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나의 자랑, 십자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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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와 같은 한국교회
오늘날 조국 교회는 마치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와 같은 시대에 놓여 있다.
종교적인 사람은 있어도 신앙적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고, 분주한 사람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역사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러나 오늘날 십자가의 사랑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며 살아가는 신자를 보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이렇게 십자가의 사랑에 메마르고 회개와 감격의 눈물이 없는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각 사람의 심령에 거룩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II.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II.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오늘 이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유언 가운데 세 번째 말씀이 주어진 배경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 세 부류의 중요한 인물들이 나온다.
A. 십자가까지 따라옴.
A. 십자가까지 따라옴.
첫째로 예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까지 따라온 여인들이 있었다.
4명의 여인들 소개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포함해서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온 여인들이 보는 앞에서 주어졌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한복음 19장 25절
여기서 그 어머니는 육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준 모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이모라는 사람과 함께 있던 글로바의 아내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아내였다. 누가복음 24장 18절.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주십니다. 갈릴리 바다 근처에 살던 여인이었다. 누가복음 8장 2- 3절, 요한복음 20장 1절.
그녀는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증인이기도 하였고, 예수께 특별히 헌신한 여인이었다. 요한복음 20장 15절, 마가복음 16장 1절.
여인들은 모두 십자가 곁에 있었다.
도망간 제자들과 달리 여인들이 십자가 곁에 있는 이유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오실 때부터 통곡과 눈물로 예수를 따라오던 여자들이었다. 누가복음 23장 27절.
예수께 많은 사랑과 섬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12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배신하였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거나 홀로 심문과 처형을 받으시도록 버리고 도망하였다. 마태복음 26장 56절.
그들은 모두 예수와 함께인 것으로 밝혀져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고난 당하시는 예수를 버려두고 도주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그런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함께 참여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끌려 나오시던 때부터 줄곧 고난 받으시는 모든 과정을 그분과 동행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의 현장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의 정체,까리따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구주를 죽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 까리따스(Caritas)만이 예수 고난의 길을 함께 따르게 한다.
예수로부터 온갖 섬김을 다 받고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분보다 하찮은 자기 목숨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두 도망갔다.
십자가 행렬을 따르던 수많은 백성들 또한 그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에 예수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려고 따라왔다. 누가복음 23장 27절, 48절
이러한 신앙의 이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제자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예수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만이 그분을 위해 죽을 수 있다.
디트리히 본 훼퍼의 예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떨어진 꽃잎처럼 순교한 독일의 젊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독일이 항복하기 8시간을 남겨놓고 처형 당했다.
그는 자신의 책 “나를 따르라(Nachfolge)”, 제1장 값비싼 은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 학문을 가르치지 않고 당신 자신에게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예수는 그에게 요청하시는 것이다. 넌 내게로 와서 죽어라”
"Jesus lehrt nicht irgendeine neue Lehre vom Tode, sondern er ruft zu sich selbst. Wenn Christus einen Menschen ruft, so ruft er ihn, zu kommen und zu sterben."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요지는 이것이다.
“나를 사랑하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해 죽은 것처럼 너희는 나와 교회와 세상을 위해 죽어라.”
까리따스 VS 아모르 수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혼란스러워진 것은 교회가 이러한 복음의 본질을 떠나고, 많은 교인들이 오히려 세상의 복을 받으려고 하는 데 있다.
미래에 세워질 기독교회의 지도자가 될 12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팔거나 배신하고 도망갔다.
반면에 무명의 여인들은 십자가 곁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채 예수께서 죽어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거기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여인들은 아직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시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여인들에게 예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은 단지 비극일 뿐이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를 만나고,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조국 교회는 마치 돌가슴 철마음 경연 대회를 하는 것 같은 상황이다.
예배의 감격이 사라진 한국교회를 향한 한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은혜를 한없이 즐거워하며, 죄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죄인의 비참을 기억하며 눈물 흘려주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신앙의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다.
최상의 선교는 불신자들이 보기에 신자가 행복으로 활기에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신앙의 모든 방면에서 감격이 사라져가고 있다.
눈물 없이도 예배드릴 수 있고, 가슴을 치지 않고도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의 정동이 없이도 찬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그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환희를 알겠는가?
잘못된 이유1_복음을 선명하게 선포하지 않는 안일한 설교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것은 먼저 교회 안에서 선명한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의 정신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복음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목양의 현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영적으로 확실하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들의 근원에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피폐해진 강단이 있고, 기도의 등불이 꺼져버린 교회가 있다.
십자가 복음의 피로 세례 받은 적이 없는 설교자들의 안이한 강론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현대 교회에게는 더 깊이 잠들도록 흔드는 가벼운 부채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먼저 설교자가 깨어나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의 선포를 듣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잘못된 이유2_영적 갈망이 없는 성도
더군다나 그 선포 앞에서 자신이 깨뜨려지는 성도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드물게 일어나는 일인가?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깨어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
오늘날 교인들 중 대부분은 결코 평상시 껌을 씹는 시간을 합친 것만큼도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 중 매일 성경을 읽으며 그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 영적인 위기는 공적인 예배 속에서 숨김없이 다 드러나고 있다.
민방위 교육에 참여하는 것만도 못한 성의 없는 태도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온다.
그러나 그런 회중들에게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진지한 갈망을 찾아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 예화
20세기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설교했던 저명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1899-1981)의 지적이 뼈아프게 느껴진다.
“주일날 사람들이 왜 교회에 오는지 아십니까? 빨리 예배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1대지 정리 및 적용
신앙생활은 사랑생활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나타난 그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 십자가의 체험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진심으로 믿도록 그분을 새롭게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깨닫자.
그리고 구원의 감격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자.
B. 어머니를 부탁함.
B. 어머니를 부탁함.
둘째로 예수께서는 운명하시기 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였다.
마리아 소개
찢어질 듯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십자가 옆에 서 있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생각해 보라.
그녀에게 예수는 육신으로 치면 친 아들이며 받은 바 계시로 치자면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실 구세주였다. 마태복음 1장 21절.
그러나 이러한 마리아의 아픔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예수를 낳은 후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의 일이었다.누가복음 2장 27절
(그러니까 어떤 설교에서 어떤 사실이 나오잖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찾아서 거기다 다 표기를 해놔야 돼요. 그거를 설교 시간에 몇 장 몇 절이라고 얘기는 안 해도 괜찮은데, 근거로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돼. 항상 그 버릇을 길러야 돼. )
성전에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성령이 충만한 중에 마리아에게 찬송으로 예언하였다. 누가복음 2장 25절, 28절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내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누가복음 2장 34-35절.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이유
이윽고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상 칠언 중 세 번째 말씀을 듣게 된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복음 19장 26절
“여자여”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래도 육신으로는 당신을 낳아주신 어머니인데, 지금 예수께서 이렇게 부르고 있다.
언뜻 듣기에는 마치 예수께서 마리아를 낮추어 보는 듯한 어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여자여”라는 말이 우리 말로는 약간 비하하는 호칭처럼 느껴지지만, 원어인 그리스어에는 전혀 그런 뜻이 담겨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이 호칭이 당시 유대와 헬라 문화권에서는 여성을 부를 때 사용되던 아주 정중하고 격식이 있는 호칭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귀나이”라고 하는 이 호칭이 왕궁에서 귀부인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조금 과장된 해석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활동하실 당시에 이 호칭이 여인에 대한 정중하고 격식 있는 호칭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수께서 이러한 호칭을 (성모)모친 마리아만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사용하셨다. 요한복음 4장 21절.
그리고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에게도, 또한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도 사용하셨다. 요한복음 8장 10절, 누가복음 8장 48절.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나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이 호칭을 사용해 주셨다. 요한복음 20장 15절.
당시 천시 받던 여인들을 존중히 여기신 예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간음 중이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까지 이러한 존중심이 담긴 호칭을 사용하셨으니, 이는 그 여인조차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야말로 참으로 진정한 휴머니즘임을 보여준다.
근데 여기서부터 중요한 거야. 신학적인 내용들이 나오는 거야.
예수께서 모친 마리아를 “여자여, 귀나이”라고 호칭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1. 마리아의 인간성과 예수의 중보자직.
1. 마리아의 인간성과 예수의 중보자직.
첫째로는 마리아의 인간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직(mediatorship)의 유일성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다.
구원이 필요한 마리아와 구원자 예수의 관계성
다시 말해서 “여자여”라는 호칭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낳은 마리아였으나 그녀 역시 구원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구원은 오직 당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로서 죽으시는 이 순간에 육신의 모친과 아들로서의 관계는 끝난다.
그리고 이제 여자인 마리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서 당신과 연합되는 새로운 영적 관계를 수립하셨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그분이 사람의 인격은 없이(anhypostasis) 마리아에게서 육신만을 취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하나의 신적 인격, 두 본성(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성자.
예수님은 몇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랬어? 예수님이 몇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어요? 3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두 개 왜 이래 하나 무슨 인격 하나? 신적 인격 하나야 그다음에 그런데 두 본성을 가지고 계셨죠. 두 본성은 뭐야? 하나는 신성 하나는 인성 그래서 인성을 취하시는데 모든 인간은 인성을 취할 때 인격을 함께 취하며 태어나. 그래서 한 사람 앞에는 하나의 인격이 있어요. 근데 예수는 인간의 몸을 취할 때 인격 없이 몸을 취하시는데 이게 전문 용어로 안 휘포스타시스야 안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고 휘포스타시스는 위격이에요. 인격이에요. 그다음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태어나신 것은 아니 하나님으로 되신 것은 앤 휘프스테시스라고 그래요. 그래서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오되 신으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오셔서 성자가 되시는 것을 가리켜서 앤휘포스타시스라고 그러는 거.
이에 대해 장 칼뱅(1509-1564) 그의 요한복음 주석 19장 2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해 권위 있는 결론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 말로써 그분께서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하기를 거절하지는 아니하셨으나 그녀를 다른 여인들과 같은 위치에 두셨고, 당신의 신적인 위엄이 어떤 관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제미나이의 답변, 존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에 나오는 해당 구절의 라틴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Hac voce non abdicat matrem, sed in ordinem redigit, et docet divinam suam maiestatem nulli affinitati esse obnoxiam."
각 구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Hac voce non abdicat matrem: "이 말로써 그분께서는 어머니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sed in ordinem redigit: "그러나 그녀를 (다른 여인들과 같은) 위치에 두셨다."
et docet divinam suam maiestatem nulli affinitati esse obnoxiam: "그리고 당신의 신적인 위엄이 어떤 관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으며 천하의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길이 없게 하셨다. 사도행전 4장 12절.
예수를 낳아주신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조차 자신의 공로나 예수와의 가족 됨을 앞세워 구원받을 수가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그분을 믿는 믿음이 아니면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게 하셨다.
그가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십자가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그가 뿌리신 핏길을 지나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게 하신다.
2. 마리아에 대한 인간적 배려.
2. 마리아에 대한 인간적 배려.
둘째로는 이 호칭에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가 담겨 있다.
왜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셨을까?
예화_아브라함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100세에 낳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모리아 산을 올랐다. 창세기 22장 3절
그때 아브라함은 번제할 나무를 취하여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게 짊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함께 걸어갔다. 창세기 22장 6절.
이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창세기 22장 7절
"... 내 아버지여...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세기 22장 7절.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게서 “내 아버지여”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비록 뛰어난 믿음을 가진 그 사람이었지만 아마도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이다.
"내가 너를 죽여서 제물로 삼아야 한단다.”
비록 육신에 한정되기는 하였지만, (성모)모친 마리아에게 예수는 자기의 목숨을 주고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들이었다.
예화_미켈란젤로의 피에타-건너 뛰자, 왜냐하면 라은성 교수의 피에타 상에 대한 견해에 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로마 가톨릭의 마리아를 높이려는 의도성).
1499년 미켈란젤로(1475-1564)가 24살 때 완성한 유명한 조각 작품 “피에타 상”에는 그러한 마리아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설교할 때 피에타상을 한번 찍어가지고, 한번 이렇게 이렇게 설교하는 중에 한번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카라라”라고 하는 단일 블록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 오른쪽에 서 있다.
우리는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성모)모친 마리아의 조각상을 통틀어서 “피에타”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존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다른 피에타 상들은 오직 아들을 잃은 마리아의 큰 고통과 비통함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다르다.
그 작품에서도 슬픈 마리아는 죽은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 마리아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단지 큰 고통과 비탄뿐 아니라 하늘의 평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은 단순히 종교적 주제를 넘어선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은 인류의 보편적인 슬픔과 사랑, 심지어 아름다움까지 담아낸 천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인간적인 배려에 대한 해설_비탄에 빠지지 않게 함
예수께서는 봇물처럼 가득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십자가 아래서 조용히 흐느끼며 서 있는 마리아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녀의 마음에 가득 찬 울음을 터뜨릴 생각이 없으셨다.
차라리 그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심으로써 상한 심령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녀가 더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셨다.
인간적인 배려에 대한 해설_비탄에 빠진 나를 붙들고 계심
예수의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성모)모친 마리아에게만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와 같은 죄인들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후,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세상에 오직 나 혼자라고 믿던 시절부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불순종하며 죄의 길로 갈 때, 때리시고 어루만지시기를 반복하시면서 우리가 예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셨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때, 우리는 힘겨운 삶의 마지막 고삐를 놓아버리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모두 자신이 세상에서 홀로 완벽하게 버려졌다고 믿었다.
그래서 숨을 죽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는 내 곁에 함께 계셔서 함께 울어주고 계셨다.
내 슬픔이 당신의 슬픔인 것처럼, 내 고통이 당신의 고통인 것처럼, 나와 같이, 아니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위해 울어주셨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완전한 외로움에 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던 그날을, 나는 상처를 많이 받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은 채로 그분의 품에 안겨 있었다.
(건너 뜀)그때 나는 마치 피에타 상의 예수처럼, 어머니같이 자비로우신 그리스도의 품에 죽은 자처럼 안겨 있지 아니했던가?
그분은 죽은 자 같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나를 나보다 더 가엾게 여기셨다.
회개를 촉구함
생각해 보라. 세상에 바람 앞에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두 손으로 에워싸시는 분이 누구이셨는가?
그리하여 그 바람에 우리 영혼의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살아있게 하시는 분이 누구이셨는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꺾지 아니하시는 자비와 긍휼로 오늘날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누구셨는가?
이 세상에 나와 함께해 주는 이 아무도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나와 같이 내 곁에 있어 함께 해 주셨다.
다만 우리의 믿음 없음 때문에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너를 떠나 어디로 갈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죄인인 나를 당신의 가슴에 품으셨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은 그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죽은 자처럼 병들어 하나님이신 그분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때조차도, 죄로 말미암아 거의 다 죽게 될 때에도 내 지친 영혼을 그리스도께서 품으셨다.
(건너 뜀)이 세상 죄악의 피에 붉게 물든 내 영혼은 어머니 같은 그리스도의 품에 눕혀져 또 하나의 피에타상의 일부가 되었으니, 그런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가엾은 자들이여, 눈 먼 자들이여. 예수의 사랑으로 돌아가자.
그분이 매달리신 십자가 아래서 떨어지는 보혈의 피로 온몸의 세례를 받던 그 첫 사랑의 때로 돌아가자.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이유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험한 십자가에서 찾던 때의 순전한 사랑을, 순전한 사랑을 회복하자.
3.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
3.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
셋째로는 “여자여”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을 보게 된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생각함
예수는 비록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서가 아니었다.
예수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해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것이다.
예수의 생애는 오직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신 일생이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모두 바치신 생애였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사랑하는 예수의 별명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제시되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
땀과 눈물, 흐르는 피로 얼룩진 부분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다.
성부의 모든 부르심에 대해 그분께는 단 한 번의 거역도 없으셨다.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어떠한 자기 주장도 없이 아멘으로서 하나님의 종처럼, 그분의 분신처럼 사셨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아가는 아들 예수와 항상 동행하셨다. 요한복음 8장 29절.
그래서 그분의 지상 생애는 충성스러운 증인의 삶 자체였으니, 그것은 죽기까지 자기를 다 드리신 충절이었다.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브리서 3장 2절 (개혁한글)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죽으시는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는 더 이상 육신의 가족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
성자의 희생에 대한 나의 인식
이제는 이제 예수는 당신의 남은 육체를 한 번에 깨뜨려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당신의 구속 사역의 마침표를 찍고자 하셨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자가 철이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불 붙는 사랑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어두운 밤 하늘에 장렬하며 찬란히 산화하는 아름다운 불꽃이 되었다.
그래서 성숙한 신자의 마음 안에는 반드시 그렇게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다.
그들의 마음에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의식이 살아 있고, 자신이 모든 죄인들 중에 가장 흉악한 괴수라는 인식이 또렷이 남아 있다.로마서 1장 14-16절, 디모데전서 1장 15절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지극히 사랑하셨으나, 그 사랑은 더 이상 육신의 정에 매어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시고도 마지막 남은 옥체를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깨뜨려 화목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다 드리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 때문에 구원을 받은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한때 십자가를 알고 사랑했으나 이제 마음속에서 그 십자가가 사랑은 빛 바래고 세상 사랑이 타오르고 있지는 않은가?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찌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를 위함인가
...예수 오 예수 나의 죄를 대속하신 주,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2대지 정리 및 적용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복음의 진리로 우리의 허리띠를 동여매자. 에베소서 6장 14절.
그리고 우리가 그 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순간, 우리 자신 전부가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잊지 말자.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의 도를 조롱하고, 세상의 사랑은 우리를 유혹하나,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아 예수의 순결한 신부가 되었다.
지순의 사랑(까리따스)으로 그분의 신부가 되었으니, 그 사랑을 간직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던 삶의 궤적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모질게도 질기고 질긴 세상 사랑에 얽매인 줄을 끊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를 순결한 신부로서 사랑하자.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목사 안수를 앞두고 쓰신 시이다. 나도 이런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자.)
“나의 눈물로 정한수를 삼아 찢기신 예수의 이마에 핏자국을 닦아드리자.
내 머리카락을 잘라, 신발을 삼아 벗으신 그분의 발에 신겨드리자
내 살가죽을 벗겨서 고운 홍포로를 지어 벗으신 몸에 덮어드리고
점점이 살을 베어서 못 박혀 뚫어진 손바닥, 참으로 구멍 난 그분의 옆구리를 메워드리자.
그리하고도 남은 살과 피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도 저의 것이 아니옵나이다.”라고 고백하자
C. 제자를 다시 받아줌
C. 제자를 다시 받아줌
셋째로 예수께서 요한을 다시 제자로 받아주셨다.
사도 요한이 도망갔다가 돌아온 상황 설명
그리고는 예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장 27절.
여기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되어 있는 이 사람은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 자신이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다른 제자들과 같이 도망갔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처럼 악한 자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서 숨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요한은 마음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아마도 도망가서 숨어 있는 동안에 예수께서 생전에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회상하였을 것이다.
그는 결심했다. 늦게라도 십자가에 예수께 돌아가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을 돌이킨 요한은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갔다.
비록 그것은 시간적으로 때늦은 후회였으나 의미적으로는 가장 적합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고 나니 이제 요한은 죽는 것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더욱이 그렇게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던가?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를 마친 수많은 인파가 골고다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도 요한이 돌아온 이유_사랑
언덕 아래로 물 밀듯이 내려오는 유월절의 인파를 거슬러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 요한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라.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달려 오르고 있는 어린 제자 요한의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곧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이렇게 골고다 언덕을 향해 달려 올라가는 요한에게 이제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의 예수를 향한 사랑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게 한 것이다. 요한일서 4장 18절.
언제 요한이 십자가에 도착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복음서 어디에도 요한이 십자가로 돌아온 후에 예수께 무슨 말씀을 건네드렸다는 기사가 없다.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황급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아래 돌아왔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이미 저지른 자신의 배신 때문에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떨군 채 차마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사도 요한을 용서하시고 신뢰하고 사랑하심을 표현
그런데 그런 부자유한 요한의 마음을 예수께서 풀어주셨다.
그 말씀이 바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장 27절.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아직도 자신의 제자로서 요한을 신뢰할 뿐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고 계셨음을 보여주셨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온 몸의 살점이 찢기시는 중에도 하찮은 제자, 그것도 당신을 배반했던 제자까지 이처럼 세심히 배려하셨는가?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도 주어짐
상처와 아픔 속에 홀로 내팽개쳐 버려진 것과 같은 나를 이처럼 세심하게 사랑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그분을 아프시게 했던 우리의 죄악에 대한 기억들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마치 하나님의 음성이 또렷이 들리는 듯하지 않는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또 한 번 못 박지 말라” 히브리서 6장 6절.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혼절하실 만한 고통을 겪고 계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관계, 교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예수는 이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아들로서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속에서 놓아주시고, 요한을 그녀의 친아들로 맺어주셨다.
이처럼 십자가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물은 피보다 진하다."(aqua crassior est quam sanguis).
이 말의 의미는 물의 세례로서 그리스도께 접붙여 맺어진 신앙의 가족이 육신의 피 곧 혈통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욱 소중하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 요한과 마리아를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로 묶어주시는 것을 보라.
십자가의 감격이 있는 곳에 형제 사랑이 있고, 그 감격이 사라진 곳에는 세상 사랑이 있다.
3대지 정리 및 적용
비록 한때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으나 그것이 잘못임을 깨달았을 때 사도 요한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아래로 달려왔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돌아온 요한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단 한 번도 넘어지는 일이 없이 날이 갈수록 더욱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신자들이 그런 삶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성숙한 신자, 시련으로 단련된 신자는 환란과 유혹 속에서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 사람들이었다. 시편 130편 4절, 디모데전서 1장 16절.
한 사람의 신자가 알고 느끼는 하나님 사랑의 크기와 넓이는 그가 가진 용서의 크기와 넓이에 비례한다.
우리는 모두 한때 그분을 등지고 배향했던 사람들이다.
(배향 이렇게 등질 배자에다가 방향할 때 향자예요.아베르지오, aversio )
그런 우리를 그분께로 전향, 콘베르지오,conversio 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고,
또 그 길을 따라 올곧게 정향 하게 하신 이도 그분이셨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것은 모두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이었고, 다시 화목하게 된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돌이킬 힘을 주셔서 십자가 앞에 회개하고 죄에서 구원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스러운 제자 요한처럼 소매 깃으로 눈물을 훔치며 두려움 없이 다시 예수의 십자가가 있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자.
그 십자가 안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던 요한처럼 그렇게 예수 곁에 있어 드리자.
가엾은 그를 기쁘게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주셨던 것처럼, 예수를 버리고 멀리 떠났던 우리들, 다시 받아주시지 않겠는가?
III.적용과 결론
III.적용과 결론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온전하기를 원하는, 그렇지 못할 때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사실은 가장 빠른 때가 아니겠는가?
지금은 우리가 요한처럼 십자가로 돌아갈 때이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도 없고, 십자가로 돌아가기에 너무 늦은 시간도 없다.
이렇게 있는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앞으로 달려올 때 우리를 다시 아가페의 사랑으로 받아주시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지난날의 과오가 아무리 클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이 함께 주님을 배반했음을 인정할 용기와 그 죄를 참회할 뉘우침이 필요하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십자가 아래로 달려올 용기와 참회의 정신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받아주신다.
그래서 그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분이 계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자. 그리고 이제는 다시 그분 곁을 떠나지 말자.
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