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한 여인과 신앙의 야성 2025 0903 잠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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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수요영성이나 오후예배 가끔 인도하게 됨.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이스라엘에서의 경험, 히브리어 원어, 원문 풀이 등으로 깊이 있게 색다르게 해석하는 설교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려고 함.
(서론: 익숙한 그림에 질문을 던지다)
(서론: 익숙한 그림에 질문을 던지다)
'현숙한 여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온화한 미소와 차분한 말투, 튀지 않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조용히 가정을 돌보는 모습을 그리실 겁니다.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고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그림자처럼 묵묵히 헌신하는 현모양처의 모습. 우리에게 참 익숙하고, 칭찬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현숙하다” 국어사전에는 ‘여자의 마음이 어질고 정숙하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현숙함'을 이토록 정적인 이미지로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성경이 우리 땅에 처음 들어올 때의 문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와 구한말,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것은 유교적 가치관이었습니다.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와 같이, 여성의 미덕을 순종과 인내, 절제에 두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안경을 끼고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다 보니, 잠언이 말하는 이상적인 여성상 역시 우리가 가진 '현모양처'의 틀에 맞추어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특정 문화의 틀에 갇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시대를 뛰어넘고 문화를 돌파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물원의 길들여진 사자가 아닙니다. 광야를 포효하며 달리는 야생의 사자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어 원문을 통해 '현숙'이라는 안전한 우리 안에 갇혀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해방시키려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심어두신 강하고 유능한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잠들어 있던 영혼의 야성을 깨우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1: '현숙'을 넘어 '하얄'로 – 본문이 증명하는 힘을 발견하다)
(본론 1: '현숙'을 넘어 '하얄'로 – 본문이 증명하는 힘을 발견하다)
예루살렘에서 길을 걷다 보면, 우리나라 보다 더 자주 보게 되는 풍경이 있음. 군인들. 길거리에 군인들 모습을 자주 보게 됨. 아무래도 분쟁이 있는 지역이다보니. 올드시티를 비롯한 성지들을 방문할 때도 보면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됨. (사진01)
더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군들이 많다는 것. 이스라엘은 여자도 군대를 의무적으로 가는 나라.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 여군으로만 이루어진 전투부대도 있음. (사진02) 특별히 2023년 10월에 있었던 하마스의 습격에서 여군들의 활약이 있었음.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들도 사실은 다 예비군. 엄마들이 아이들 훈육하는 거 보면 무서움.
여기서 군인을 히브리어로 하얄/하일 이라고 함. 이 하얄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 성서 히브리어에서의 뜻은, 힘, 재능, 유능함, 군인의 뜻을 가지고 있음. 군인을 보면 힘, 능력도 있어야 함. 그래서 하얄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단어임.
그런데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 사용되었음.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잠31:10
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여기서 '현숙한 여인'은 히브리어로 '에쉐트 하일(אשת חיל)'이라고 합니다. '에쉐트'는 '여인' 또는 '아내'를 뜻합니다. 설교의 심장부는 바로 '하일(חיל)'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하일'은 결코 '정숙하다', '마음씨가 곱다'는 좁은 의미에 갇히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군대의 용맹함, 한 나라를 세울 만한 재력, 역경을 뚫고 나아가는 돌파력, 공동체를 책임지는 영향력을 모두 포함하는, 심장이 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현숙한 여인은 사실 “유능한 여자”, 군인같이 용맹한 여자, 능력있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한글이 주는 뉘앙스와는 정반대로 여자에 관한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 여군, 여자들에 대해서 소개한것처럼.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는 힘과 능력이 필요한 결정적인 순간마다 등장합니다. 다윗의 곁을 지켰던 용맹한 부하들을 성경은 '용사(חיל גבור)'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하일'입니다. 적진을 향해 돌파해 나가는 전투적인 힘입니다. 또한 룻기에서 보아스를 소개할 때 '유력한 자(איש גבור חי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이 많다는 뜻을 넘어, 공동체를 책임질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다른 성경을 찾아보지 않아도, 이 '하일'의 위력은 바로 이어지는 잠언 31장 본문이 직접 증명하고 있습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자를 얻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능력 있는 여인'이 무엇을 하는지 그 행동을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 보입니다.
첫째, 그녀는 유능한 사업가이자 냉철한 경영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잠31:16
16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이것은 충동구매가 아닙니다. 밭의 가치와 잠재력을 평가하는 시장 조사 능력, 과감하게 매입하는 결단력, 그리고 새로운 사업(포도원)을 일으키는 기업가 정신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24절은 더 나아갑니다. 잠31:24
24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그녀는 생산자이자 동시에 유통 채널을 확보한 판매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일'의 능력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터가 바로 '하일'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거룩한 사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녀는 강인한 행동가이자 지혜로운 리더입니다.
15절입니다. 잠31:15
15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그녀는 새벽을 깨우는 자기 관리의 대가이며, 단순히 음식을 나눠주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는' 조직 관리 능력을 갖춘 리더입니다.
17절은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줍니다. 잠31:17
17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성경은 그녀가 '가냘픈 팔로 기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팔을 강하게 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강인함이 육체의 건강과 성실함으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강함입니다. 어떤 힘든 과업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달려들 준비가 된 행동가의 모습, 이것이 '하일'입니다.
셋째, 그녀는 영향력의 중심이자 긍휼의 실천가입니다.
14절은 그녀를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잠31:14
14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그녀의 시야는 집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국제 무역선처럼,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글로벌한 안목을 가졌습니다.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이처럼 잠언 31장이 그려내는 '에쉐트 하일'은 수동적이거나 연약한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더 이상 우리가 생각하는 현숙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임. 우리의 신앙도 너무 현숙하게 신앙생활 할 때가 있음. 좀 야성을 가져야 할 때에도 너무 잠잠히 있거나 두려워하거나 모험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라는 것. 믿음이 언제 커질까? 믿음의 한 발을 내딛었을 때 커지는 것 같음.
(본론 2: 성경과 역사 속의 '에쉐트 하얄'들)
(본론 2: 성경과 역사 속의 '에쉐트 하얄'들)
신앙의 역사를 보면, 여성들이 나타나서 큰 일을 감당할 때가 있음.
이스라엘이 적에게 압제당하고 모든 남성 지도자들이 침묵할 때, 사사 드보라는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나라를 구원하는 리더십의 야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신약 시대,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루디아를 보십시오. 그녀는 자주 옷감 장사를 하던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인 후, 자신의 집을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로 내어놓았습니다. 자신의 비즈니스 역량과 재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한 경제적 야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에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다닌 마리아들도 야성이 있었음. 예수님의 무덤을 누가 처음 갔음? 그 비어있는 무덤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 여자들이.
'신앙의 야성'은 단지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주일 설교 때 예화로 들어주셨던, 코리 텐 붐 여사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나치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언니를 잃고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복음 전도자가 되어 독일에 갔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설교를 마쳤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는 바로 자신을 감시하고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수용소의 간수였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가 불타올랐지만, 그녀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용서를 그에게 주기 원합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를 용서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치유가 임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가장 위대한 용서의 야성입니다.
교회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인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보십시오. 청년 어거스틴은 이단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던, 소위 '망나니 아들'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 모니카가 보인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숙함', 즉 조용히 참고 인내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영적 전투를 벌이는 용사, '에쉐트 하일' 그 자체였습니다. 아들이 있는 곳이라면 아프리카에서 유럽 대륙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마다치 않고 쫓아갔습니다. 당대의 주교를 찾아가 아들을 위해 변론해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의 30년의 세월을 마르지 않는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아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어둠의 권세와 맞서 싸운 '기도의 야성'입니다. 한 주교는 마침내 그녀의 눈물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속 썩이는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한심하고 조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야성을 가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응답이 보이지 않아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도,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듭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살리며, 역사를 바꾸는 '에쉐트 하일'의 능력입니다.
이 자리에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우리 어머니들, 그리고 영적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분들, 우리들의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리는 위대한 '에쉐트 하일'입니다.
(본론 3: 신앙의 야성,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
(본론 3: 신앙의 야성,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강력하고 역동적인 '신앙의 야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교만과 욕망을 포장하는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신앙의 야성은 '육적인 혈기'와 어떻게 다를까?
어떤 분들은 '신앙의 야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기 멋대로 소리치고 행동하는 통제되지 않는 공격성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생각에서 비롯된 혈기와 성령께서 주시는 담대함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을 통해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보십시오. 육적인 혈기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의를 드러내며, 결국 공동체에 분열과 상처를 낳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야성은 그 동기와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드신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2:15-17) 그것은 개인적인 분노의 폭발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 즉 '신앙의 야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의 야성은 죄를 향하여, 불의를 향하여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결코 죄로 이어지지 않으며, 성령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둘째, 신앙의 야성은 '그리스도인의 온유함'과 반대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힘이 없고 나약하며, 그저 참기만 하는 소극적인 성품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헬라어: 프라우테스)은 '잘 길들여진 강력한 힘'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프라우테스'는 사나운 야생마가 주인의 목적에 맞게 훈련되어 전쟁터를 누비는 강력한 군마가 된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그 힘이 주인의 뜻에 완벽하게 복종하여 통제되고 사용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성경적 온유함입니다.
성경 최고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보십시오. 민수기 12장 3절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증언합니다. 그랬던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을 때,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돌판을 던져 깨뜨리며 거룩한 분노를 터뜨렸고, 바로 왕 앞에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그의 온유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불같이 타오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죽어지는, 길들여진 야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야말로 온유함의 완벽한 본체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온유하신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향해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일곱 번이나 외치시며 누구보다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결코 불의에 대한 침묵이나 죄와의 동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사자처럼 용맹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양처럼 순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온유함'과 '야성'의 거룩한 연합입니다.
셋째, 그렇다면 이 강력한 야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것이 마지막 질문이자 가장 중요한 해답입니다. 이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1% 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힘의 근원은 오직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2장 9-10절 입니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것이 신앙의 야성이 작동하는 놀라운 영적 원리입니다. 내 힘이 빠져나간 바로 그 자리에, 내 연약함을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무한한 능력이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우리의 강함은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더라. 작년 연말 올해 연초에 교회에서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우리 다같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재정적 헌신들을 하는 것을 보았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을 보았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청년, 장년, 노년에 이르는 전 교인이 함께 주의 일에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르무엘왕의 어머니는 잠31장의 결론부에서 이 현숙한 여인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31장 30절입니다.
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신앙의 야성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결론: '에쉐트 하일'로 살아가라)
(결론: '에쉐트 하일'로 살아가라)
오늘 우리는 '현숙한 여인'이라는 익숙한 단어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에쉐트 하일'이라는, 강하고 능력 있으며 용맹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이 포기하지 않는 기도, 불의에 맞서는 용기, 세상을 돌파하는 도전, 곧 '신앙의 야성'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의 근원이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세상이 주는 기준에 맞춰 그저 '착하고 문제없는 신자'로만 살아가려는 껍질을 깨고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신자', '에쉐트 하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청년들에게 권면합니다. 세상의 스펙 경쟁과 불안한 미래 앞에서 위축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하얄'의 능력으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거룩한 꿈을 꾸고 도전하는 야성을 회복하십시오.
이 자리에 계신 직장인과 사업가들에게 권면합니다. 정직하면 손해 보고, 타협해야 성공한다는 세상의 논리 앞에서 믿음의 야성을 발휘하십시오. 여러분의 일터를 하나님의 방법으로도 탁월하게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에쉐트 하얄'의 선교지로 만드십시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과 가정을 지키는 분들께 권면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지 마십시오.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키워내는 일이야말로 한 나라를 세우는 것과 같은 위대한 '하얄'의 사역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기도의 야성으로 가정을 지켜내십시오.
우리 교회 어르신들께 권면합니다. 육신의 힘은 약해졌을지라도, 평생 쌓아오신 경륜과 기도의 능력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하얄'입니다. 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해, 흔들리는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의 파수꾼으로 서 주시는 영적인 야성을 보여주십시오.
이번 한 주, 여러분의 삶에서 잠들어 있는 신앙의 야성을 깨워야 할 영역은 어디입니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하일'을 구하며 담대하게 한 걸음 내딛음으로, 우리의 삶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안에 주저앉아 잠자고 있는 믿음의 야성을 깨워주시옵소서. 우리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혀 주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의 사람, '에쉐트 하얄'로 일어나 빛을 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