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40) 주인과 종에서 친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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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노예화

이 시대의 노예화에 관하여 술이나 쾌락, 지식이나 사상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이야기했다. 오늘은 다른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노예화되는가?에 관하여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라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이 주는 의미를 한번에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 할 내용은 여기에 담긴 많은 의미 중에 한 가지입니다.
노아와 노엘이 한 사물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의자입니다.
노아는 그 의자를 바라보며 자기가 앉아야 할 물건으로 생각합니다. 그 순간 노아는 ‘주체’가 되고, 의자는 ‘객체’가 됩니다. 이것을 ‘객체화’라고 하는데 쉬운말로 ‘노예화’라고 설명하겠습니다.
의자는 노아가 자기를 어떤 존재로 규정하든지 불만이 없습니다.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엘이가 같은 의자를 바라보며 자기가 앉아야 할 물건으로 규정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의자는 불만이 생기지 않지만 노아와 노엘 사이에는 서로가 자기의 것이라고 규정하는 의미가 충돌하여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 이 갈등을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 아이가 힘으로 겨뤄서 이기는 사람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쪽이 의자에 대하여 주인이 되고 지는 쪽은 노예가 됩니다.
두 번째는 양쪽 모두 힘을 지원받는 대상이(부모) 정하는 규칙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경우에 둘은 주인과 노예 관계가 아니라 한 규칙을 따르는 친구가 됩니다.
만약에 대상이 사물이 아닌 인격이라면 내용은 더 복잡해집니다.
베드로라는 제자가 다른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나름의 규칙으로 객체화 합니다. 가령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가룟 유다는 똑똑하고 정직한 제자 등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수제자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의 말과 행동에서 실수를 발견함으로 그것을 공론화하여 베드로를 ‘실수투성이’나 ‘문제아’로 객체화하려 한다면 베드로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의식은 우리 자신을 ‘노예’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사회는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보는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도 대상을 보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
‘객체화’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그 증상을 네 가지 이야기해보자.
도구화 : 쓸 만한 사람 / 쓸모없는 사람
환원주의 : 전 인격을 한가지 특성으로 단순화 (학력, 실적, 재력 등)
낙인 : ‘문제아, 관리대상 등’
수량화 : 사람을 지표, 숫자, 성과로 기억함. (헌금, 전도수, 참여횟수 등)

예수님의 전환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에서 사랑은 친구 간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떠나 우리 모두가 힘은 지원받는 공통의 대상인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대로 따르는 순종에서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순종으로 나타나는 사랑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다 객체화하고, 자신이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충분한 지혜와 능력과 부가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실수투성이라고 규정하거나 가룟유다를 배신자라고 낙인찍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게으르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그들을 모두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그들을 ‘주체’가 되게 하시고, 자신이 스스로 ‘객체화’되셔서 깨닫게 해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는데 어디까지 낮추시냐면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십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안간힘을 쓰고 주인이 되어 예수님을 ‘종’으로 규정하고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그들을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부활하여 모든 권세를 입게 되셨을 때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닮기로 작정한 우리는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봐주기를 주장하거나 내가 생각한대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주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되기 위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26-27절 ‘증언’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견디며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낸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종으로 사랑하고, 사랑으로 순종하는 모습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실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그의 힘과 지혜로 우리가 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에 닿는 것들을 객체화했던 모습들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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