 세계를 양분할 것처럼 보였지만, 1991년 소련은 순식간에 붕괴했습니다. 세계 최강이라던 권세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노키아와 코닥은 세계를 지배하던 회사였지만, 지금은 거의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인간이 세운 나라는 모두 이렇게 흥망성쇠를 겪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본 것처럼,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권세는 대대에 미치리라”(단 7:14)는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찬송이 아니라 확실한 역사적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제국과 권세는 반드시 사라지지만, 아버지의 나라는 영원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나라를 세우는 대신, 아버지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4. 아버지께 권세가 영원히 있음
4. 아버지께 권세가 영원히 있음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힘이 세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고백에는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1) 세상의 권세는 제한적이다
1) 세상의 권세는 제한적이다
세상은 늘 권세를 쥔 자들이 중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황제, 왕, 정치인, 기업가, 심지어는 우리 일상 속에서 상사나 지도자들이 권세를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높이는 이도 낮추는 이도 하나님이시니라”(시 75: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한순간도 권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2) 하나님의 권세는 전능하다
2) 하나님의 권세는 전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다릅니다.
그 권세는 단순한 정치적·군사적 힘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과 심판을 이루시는 전능한 권세입니다.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사람들은 놀라며 말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하니 순종하는도다”(막 1:27).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골 2:15).
이 권세가 지금도 우리 삶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3) 성도가 구하는 권세는 세상의 권력이 아니다
3) 성도가 구하는 권세는 세상의 권력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구하는 것은 세상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악을 이기고 의를 행하는 권세입니다.
나를 높이는 힘이 아니라,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권세입니다.
교회가 세상 권세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영적 권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을 드릴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악 앞에서 무력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세로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 현대적 예화
✨ 현대적 예화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인플루언서는 곧 권세자처럼 보입니다. 수십만 팔로워가 있고, 한마디 하면 제품이 팔리고 여론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조차 한 번의 스캔들, 한 번의 잘못된 말로 모든 권세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반면, 무명에 가깝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작은 자리에서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좋아요’는 얻지 못해도, 하나님의 권세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이 바라는 권세는 무엇입니까?
직장에서 승진하는 권세입니까?
SNS에서 주목받는 권세입니까?
또래 집단 안에서 인정받는 권세입니까?
이 권세는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사람의 권세가 아니라, 아버지의 권세를 제 삶에 나타내 주옵소서.”
5.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히 있음
5.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히 있음
1) 인간이 추구하는 영광
1) 인간이 추구하는 영광
성도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어떤 이는 재산을 통해,
어떤 이는 명예와 지위를 통해,
또 다른 이는 성취와 업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잠시 피었다가 곧 시듭니다(사 40:6–7). 역사 속의 위대한 제국들과 인물들이 오늘날 이름만 남은 것처럼, 인간의 영광은 본질적으로 덧없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다
2)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할 것이라”(시 104:31).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다”(고후 4:6).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한 빛의 광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격, 그분의 존재와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곧, “주님, 제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3) 성도의 삶은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이다
3) 성도의 삶은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의 목적은 내 영광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사랑과 섬김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정직과 성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와 헌신도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이 성도의 삶 전체를 지배해야 합니다.
✨ 예화
✨ 예화
역사 속에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영광은 대부분 사라지고 박물관과 책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반면, 이름 없는 한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작은 헌신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에게는 기억되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는 그 모든 삶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 결론적 적용
🎯 결론적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고백은 단순한 기도의 끝맺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사람의 영광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기도문의 마지막 고백은 단순히 기도의 끝맺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 전체의 방향을 요약하는 선언입니다.
“나라가 아버지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은, 내 나라를 세우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권세가 아버지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은, 세상의 권력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를 의지하겠다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은, 사람의 영광은 덧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붙잡고, 오직 그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헌신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도와 삶은 한 방향을 향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 고백으로 끝맺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승리의 순간에도, 실패의 눈물 속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고,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