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제5장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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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의 추억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데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누가복음 20장 10절 말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일입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시골에서 밤 한 자루, 밤 한 자루씩이 올라왔습니다. 우리 땅에서 농사짓는 아저씨가 보낸 것이었지요. 어린 마음에 그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마당에 나무 한 그루 없는 집에 살면서 시골 밤과 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삶은 밤을 주머니 가득 넣고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기억이 납니다. 추숫대의 실과는 땅 가진 사람의 기쁨입니다.
포도원의 비유.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전적으로 질문했습니다.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백성들 중 아무도 감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도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실 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는지 물었습니다. 포도원의 비유는 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입니다. 주인은 매우 사려 깊고 자상하며 인정이 많았습니다. 그는 소작인들에게 빌려줄 경작지에 단지 포도원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과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산 울타리를 설치하고 집 자는 틀도 만들었습니다. 포도원을 지킬 망대도 지었습니다. 소작하는 농부들이 그 모든 시설들을 누리며 농사짓고 살게 해 주었습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 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집 짜는 틀을 만들어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새로 주고 타국에 갔다니 이 비유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들이 짓지 않은 성읍에서 살며 심지 않은 과실을 먹게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축하지 않은 성읍을 소유하였고 농사하지 않은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모든 혜택을 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버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팥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은혜에는 계획이 있다.
어느 날 엄마는 화장대 앞에 놓인 아들의 쪽지를 보았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올려놓은 것이었습니다. 엄마에게 드리는 청구서 엄마 아래와 같이 청구하니 내일까지 지불하여 주세요. 동생 돌보아준 값 2천원 방 청소한 값 천원. 아빠 출근하실 때 구두 닦아 놓은 값 천원 슈퍼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1500원 과학시험 만점 받은 값 3천원 합계 8500원 이튿날 아들은 학교에 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먹으려고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도시락 가방에서 쪽지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아들에게 주는 청구서 나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없구나. 너를 뱃속에 갖고 열 달 동안 고생한 것 공짜 11년 동안 먹여주고 입혀준 것 공짜 내가 아팠을 때 밤길을 달려 응급실에 간 것 내가 깨뜨린 뒷집 유리창을 물어준 것. 공짜 앞으로 너를 양육하는 데 드는 비용 공짜 합계 영혼, 아들아 사랑한다. 야 너희 엄마 최고다. 그런데 며칠 후 손 들고 벌을 받고 있는 그 집 아들의 모습이 거실 창 너머로 보였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꺼져 주었지만 아이를 향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양육하는 데 든 비용 때문에 속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서 세상과 교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라주지 않는 것 때문에 속상했던 것입니다. 아이를 꾸짖어서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무릇 만군의 여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오.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가나안 땅을 주신 것,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은혜였지만 그 은혜에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거기에 두시고 공위와 자비의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나라를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열망에 알리심으로써 그들도 구원받게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주어졌지만 거기에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 온 땅의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이스라엘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소작료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심은 그분의 자녀로서 독특한 정체성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살아있습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살아있는 것입니다. 다른 삶으로는 행복할 수 없으니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는 신자는 한 그릇에 죽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설교자를 보낸 목적
과실이 무르익는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도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나의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들의 사명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설교자들은 바로 선지자들의 후회입니다. 당신의 몫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때가 이름에 주인은 아무 때나 종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수확기가 되었기에 소작료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구원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알려졌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요구도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들일 때 후손을 교육할 때 빠짐없이 행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10가지 재앙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았습니다. 홍해는 다시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은 다시 무너지지 않았고, 요단강은 다시 마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에 행하신 이 위대한 일들을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특별히 구별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함을 자각했습니다. 은혜 안에 있는 동안 의와 공평을 따라 사는 삶은 전혀 힘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심에 감사했습니다. 거룩한 삶의 실과를 바침으로써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이러한 구원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복음을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죄 가운데 방탕한 삶을 살던 자를 구원하여 은혜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독생자를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는 그저 구원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보탬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이웃과 함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작료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소명을 잇고 나면 소작료가 너무나 큰 희생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악한 농부들의 마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납부해야 할 소작료만 생각했지. 보도원 주인에게 받은 은혜는 잊었습니다. 받은 은혜 안에 우리의 소명이 있습니다. 그 소작료는 이미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두운 세상의 불꽃입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꽃처럼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그 안에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불꽃처럼 산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빛이 아닙니다. 다만 빛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고 그분을 믿게 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호위병도 없고 무기도 없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견디고 시련이 오면 인내할 뿐입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죄인을 회개케 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돌이키도록 보냄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설교자의 소명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비록 교인 수는 적었지만 힘을 합쳐 예배 장소까지 분양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개척해서 6년간 목회하는 동안 꿈만 같았습니다. 개척할 뜻이 없던 친구들이 저를 보고 교회 개척을 꿈꿀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과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쁘게 목회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예배드리고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팀을 나누어 텐스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을 치고 배구도 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씻고 모여 저녁을 먹고 저녁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야말로 가정 같은 교회를 꾸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이 꿈꾸던 교회라고 자부했습니다. 어느 날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변화받으면서 피 묻은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돈독했던 교회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적 변화의 가운데 기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인간관계 때문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배는 드리고 있었지만 회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목양 현장에서 느끼는 만족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소명은 목회적인 필요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목회 현장이 설교의 소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천국 소명에 불붙여진 설교자가 있으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는 성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메인 사람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교회에 메인 사람이고 그리스도 때문에 교회와 만난 사람입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부르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주는 의미에 사로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소명에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정의와 자비의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게 하도록 보냄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재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를 설교자로 부르신 이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왜 그렇게 고난을 받았습니까? 바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겪은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요구했습니다. 불순종할 때 이 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그 뜻을 전하였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설교자는 자기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설교자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꿈꿔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셨고 신약 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입니까? 목회자는 많은 일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기도, 심방, 상담, 교육, 규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 많은 일에 종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기도와 설교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분명히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을 잘하면 거의 다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못하면 거의 다 못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교인의 입맛을 생각하는 요리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치명적 질병을 고치는 의사입니다. 그들을 수술해서 고치려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는 독수리 눈 같은 지성과 사자의 심장 같은 담대함과 여인의 손길 같은 기술이 필요한 이것으로서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예배자들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 없이 진리 안에서 예배 드릴 수 있을까요? 예배다운 예배를 위해 말씀을 올바르고 능력 있게 전해 줄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배자와 설교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예배자는 이 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둘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주인은 세 명의 종을 보냈습니다. 한 종을 보내자 농부들이 심히 때렸습니다. 두 번째 종을 보내자. 그도 심히 때리고 능력하고 그저 보내었습니다. 세 번째 종은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습니다. 같은 비유가 실린 마태복음에서는 더 많은 종들이 소작료를 받기 위하여 보냄받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어느 날 밤 본문을 읽다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소작료를 받으러 포도원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었고 오늘날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인은 그 일을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종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기쁨을 위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기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진심으로 주인을 공경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한 종이 소작료를 받으러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충성스러운 종이 다쳐서 돌아왔다면 주인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농부를 농부들을 혼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만 다른 종들이 주인에게 충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은 호위병도 무기도 주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는 단지 주인의 메시지만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도 피 흘리며 돌아오자 주인은 또 한 종을 다시 보냈습니다. 잠시 후 그 종은 시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또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말입니다. 도대체 주인은 얼마나 많은 종들의 피를 허비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주희요. 이 비위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마음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행동은 평소에 알고 있던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과 조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으나 그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보던 주인이 이레대 어찌할까? 내 사랑하러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레대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보던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아들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들이 죽으신 것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 제물로 죽으셔야 구원사약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종들, 선지사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요? 깊은 고민에 싸였습니다. 주여.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런 깨달음이 없을까? 하나님의 마음이 제게 전해졌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의 죽음은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저를 설교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 깨달음은 단쇄로 심장을 지지는 것처럼 제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 불 붙는 사랑을 아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죽어간 선지자들의 희생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질문인지를 말입니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매 맞고 능력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계속해서 보내신 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설교자가 받을 상급
셋째로, 이것은 설교자의 상금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진리였습니다. 설교자로서의 섬김은 너무나 거룩하기에 그 최종적인 상금은 하늘나라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보상해 주기에는 설교자의 섬임은 너무나 고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으나 하늘에서는 상금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산을 나라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귀향과 함께 상금을 예비하십니다. 빛난 별 유관 받아 쓰고서 이는 진리를 설교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스데반이 말했던 거와 바와 같습니다. 출격 스데반이 성명 충만해야 하늘 우라로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미디어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데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종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선지자들을 보내게 됐고 아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어찌하든지 그들을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불 붙는 사랑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로 설교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는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불 붙는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수많은 종들을 죽게 하시고 심지어는 당신의 외아들까지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람은 몰랐기에 이제껏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마치 하나님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남이 알지 못한 사랑을 알고 그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칼보리의 구속의 사랑. 예배를 통해서 십자가와 마주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뿌리신 핏길을 걸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다. 자신이 단지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그분의 보열에 불결한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보열의 능력을 회복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맺음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시련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하늘을 향하여 심령이 열리게 하는 설교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돌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미 기진하여 쓰러졌을지도 모릅니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는 잠시 환란과 시련을 당하지만 예배 속에서 그것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설교를 통해 사라질 이 땅의 영화 대신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고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마음을 알 수 있고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일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부름받은 이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는 불꽃 같은 설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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