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_제6장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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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예배와 헌금

모든 것을 드린 예배입니까?

고린도후서 8:1 NKRV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어느 목회자가 교인들의 헌금 생활을 보며 통탄했습니다.
평신도로서 최고의 직분을 받은 교인이 절기 헌금을 3천 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가난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않느냐고 제가 반문을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분은 두 채의 빌딩과 7개의 상가를 가진 사업가입니다.
신자가 영적으로 잠들 때 깨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질에 대한 탐심입니다. 자기만을 위하려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위해 살게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세상을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물질을 누리며 만족할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자유로울 리가 없습니다.

넘치도록 헌금한 마게도냐 교회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곳에 살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때 다른 곳에 있던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을 해서 그들을 도왔습니다.
바울은 교린도 교회에게 헌금에 관해 말하면서 가난한 마케도니아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였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신앙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1 NKRV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재난을 당한 한 형제들을 위해 마게도냐 교회는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사실은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환란에 많은 시련을 겪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고 일꾼들도 세웠습니다.
어느 교회의 이름을 말하면 느껴지는 우선적인 인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마게도냐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환란과 많은 시련이었습니다.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고후 8:2)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부 지역입니다.
당시 가혹한 징세와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본문에서 말하는 환란과 시련이 그런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박해였던 것 같습니다.
시련을 당해도 부유한 교인들이 많이 있다면 헌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는 극심하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손때 묻은 헌금으로 운영되는 교회와도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마게도냐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넘치도록 헌금하였습니다.
부자인 고린도 교회를 부끄럽게 할 정도로 넘치는 헌금을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이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 많은 교회는 오히려 항구 도시에 위치한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넘치도록 헌신하게 했을까요?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헌금의 비결, 기쁨.

마게도냐 교회는 환란과 시련, 극심한 가난 속에서 고통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넘치는 헌금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그 비결은 넘치는 기쁨이었습니다(고후 8:2).
고난과 시련을 많이 당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들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영적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넘치도록 드릴 수 있었습니다.
신령한 기쁨이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시련보다는 더 큰 사랑이 있었습니다.
환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을 넘치도록 섬기게 하였습니다.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였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 생활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재산이 아니라 은혜가 헌금하게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를 통해 얻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은혜의 기쁨이 있으면 넘치도록 헌금할 수 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를 향해 감사하며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타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요 너희가 마게도냐 교회처럼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했느냐 평안함에도 불구하고 너희 속에는 은혜의 기쁨이 없구나.
은혜 받은 마게도냐 교회를 보라. 환란과 시련의 폭풍이 여러 차례 덮쳤다.
그럼에도 너희에게 없는 것이 그들에게 있었으니 바로 넘치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불쌍한 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많은 헌금을 바치게 하였다.
너희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모여 살아도 기쁨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교인들이 모였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에는 언제나 넘치는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예배 속에서 표현합니다.
경배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마음을 바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그것을 헌금으로 표현하면서 말입니다. 인생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들여지는 본보기로서 헌금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신앙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삶을 농축한 재물

헌금하는 것이나 헌금을 위해 축복하는 것이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헌금의 의미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재물은 그것을 정당한 방법으로 번 사람들에게는 인생을 농축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재물 속에 하나님이 주신 직업의 기회를 선용한 땀과 노력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 중 그것만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농축해서 바칠 수 있는 것도 흔치 않습니다.
교회는 도박을 하거나 뇌물을 받아서 모은 돈을 헌금으로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정하게 취득한 돈에 관해서는 헌금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득 자체를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돈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행 5:5).
신앙을 따라 살며 번 재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 돈은 깨끗한 것이오 땀이고 눈물입니다.
그래서 헌금 순서는 예배에서 아름답고 고상한 것입니다.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시험에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설교자가 돈을 위해서 설교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설교한다면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교인들을 구두쇠로 보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복음을 들을 귀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복음으로 헌금의 의무를 설교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담임 목회자가 공석 중인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빙되었습니다.
임시 설교자로 간 목사님은 6개월 동안 헌금에 대해서만 설교하였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출석이 줄어들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기간 동안 출석 성도가 더 늘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두 주에 걸쳐 헌금을 설교했습니다. 다른 때는 설교에 별로 감동되지 않던 교인들 중 여러 사람이 헌금 설교를 들으며 흐느꼈습니다.
돈 내라는 논리가 아니라 복음에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헌금 생활을 하나님 앞에 뉘우쳤습니다.
그의 연말에 가장 은혜롭던 설교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투표를 한 적이 있는데, 헌금 설교가 순위 안에 들었습니다.
목회자가 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설교한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설교자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성도들의 영혼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들의 인격과 생활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게끔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적 기쁨을 가져올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내는 헌금의 액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돈은 정말 깨끗하고 최선의 것을 드린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은혜로 산다는 고백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다가와 옥합을 깨뜨려 거기에 든 향유를 모두 부었습니다(마 26:6-13).
요즘 물가로 계산하면 약 5천만 원어치쯤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부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지난날의 인생도 드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그녀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습니다.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 7:39), 그녀는 ‘많은 죄’를 지었고, 어쩌면 창녀였을 수도 있습니다(마 21:31-32).
부끄러운 직업에 종사하면서 물질을 모으는 재미로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게 모은 재물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분을 몰랐습니다.
이제 그분을 만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질로 위로받을 수 없던 영혼이 사랑으로 어루만져 졌습니다.
외롭고 고달프게 살아왔을 여인을 예수님은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여인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재물을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모두 부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삶의 가치가 변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껏 자기를 위해 세상을 사랑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헌금은 이런 고백과 함께 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나 제자가 살아가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이옵나이다.
이것이 헌금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그것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고백입니다.
물질 덕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헌금 생활은 인색할 것입니다.
충분한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산다고 고백할 수 있으면 풍성한 헌금 생활을 할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란과 많은 시련,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넘치도록 헌금했습니다.
이제 그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로 살아왔으나 물질 때문에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구속하신 은혜를 힘입어 살아왔습니다. 환란과 시련을 많이 겪었으나 거기서 건져주신 사랑 때문에 살았습니다.
결핍 속에서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요 14:18).
풍성한 헌금은 지금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시 50:7-12).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의 헌금을 받으려고 하시겠습니까?
다만 헌금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목회자는 교인들이 순수한 동기에서 헌금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외식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흥금하게 해야 합니다.
올바른 정신으로 헌금하게 해야 합니다. 헌금한 사람은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헌금을 받은 교회도 헌금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낸 돈으로 교회가 운영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모은 돈으로 목회자와 직원들이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헌금의 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헌금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직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받치는 헌금이라면 그것은 받칠 때부터 헌금이 아니라 회비입니다.
헌금으로 바쳐진 순간, 그것은 성도들의 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 창고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서 교회에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기쁨이 헌금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최선의 것을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경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풍족한 삶을 살면서도 헌금에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은혜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왔고 또 살아가리라고 확신하십시오.
넘치게 헌금하십시오. 은혜는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물질보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무엇이 살아오게 하였습니까? 은혜였습니까? 물질이었습니까?
주님의 도우심이었습니까? 자신의 능력이었습니까?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앞으로도 그 은혜에 비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헌금 생활의 세 가지 원칙.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헌금을 해야 할까요?
헌금이 얼마만큼의 액수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금일까요?
성경 금액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산술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천원도 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100만 원도 적은 돈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원칙을 제시합니다.
고린도후서 8:3–5 NKRV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에 대한 사도 바울의 평가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실천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힘대로 혹은 힘에 지나도록 하라.
둘째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라.
셋째로 자신을 먼저 드리라.

힘대로 또는 힘에 지나도록.

첫째로 힘대로 혹은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은 액수에 있어서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진하도록 한 헌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헌금하고 있습니까? 주일 헌금은 푼돈을 내는 헌금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일 헌금을 얼마나 즉흥적으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헌금들은 모두 봉투에 넣어 드립니다. 그런데 주일 헌금은 대체로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일 헌금은 그냥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잡히는 대로 헌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갑을 열고 고액권이 나오면 제쳐놓고 이리저리 푼돈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매년 12월에 1년간 하나님 앞에 바칠 주일 헌금의 액수를 미리 정하십시오.
얼마로 할지는 각자가 정하십시오. 그런데 그 액수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액수가 너무 적어서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금액보다는 많아야 합니다.
또한 액수가 너무 커서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보다는 적은 금액이어야 합니다.
신경 쓰지 않도록 않고도 마련할 수 있는 액수보다는 많아야 합니다.
신경을 써도 준비할 수 없는 액수보다는 적게 작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정을 따라 1년 동안 매 주일 정성껏 미리 준비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금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이미 금액이 정해져 있고, 감사 헌금도 형편에 따라 액수가 다를 것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시시때때로 감사헌금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모두 동일합니다. 힘대로 혹은 힘에 지나도록 해야 합니다.
무리하게 빚을 내서 헌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나쁜 것은 도무지 힘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준비하지도 않은 채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둘째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4)
마게도냐 교인들은 할당받은 회비를 납부하는 마음으로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하였습니다.
자기들도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체면 치례를 위해서 바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드린 헌금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바치는 헌금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헌금 생활, 헌신이 전혀 없는 물질 생활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헌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헌금의 의무에 대해 인식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물질적 섬김에 대한 부르심을 알게 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헌금이나 헌금이 없는 마음 모두 최선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리며

셋째로 먼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교인들의 헌금은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하나님 앞에 자신을 먼저 들린 사람은 헌금을 바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풍성한 헌금을 하면서도 보잘것없는 헌금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헌금 생활이 풍성하지 못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든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마다하여도 주고 싶고, 달라고 하지 않아도 더 주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다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탐욕은 나만을 위해서 살게 하고,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게 합니다.
예배 가운데 한 지체가 한없이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불꽃처럼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결코 많아 보이지 않는 헌금 봉투가 강대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봉투 아랫부분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한가운데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허물과 죄에서 건지기 위해 지불하신 대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갈 1:4, 딤전 2:6). 당신의 육체를 깨뜨려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자신을 바친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로마서 8:32 NKRV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맺음말

하나님이 헌금보다 먼저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드릴 때 헌금은 향기로운 제물이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넘치도록 헌신한 마게도냐.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도 물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를 위해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들인다면 물질은 이미 그분의 것이니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얼마나 쉬울까요?
성경적인 헌금 생활로 돌아가십시오. 참된 예배를 예배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헌금도 불꽃처럼 드려져야 합니다.
시간의 십일조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터디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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