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은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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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남은 자다’
주제: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남은 ' 남기시고,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남은 자는 입술이 정결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자들이다.
본문: 스바냐 3장 9-20절
[서론]
우리는 종종 영화 속에서 ‘세상의 끝’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윌스미스 주연에 ‘나는 전설이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좀비 바이러스가 인류 전체에 퍼집니다.
좀비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핵전쟁이나 전염병, 기후재앙을 소개하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이런 영화를 우리는 ‘아포칼립스 영화’라고 부릅니다.
설국열차, 헝거게임, 버드박스 모두 비슷한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영화들이 계속해서 등장할까요?
우리의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이런 영화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과학문명의 발달로 세상은 더욱 좋아지는 듯 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런데 세상의 끝이 어떻게 될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이 끝날 때, 과연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성경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란 단순히 하나님의 심판에서 생존한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구원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노아의 홍수때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멸하셨지만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에 남기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룻의 가족들은 피하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바벨탑으로 반역할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1세대 이스라엘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갈렙과 여호수아만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악한 왕인 아합왕 시절에 온 나라가 바알을 우상숭배할 때 입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의 사람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갔던 사람들중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갈 ‘남은 자’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때일지라도 ‘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남은 자’가 누구일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남기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실까요?
[본론]
스바냐서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딱 한번의 주일 설교로 끝납니다.
그래서 먼저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 보겠습니다.
스바냐서는 요시야왕 시대 유다 백성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유다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방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조차 이방 신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만 채울 수 있다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타성에 젖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삶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는 경건한 척하지만, 세상에서는 불법과 편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에게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무너지는 유다를 조롱하고 억압하던 이방 민족들도 심판하십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하던 그 교만한 나라들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이런 심판 선언이 1장부터 3장 8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3장 9절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남는 자’는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남는 자’일까요?
첫째, 남은 자는 ‘입술이 깨끗해진 자’입니다.
9절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뭇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
‘뭇 백성’이란 이방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겪은 이방민족들 중 일부가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과거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했고, 우상을 섬겼으며,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온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의 입술이 깨끗해진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예쁜 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자신의 욕망을 내뱉던 입술이 변화된 것입니다.
죄를 짓던 입술이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는 입술로 변화된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후 가장 먼저 바뀐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입술입니다.
예전에 저는 정말 욕을 잘하던 사람입니다.
창의적인 욕까지 만들어서 내뱉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제 입술이 변화되었습니다 .
욕을 하고 싶어도 할수가 없었고, 목이 막혀 욕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죄악을 저지르던 입에서 이제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께 돌아온 자는 먼저 입술부터 달라집니다.
그 입술은 더이상 죄를 쉽게 내뱉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남을 해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불의의 도구로 사용되던 입술이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하는 도구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입술은 어떻습니까?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혹시 남을 비방하거나 쉽게 거짓말을 내뱉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욕망을 가감없이 내뱉으며 우상을 찬양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남은 자’는 먼저 입술부터 바뀐 자들입니다.
그러나 입술만 바뀌었다고 ‘남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거짓입니다.
입술의 변화는 반드시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둘째, 남은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12-13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도성 안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남길 것이다. 이스라엘에 살아남은 자는 나쁜 일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간사한 혀로 입을 놀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잘 먹고 편히 쉴 것이니,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남은 자의 특징을 말해주는 독특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겸손’입니다.
이를 새번역은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지만, 개역개정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남은 자’는 자기 의나 힘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약한 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세상 기준으로 보면 살아남는 자들은 힘과 능력이 있는 강자들 입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은 억압과 착취를 통해 제거 대상 혹은 소외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힘없으면 무시와 배제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대를 선택하십니다.
거만을 떨며 자랑을 일삼는 강자들을 심판하시고, 오히려 낮고 연약한 자들을 남기십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남은 자’입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힘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쉬울까요?
아니면 연약하고,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기 쉬울까요?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돈 많고 능력있고, 힘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나요?
반대로 삶이 고단하고, 상처많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의지하나요?
힘들고 고달픈 사람들이 기도없이 말씀없이 살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절박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남은 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원래부터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교만했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으며, 하나님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겪고 나서, 자신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성품이 아니라, 회개의 열매입니다.
겸손은 은혜를 아는 자만이 가질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내 힘과 지혜를 의지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착각하며, 속으로는 하나님 아니어도 괜찮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도저히 살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낮아져, 세상이나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사람을 ‘남은 자’로 삼으십니다.
‘남은 자’는 입술이 바뀐 자, 겸손한 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가지 특징이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셋째, 남은 자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17절입니다.
이 구절은 새번역보다 개역개정이 더 익숙할거 같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누가 기쁨을 누린다는 것인가요?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냥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그리고 잠잠히 사랑하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하십니다.
이건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바라보시며 이런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고, 펄쩍 뛰며 기뻐 노래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전에 제가 봤던 남북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거기보면 수십년 동안 생사조차 모르던 가족을 눈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나요?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부둥켜 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주님께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술이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남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올 때입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십니다.
그리고 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17절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탕자같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는 교만하고, 오만했고, 세상을 사랑하며 주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렇게 욕심대로 살던 우리를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기만 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고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셔서 뛰며 노래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심판을 지나 회개하고 돌아온 ‘남은 자’를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삶을 도전하십니다.
“누가 남은 자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스바냐 3장을 통해 하나님의 ‘남은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심판의 날에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는 첫째, 입술이 바뀐 자입니다.
죄와 욕망을 내뱉던 입술이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는 입술로 바뀐 자입니다.
둘째, 겸손한 자입니다.
자기 힘과 능력, 지혜로 살아가던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없이는 살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낮아진 자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기쁨이 된 자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만큼 사랑하시고, 뛰며 노래하며 즐거워하시는 자입니다.
이 남은 자들은 소수이지만 신앙의 본질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하나님을 붙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과연 ‘남은 자’라고 말할수 있는가?
내 입술은 얼마나 깨끗한가?
나는 얼마나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가?
나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이 시대의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하나님을 떠나가고, 신앙은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남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 남은 자들을 통해 회복을 시작하십니다.
이것만큼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똑똑하고 잘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지만 주님께 돌아왔기에
부족하지만 겸손히 주님을 붙들기에,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남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쓰임받는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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