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죽으신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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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십자가 (로마서 14:8–9)
나의 자랑, 십자가 (로마서 14:8–9)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조용히 강단에 올라 성도들과 눈을 맞추며, 따뜻한 미소로 시작)
샬롬!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생명의 빛 교회에 와서 여러분과 함께 예배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런 귀한 자리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먼저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고, 또 따뜻하게 맞아주신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성도님들과 어떤 말씀을 나누어야 할까요? 이분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영혼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하고 기도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잔칫집'이었습니다.
여러분, 잔칫집 가면 생각나는 특별한 음식이 있지 않으세요?
뭐니 뭐니 해도 '고기'죠! (웃음)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바로 그 고기요.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눌 이 말씀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그냥 살코기가 아니라, 아주 두툼한 뼈가 붙어있는 '갈비' 같은 말씀입니다.
조금 질길 수도 있고, 뼈를 발라내느라 애를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천천히, 꼭꼭 씹어서 잘 소화시키기만 한다면, 분명히 우리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왜 다시 ‘교리’인가?
왜 다시 ‘교리’인가?
오늘부터 몇 주간 ‘나의 자랑, 십자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참목자교회에서)
오늘 제가 할 설교는 조금은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교리 설교’입니다.
사실 요즘 시대에 ‘교리’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젓습니다.
왠지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옛날이야기 같고,
지금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치열한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탁상공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교리보다는 당장 내일의 걱정을 해결해주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는 그런 지혜나 위로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합니다.
목넘김에 부드러운 젖이나 죽과 같은 말씀만 먹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교회를 10년, 20년을 다녔는데도, 내가 믿는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을 믿는 종교인지,
그래서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지 그 핵심조차 모르는 성도님들이 너무나 많아질것입니다.
여러분, 뼈가 없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나요? 없죠.
흐물흐물한 연체동물처럼 주저앉고 말 겁니다.
교리가 바로 우리 신앙의 ‘뼈대’입니다. 이 뼈대가 없으니까 신앙이 연체동물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누가 와서 ‘이게 진짜 진리야!’ 하고 조금만 흔들면 ‘그런가?’ 하고 휙 넘어가 버리고,
세상의 풍파가 조금만 불어닥쳐도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죠.
이단에 빠지는 많은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교리의 부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신앙의 중심으로, 그 뼈대의 핵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과 9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신칭의,
즉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하나만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신다는 이 감격스러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2장부터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순종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순종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 그 중심에 바로 오늘 말씀이 있는 겁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은 먹는 문제나 절기 문제로 서로 갈등했지만, 그들은 모두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처럼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는 이 위대한 고백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주’가 되셨다는 사실과 아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죄 하나 없으신 그 거룩한 분이 왜 그 끔찍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명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기 위함, 즉 속죄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도대체 ‘죄’가 무엇이길래?
도대체 ‘죄’가 무엇이길래?
여러분, ‘죄’가 뭘까요?
우리가 살면서 짓는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원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짓는 ‘실행죄’입니다.
이걸 나무에 비유하면 아주 쉽습니다. 원죄는 나무의 뿌리와 같고, 실행죄는 그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와 가지, 잎사귀와 열매들에 해당합니다.
원죄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을 말합니다.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바로 그 죄 때문이죠.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에서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아니,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애초에 선악과를 거기에 두셔서 사람을 유혹에 빠지게 만드셨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볼까요?
만약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지으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 선악과 나무는 오히려 얼마나 큰 은혜의 통로가 되었을까요?
그들은 에덴동산을 거닐며 모든 만물이 자기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마치 온 세상이 자기 것인 양 느껴졌겠죠.
그러다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나무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 맞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저 나무만큼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일 뿐이고, 우리 위에는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깨달았을 겁니다.
선악과를 볼 때마다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을 누렸을 겁니다.
문제는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었던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었죠.
또 이렇게 질문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니,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는데, 왜 우리가 그 책임을 져야 하나요? 너무 억울한 거 아닌가요?” 이것도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언약적 연대성’이라고 부르는데요, 쉽게 말해 아담은 그냥 한 개인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의 국가대표였던 셈입니다.
만약 아담이 그 시험을 통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모두는 아무 노력 없이 영원히 죽지 않는 복을 누렸을 겁니다.
그때는 아무도 “나는 선악과 안 따먹으려고 노력한 적도 없는데 왜 영생을 얻나요? 억울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렇죠?
대표인 아담이 성공했다면 그 복을 우리가 함께 누렸듯이, 대표인 아담이 실패했기에 그 죄의 책임 또한 우리가 함께 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 안에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죄, 얼마나 심각한가?
죄, 얼마나 심각한가?
이 원죄라는 뿌리 때문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본성을 갖게 됩니다.
한번 보세요. 아이들에게 ‘착한 일’은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겨우 하지만, ‘나쁜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얼마나 잘 배우고 따라 하는지 모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죄가, 그것이 원죄이든 우리가 살면서 짓는 실행죄이든,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크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이걸 도덕 철학에서는 ‘지위의 원리’라고 합니다. 제가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가 실수로 친구 무릎에 물 한 잔을 쏟았다고 해봅시다. “어이쿠, 미안해!” 하고 수건으로 닦아주면 그걸로 해결되겠죠. 그런데 만약 제가 물을 쏟은 대상이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면 어떨까요? 경호원들이 달려오고, 난리가 나겠죠?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에게 실수로 물을 쏟았다면요? 아마 그 자리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친구에게 물 쏟은 것과 황제에게 물 쏟은 것, 행동은 똑같지만 죄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죠?
바로 그 대상의 ‘지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과 물을 엎지르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황제의 지위가 무한히 높기 때문에 형벌은 사형으로 똑같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황제 곱하기 무한대입니다. 하나님은 무한대라 이거예요.
하물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짓는 죄는 어떨까요?
그래서 김남준 목사님은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선행이나 노력으로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해도 이 죄의 값을 치를 수가 없는 겁니다.
유일한 해결책, 속죄
유일한 해결책, 속죄
이 해결 불가능한 죄의 문제를 풀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속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그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사건.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기에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수 있었고,
동시에 죄 없으신 완전한 하나님이셨기에 그분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덮고도 남을 무한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열이 나고 콧물이 나고 온몸이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죠.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증상들을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해열제를 먹고 콧물 약을 먹는다고 감기가 낫나요? 아니죠.
근본 원인인 감기 바이러스를 죽여야만 모든 증상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과 고통, 슬픔과 눈물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죄’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불행과 고통이라는 증상들을 없애기 위해 철학, 종교, 학문, 예술 등 인류는 수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죄’를 완벽하게 죽이는 유일한 길인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둘째, 우리를 살리기 위한 ‘부활의 죽음’이었습니다.
둘째, 우리를 살리기 위한 ‘부활의 죽음’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을 수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고, 죄가 없다면 죽을 이유가 없잖아요?
또, 평범한 인간처럼 무력하게 죽었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은 자를 어떻게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죠.
하지만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면 이 두 가지 사실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제가 인류의 모든 죄값을 대신 치렀습니다!”라고 외치신 아들의 그 위대한 희생에 대해, 성부 하나님께서 “내가 그 값을 인정한다! 합격이다!” 하고 온 우주에 선포하신 거대한 승리의 도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1장 4절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네 가지 의미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네 가지 의미
이 부활은 크게 **네 가지 지평(horizon)**으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지평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성결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생명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마귀의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위협하는 마지막 카드가 바로 '죽음'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은 우리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히브리서 2장 14절의 말씀처럼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그 마지막 카드를 완전히 무효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분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사단이 제시하는 죽음의 카드가 무효화될 수 있는 첫 선례를 보여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사탄이 죽였는데, 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탄이 완전히 무장 해제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지평은, 신자의 영혼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부활,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의 영혼은 에베소서 2장 1절의 표현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였습니다.
물론 영혼은 불멸하기에 소멸되지는 않지만, 그 기능이 망가져 있었습니다.
배고픔이나 추위 같은 육체적 생존과 관련된 '저급한 기능'은 살아있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천상의 세계를 이해하는 '고급한 기능'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죠. 바로 이런 영혼이 죽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져서 죽었던 영혼이 우리 안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이제 우리는 하늘의 자원인 은혜와 사랑, 생명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지평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경험하는 부활입니다.
이것은 성화의 부활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본성이 남아있어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에베소서 6장 10절과 11절에서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세상 걱정과 죄의 유혹에 시달리다 보면 실망과 낙심, 패배감에 휩싸여 영혼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그때, 이를 위해서 충분한 기도의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금식 기도와 같은 특별한 기도를 하십시오.
우리가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와 믿음 없음을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의 죄를 죽이시고 다시 하늘의 생명력을 부어주십니다.
세상 사랑에서 예수 사랑으로, 땅의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하늘의 것들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네 번째 지평은, 마지막 날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모든 인류가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되고,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감당하기 위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마귀는 영원한 지옥에 갇히고, 이 땅의 모든 죄와 비참은 사라지며 영원한 평화가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마지막 지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의 속죄의 죽음이 우리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았지만 죄와 불순종으로 우리 안에 주신 예수의 충만한 생명이 약화되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은혜받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팎에 있는 죄와 유혹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넉넉히 이기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남은 죄를 죽이고(mortify),
또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은혜를 더욱 살아나게(vivify)하여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셋째,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바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Lord)’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은 그분을 만유의 주로 높이는 과정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는 승천이 없으며, 승천이 없이는 주가 되실 수 없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과 승천이 없었다면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아들의 순종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최고의 상급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11절은 이 영광스러운 과정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입술로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며, 동시에 내 인생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쥐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내 계획, 내 건강, 내 자녀, 내 직장, 내 미래에 대한 모든 걱정과 염려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만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문답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몸과 영혼을 가진 나는 삶과 죽음 둘 다에 있어서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통치 아래 살아갈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평안하고 기뻐할 수 있지?”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궁금해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내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전도요, 선교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우리의 손으로 이룰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으며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을 의지하며 매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현재적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결론: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결론: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174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영적인 대각성 운동이 한창일 때의 일입니다.
캠버스랭이라는 작은 마을의 한 교회에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설교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던 회중석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이 알아보니, 그는 놀랍게도 그 지역 신학교에서 평생 교의학, 즉 교리를 가르쳐 온 저명한 노교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속죄의 ‘교리’를 머리로 알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를 위해 속죄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전에는 십자가에 대해 단지 알기만 했지만, 이제야 내가 가르치던 그것을 내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머리로만 아는 하나의 ‘교리’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하는 살아있는 ‘능력’입니까?
혹시 이 자리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오늘이야말로 당신이 십자가 아래 모든 죄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또한,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 여러분, 혹시 세상 염려와 죄와 불순종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죽은 자처럼 곤고하고 메말라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부활의 능력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다시 살리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당신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삶 속에서 매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당신의 영원한 주인이 되어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늘, 그 주님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다시 한번 주인으로 모시고,
십자가의 감격과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위대한 고백이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이 시간 다 함께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